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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7장1~17절
제목 : 소외된 자들의 구주
오늘 본문1절에 “모든 말씀을 ·· 마치신 후에”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말씀”은 “평지 수훈”을 말씀합니다.
6:20~26절 4가지 복과 4가지 화를 말씀하고,
네 가지 복(福)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인자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는 자는 복(福)이있고,
네 가지 화는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모든 사람으로 칭찬 듣는자는 화(禍)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27~35원수를 사랑하라 하며 7가지를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 ①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②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③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④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⑤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⑥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⑦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6절이하에서는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4가지를 교훈하십니다.
①비판하지말라 ②정죄하지 말라 ③용서하라 ④ 주라고 하십니다.
39~42절 바른 삶에 대한 비유의 말씀으로
맹인, 제자, 티, 들보의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43~49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한 비유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① 나무 ② 마음 ③집 짓는 비유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그리스도의 신앙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나아와',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서,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치유(治癒)하시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이를 통해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구원 사명(4:18)과 자비(6:36)를 친히 실천하십니다.
1. 백부장의 경외심(1~5절)
1)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십니다(1절).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가버나움]은
(1)갈릴리의 번창한 도시이며(마 11:23 눅 10:15),
(2)갈릴리 바다, 즉 게네사렛 호수의 북서쪽 연안에 위치하며(요6:17요 6:24),
요단강이 이 호수로 유입되는 곳에서 가깝습니다.
(3)가버나움은 당시에 번창한 도시로 세관이 있었습니다(마 9:9).
(4)가버나움에는 왕의 신하의 집이 있었습니다(요 4:46).
또한 가버나움에는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준 백부장도,
자기 부대와 함께 주재하였습니다(마 8:5-13 눅 7:1-10).
베드로와 안드레는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가버나움에 살았으며,
예수님을 만나 영접했습니다(막 1:16-21 요 1:4).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 후에(마 4:13 요 2:12)
가버나움을 갈릴리 전도의 본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둘째 고향이 되었습니다(막 2:1).
예수님께서는 이 가버나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고(마 4:18 막 1:16 눅 5:1),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을 것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 9:9 이하; 막 2:13 이하; 눅 5:27 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여기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막 1:21 눅 4:31 요 6:59), 성전세 반 세겔을 내게 하셨습니다(마 17:24).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중풍병 걸린 백부장의 하인(마 8:5-13 눅 7:1-10),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요 4:46-54),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마 8:14-17 막 1:29-31),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자(마 9:2-8 막 2:1-12 눅 5:17-26),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막 1:21-26 눅 4:31-37),
그 밖의 많은 병자(마 8:16 마 8:17 막 1:32 이하; 눅 4:23 눅 4:40 이하)를 고치셨다.
2)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2절)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본래 백부장이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를 말합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백부장의 군대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로 구성되었고 헤롯 안디바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장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기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백부장의 지위에 선택되었다고 진술합니다.
따라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성실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격이 요구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된 백부장들이 모두 인격자였다는 것과 일치합니다(23:47;행 10:22;22:26;23:17;24:23).
*눅23:47“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행10:22“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사랑하는 종”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파이스'('하인')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마 8:6) 누가는 분명히 '둘로스'('종')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종'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고 주인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종과 상전이라는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를 손수 찾아가 예수님께 부탁을 올릴 것을 간구한 사실은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반영합니다.
아울러 이 종이 그의 상전인 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 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반증하기도 합니다.
3)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3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합니다(마 8:5).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 '구해 주시기를'(디아소세)이란
폭풍 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 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 백부장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 터라
감히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합니다.
4)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처주기를 간절히 구합니다(4절)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습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 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습니다.
'간절히'란 원어 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님께 열심히 간청한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구하여'는 미완료형으로서 간구하기를 시작한 후 계속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5) 백부장의 한 일을 거론합니다(5절)
“[5]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이 구절은 앞에서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원래는 '가르'('왜냐하면')가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저가'(아우토스)는 문법적으로 '그 자신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회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습니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없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2. 예수님을 아는 믿음(6~10절)
장로들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는데 그의 벗 들이 와서 예수님께 백부장의 말을 전합니다.
1)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씀만 하여 고처 달라고 합니다(6,7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1)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주여! 하는 것은 신앙적 고백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 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11-16절), 풍랑을 잔잔하게도 하셨습니다(8:22-25).
예수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창 1:1-31).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인'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3) 백부장이 예수님이 말씀으로 명하면 낳을 이유를 말씀합니다(8절).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나도. - 원문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말씀으
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냅니다.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께서도 어떤 권위로 말씀만 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백부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릅니다(왕하 6:17;시 34:7;68:17;103:20;마 26:53).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수님과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 이십니다(요 17:2).
*요17: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4) 백부장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반응입니다(9절)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습니다(막 6:6).
*막6: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습니다
그 백부장의 믿음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①그의 겸손(謙遜)함(humility)입니다.
②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입니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4:50(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에서도 발견됩니다.
③예수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2)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5:20;마 8:2,3).
*눅5: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침상에 메고온 중풍병자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줍니다.
5)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있었더라(10절).
마태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의 메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 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11~15절).
1)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갑니다(11절).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납니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이 성에서 엔돌(Endor)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습니다.
한편'나인'성은 오늘날까지 '네인'(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합니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 같은 굴들이있었다고 전합니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葬禮行列)과 마주치셨습니다.
아마 그 지역의 사람들은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왕하 4:8-37).
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옵니다(12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습니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회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르었습니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지금 성문 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의 일행은 성문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생활을 입증합니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
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냅니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3)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십니다(13절).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호 퀴리오스).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냅니다.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십니다.
불쌍히 여기사(스플랑크니조마이). -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습니다(마 14:14;15:32;20:34).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님께서는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마 15:32;20:34;막 1:34;8:2).
*마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7병2어-4천명 먹이고, 일곱광주리 거둡.(막8:2)
*마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두 맹인을 고치심.
*막1:34“예수께서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리고 이는 곧 죄 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 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죽으시게끔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입니다.
울지말라(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입니다.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 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4) 과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14~15절).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가까이 가서 고 관에 손을 대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 22:4;민 19:11).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습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①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②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합니다.
일어나라. -예수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 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8:54;요11:43).
*눅8:54“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회당장의 딸.
*요11: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
(왕상 17:21;왕하4:35;행 9:40;20:1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 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입니다(롬 8:2;고후 1:10;딤후 1:10).
(2)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합니다(15절).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그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16~17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누가는 또 다시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26;18:43;23:47).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 진 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2)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입니다.
3) 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왕하4:35)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입니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당시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4)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룻1:6;삼상2:21),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돌아 보셨다' 말은 하나님이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말 4:2)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5) 이 소문이 온 유다와 사방에 퍼졌습니다(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입니다.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7:9절에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칭찬을 듣게 된 것은
첫째로, 백부장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을 불쌍이 여기시고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을 만나므로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시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유대인들이 바라던 다윗과 같은 강력한 ‘군주’가 아니라,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찾아오시는 ‘구주’이십니다.
혈통적으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소외당하던 이방인(1~10절),
과부(11~17절), 죄인(36~50절)에게 자비의 손을 내미십니다.
세상이 거절하고 밀어낸 소외의 자리에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아버지를 닮은 참 아들(6:36)이요, 가르친 대로 실천하신 참 스승(6:40)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내 주변에서부터 차별과 소외의 구조를 극복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만들어 갑시다.
2) 이방인이면서도 말씀의 권능을 믿은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시고 그 믿음대로 종의 병을 고치십니다(9,10절).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믿음을 이방인에게서 보셨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과 조국을 살릴 수 있는 길도 금력이 아니라 주의 권능을 의지하는 이 믿음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분명한 확신 속에 단순하게 순종하고 맡기는 그 믿음으로 불신과 불안의 시대를 이겨내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먼저 말씀의 능력을 믿고 증명하기 시작하면 내가족도, 내주변도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3) 이방인 남자(백부장)에 이어 유대인 여자(과부)를 찾아가 긍휼을 베푸십니다(11~18절).
어떠한 요청(3절)도 없었지만 먼저 다가오셔서 독자를 잃은 슬픔으로 절망하는 과부를 위로하시고 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속량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음을 증명하십니다(1:68).
지금 주께서 손을 대고 살려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백부장은 병든 종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2~8절).
‘합당하다’는 장로들의 말에 ‘감당할 수 없다’며 주의 자비를 구합니다.
예수님을 능력 있는 윗사람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께 말씀 한마디면 멀리서도 종을 낫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백부장의 자비와 겸손과 믿음은 실천으로 열매 맺는 성도의 산 모범(6:43~49)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