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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점검93: 보화화상이 공양상을 발로 차다
보화스님이 하루는 임제스님과 함께 시주의 재(齋)(공양)에 초대되었다.
임제스님이 말했다.
“(유마대사는 말하기를) ‘털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가 수미산을 거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통묘용인가? 본체가 그러함인가?”
이에 보화스님이 공양상을 걷어찼다.
임제스님이 말했다.
“너무 거칠다.”
보화스님이 말했다.
“이 안이 어디라고 거칠다 세밀하다 하는가?”
임제스님은 그만두었다.
다음 날 또다시 같이 재에 갔는데, 임제스님이 또 물었다.
“오늘의 공양은 어제에 비해 어떠한가?”
보화스님이 또다시 공양상을 걷어찼다.
임제스님이 말했다.
“너무 거칠다.”
보화스님이 말했다.
“눈 먼 자야, 불법을 어찌 거칠다 세밀하다 말하겠는가?”
임제스님이 이에 혀를 토하였다.
普化一日同臨濟赴施主家齋。濟問。毛吞巨海。芥納須彌。為復是神通妙用。法爾如然(本體如然)。師遂踢倒飯床。濟曰太麤生。師曰。者裏什麼所在。說麤說細。濟休去。次日又同赴齋。濟曰。今日供養。何似昨日。師又踢倒飯床。濟曰太麤生。師曰。瞎漢。佛法說甚麼麤細。濟乃吐舌。
옛 사람은 여기에 대해 평하기를, ‘두 존숙은 마치 두 마리 용이 구슬을 다투는 것과 같아서 구름을 움켜쥐고 안개를 휘저어도 물결이 움직이지 않는다. 흡사 두 마리 호랑이가 먹이를 다투는 것과 같아서 산 채로 생포하지만 전혀 상처를 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도대체 저 두 분은 어떤 기량과 역량을 보였기에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
또한 옛 사람은 말하였다.
“한 사람은 용을 사로잡는 솜씨를 갖추었고 한 사람은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리는 기틀을 갖추었다. 둘 다 작가인데, 자 말해봐라. 누가 호랑이를 빠뜨리고 누가 용을 사로잡는가?”
누가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리고 누가 용을 사로잡는 솜씨를 보였는가?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것이 무슨 말이고 용을 사로잡는 솜씨란 어떤 솜씨를 말하는가? 만약 이것을 살필 수 있다면 저 암두스님이 덕산스님에게 범부인지 성인인지를 묻는 화두 또한 살필 수 있으리라.
화두를 살핀다는 것은 곧 이와 같은 것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는 좋은 안목을 얻는데 있다고 하겠다. 깊이 꿰뚫을 수 있다면 옛 사람에게 다가갈 뿐 아니라 또한 어찌 이러한 질문에 여유롭지 않으리오.
두 분은 모두 하북(河北) 진주(鎮州)에 머물렀다. 당시 임제선사께서는 임제원(臨濟院)에 삼현삼요(三玄三要)를 설하였고, 보화스님은 진주 거리를 누비면서 흡사 미치광이처럼 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기에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임제는 백적(白拈: 노련한 도적의 솜씨)에 익숙하고
보화는 미친 짓에 익숙하였다.
한 바탕 좋은 웃음거리인데
후세에서는 삼현(三玄)을 지었다. (별봉 인)
臨濟慣白拈。普化慣掣顛。
一場好笑具。後世作三玄。(別峰印)。
무엇을 삼현(三玄)이라고 하는가? 설사 이 말을 처음 들어본다고 해도 불법의 큰 맥을 간파했다면 삼현을 더듬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삼현이란 곧 세 가지의 그윽한 도리를 가리킨다. 무엇이 저 세 가지인가?
두 분이 하루는 공양에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는 또한 여러 스님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임제스님은 한 마디를 던진 것이다. 모두들 또한 이 말을 듣고서 살폈을 것이다.
“털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가 수미산을 거둔다.”
이것은 『유마경』에서 유마거사가 한 말이다.
유마거사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불보살들께는 ‘하나의 해탈법문’이 있으니, 이것을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부릅니다. 만약 보살이 이 해탈에 머물면, 높고도 드넓은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어도 늘거나 수미산이 줄지 않습니다. 수미산왕의 본래 모습이 이전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미산 가운데 거주하는 4천왕이나 도리천(忉利天: 곧 삼십삼천으로 天主는 인드라 제석천왕으로 善見城에 머물다)의 모든 천인들은 자기가 겨자씨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오직 (생사의 바다를) 건넌 자만이 수미산이 겨자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것을 ‘불가사의해탈법문’이라고 이름 합니다.
維摩詰言:「唯,舍利弗!諸佛菩薩,有解脫,名不可思議。若菩薩住是解脫者,以須彌之高廣內芥子中無所增減,須彌山王本相如故,而四天王、忉利諸天不覺不知己之所入,唯應度者乃見須彌入芥子中,是名住不思議解脫法門。
참고로 제석천왕은 힌두교의 최고신으로 부처님의 교화를 입고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되어서 수미산 정상에 위치한 도리천을 관장하는 주인이 된 것이다.
유마거사는 말하기를, ‘털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가 수미산을 거둔다.’라고 했는데, 임제선사는 이것을 인용하여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가? 그 의도를 깊이 꿰뚫지 않고서는 이 일화에 한 걸음도 다가가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저 두 분이 보인 모습이 서로 다른데, 여기에는 어떤 불법의 이치가 있는지를 깊이 살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여기에 대해 옛 사람들은 어떻게 노래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서로 만나 특별한 기연(機緣)을 펼쳤는데
출몰이 종횡하여야 묘한 작용이 온전하다.
물총새는 연잎의 비를 밟아서 뒤집고
백로는 죽림의 안개를 부딪쳐 부수었다. (량산 서)
相逢特地展機緣。出沒縱橫妙用全。
翡翠蹋翻荷葉雨。鷺鷥衝破竹林煙。(浪山嶼)
‘특별한 기연을 펼쳤다’는 것은 저마다의 역량을 가지고 불법의 인연에 응하였다는 것이다. ‘출몰이 종횡하여야 묘한 작용이 온전하다.’라고 했는데, 결국 두 분이 이와 같았다는 것인가? 이와 같지 못했다는 것인가? 살필 수 있어야 하리라. 물총새, 백로는 결국 누구의 일인가? 가려낼 수 있어야 하리라.
또한 옛 사람은 게송하였다.
진금(真金)을 알려면 모름지기 불속에 넣어봐야 하니
두 번 세 번 단련해야 거칠고 정교함을 본다.
위로 가서 매매함에 양보가 없었는데
좋은 물건은 언제나 값이 특별하다. (해인 신)
要識真金須入火。再三鍛煉見精麤。
上行買賣不饒讓。好物從來價自殊。(海印信)
‘양보가 없었는데’라고 한 것은 두 차례를 서로 거량했어도 둘 다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좋은 물건은 언제나 값이 특별하다’고 했는데, 저 두 분을 긍정한 것인가? 긍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게송하였다.
서로 만나 한 차례 눈멀고 한 차례 거칠음이여
재주(齋主)의 온 집안이 간담이 서늘하다.
누가 두 존숙의 용상수레를 알겠는가?
비로(자나)의 정수리 위를 한가롭게 갔다. (야헌 준)
相逢一瞎一麤生。齋主渾家喪膽驚。
誰識二尊龍象駕。毗盧頂上等閒行。(野軒遵)。
‘두 존숙의 용상수레를 알겠는가?’라고 한 것은 저 두 분의 거동을 꿰뚫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비로(자나)의 정수리 위를 한가롭게 갔다.’라고 했는데, ‘한가롭게 갔다(等閒行)’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유롭고 넉넉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소 소홀함이 있었다는 것인가? 여유롭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유롭고 소홀했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홀했는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리라.
미치광이 보화에
입을 벌리고 혀를 토하는 임제여!
함께 대기대용을 펼쳤다.
조사관문을 비트는 것을 누설해보면
남산 자라코 뱀은 이빨을 보태고
꼬리를 태운 대충은 날개를 단다. (남당 흥)
掣顛掣狂普化。張口吐舌臨濟。
共展大機大用。漏泄祖師關捩。
南山鱉鼻添牙。焦尾大蟲插翅。(南堂興)。
어째서 미치광이 보화라고 부르는가? 저 공양상을 발로 차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는 보통의 상정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입을 벌리고 혀를 토했다’는 것은 저 보화스님의 그러함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함께 대기대용을 펼쳤다’는 것은 이 가운데는 큰 기틀도 있고 큰 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사관문을 비트는 것을 누설해보면’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을 보면 ‘漏泄祖師關捩’이다. 이것을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보는 눈에 따라서 다양한 번역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줄줄 새는 조사관문을 잡아 비틀다’라고 할 수도 있고, ‘조사관문을 누설하여 비틀어 열다’라고 할 수도 있고, 내지는 이처럼 ‘조사관문을 비틀어 여는 것을 누설하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산 자라코 뱀은 이빨을 보태고’라고 한 것은 자라코 뱀이 독이빨을 가지고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라코 뱀이란 곧 코브라를 가리킨다.
일찍이 설봉선사는 말하기를, ‘남산에는 자라코 뱀이 있으니, 각자는 조심해야 한다’라고 했다. 옛 사람이 이렇게 말한 뜻은 결국 무엇인가? 이 뜻을 알지 못하면 곧 여기에서 ‘남산의 자라코 뱀은 이빨을 보태고’라고 한 뜻도 알지 못할 것이다. ‘꼬리를 태운 대충은 날개를 단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꼬리를 태운 대충’인가? 여기에서 대충(大蟲)이란 곧 호랑이를 부르는 다른 별칭이다. 결론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이는 곧 옛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해보면, ‘주먹으로 황학루(黃鶴樓)를 부수고 발로 앵무주(鸚鵡洲)를 걷어차고서 의기의 때에 의기를 보태고 풍류가 없는 곳에서 풍류를 짓는다’는 것이다.
설두 중현선사는 여기에 대해 평하였다.
“두 늙은이가 밥을 먹는 것을 마치지 못하였다. 삼십 방망이를 먹여야 하리라. 비록 방망이를 행하더라도 자! (말해보라) 누가 바른 도적인가?”
翠峰顯云。兩箇老漢喫飯也不了。好與三十棒。棒雖行。且那箇是正賊。
방망이야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해도 반드시 제대로 살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리라. 자! 누가 바른 도적인가? 임제인가? 보화인가? 누가 과연 진짜 도적인가?
이 두 분을 제대로 가려내는 것이 이 화두의 핵심인 것이다.
남화 욱은 말했다.
“임제는 얼굴을 보고 손을 잡아끌고 보화는 온전한 기틀을 돌렸다. 이는 곧 남산의 자라코(뱀)은 동해의 곤어(鯉魚)를 삼키고 섬부의 철우는 가주의 대상(大象)을 뒤엎었다. 어째서인가? 서로 만나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저마다 앞으로 길을 갔기 때문이다.”
南華昺云。臨濟覿面提撕。普化全機酬醋。直得南山鱉鼻吞卻東海鯉魚。陝府鐵牛觸倒嘉州大象。為甚如此。相逢不下馬。各自奔前程。
여기서 곤어(鯉魚)는 곧 잉어를 가리킨다. ‘서로 만나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저마다 앞으로 길을 갔기 때문이다’라고 한 뜻이 무엇인가? 그대는 소상(瀟湘)으로 가고 나는 진(秦)나라로 향한다는 것이다. 누가 진나라로 향하고 누가 소상으로 갔는가? 참고로 소상(瀟湘)이란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을 일컬으며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영릉현(零陵縣) 북쪽에서 두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서로 합류하여 양자강에 유입되어 동정호를 지나 동해 바다로 흐르는데, 일반적으로 소상이란 동정호 남쪽 주변 일대의 강호(江湖) 지역을 일컬으며 팔경(八景)으로 유명하고 물이 풍부하다고 하였다.
또한 옛 사람은 말했다.
“보화는 천관(天關)을 번쩍 들었고 임제는 지축(地軸)을 돌렸다. 그 짓는 바가 높고 험준하다고 하겠지만, 바른 눈으로 보면 둘 다 눈먼 자이다. 각각 서른 방망이를 때려야 하리라. 문득 어떤 자가 나 혜운은 누구의 방망이를 맞아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후려치며 말하리라. 용과 뱀을 가려내기는 쉬워도 납자를 속이기는 어렵다.”
慧雲盛云。普化掀天關。臨濟轉地軸。就其作為不妨峻峭。正眼看來二俱瞎漢。好各與三十拄杖。忽有個漢道慧雲棒教誰喫。打云。龍蛇易辨。衲子難瞞。
어째서 저 옛 사람은 천관(天關)이니 지축(地軸) 운운 했을까?
‘납자를 속이기는 어렵다’라고 한 것은 결국 그대의 그러한 물음은 스스로가 이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한 자 적는다.
용과 뱀을 가려내기는 쉬워도
본색납자를 가려내기란 어렵다.
미치광이 짓에 입을 벌리고 혀를 토함이여
물이 물에 들어가고
금으로 금을 넓혔다.
고림선원 취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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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눈먼 자야 불법을 어찌 거칠다 세밀하다 말하겠는가 ㅡ합장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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