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2월 27일 오전 서울 시민회관에서는 박정희 의장이 민간정치인들과 함께 정국수습의 원칙에 합의하는 선서모임을 가졌다. 박 의장이 2월 18일에 자신의 민정불참 조건으로 제시한 ‘보복금지’, ‘혁명정신계승’ 등 9개항을 민간정치인들이 받아들이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박 의장은 式辭(식사) 도중 눈물을 짓기도 했고 목이 메이기도 했다. 이 연설에서 박정희는 함축성 있는 경고를 한 자락 깔았다.
“세대교체를 이룩하지 못한 이 나라의 政情(정정)은 오로지 여러분들의 일대 각성과 노력 없이는 또 다시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날 박병권 국방장관과 3군 참모총장들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군 수뇌는 ‘우리는 새로 탄생할 民政(민정)을 지지하고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이다’고 다짐하면서도 ‘박 의장을 비롯한 각급장교들은 군에 복귀하여 군의 발전에 기여해줄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지 군복을 벗고 야인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박 의장이 군복을 벗지 않는 한, 또 그가 군에 복귀하여 군의 지도자로 남아 있는 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잠재력과 가능성 때문에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선언한 이후에도 ‘내가 권력을 갖고 있는 한 상황은 내가 주도할 자신이 있다’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야당은 2월 27일의 선서식이 ‘사실상 군사정권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고 낙관하는 논평을 내보내고 있었다. 박정희의 후퇴는 진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국·야당·군부의 공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전략상 선택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국방장관과 3군 총장 등 군 수뇌부는 대체로 박정희의 민정참여와 군 후배인 김종필의 역할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1군 사령관 민기식 중장은 달랐다. 그는 “군대가 한번 혁명을 했으면 책임을 지고 나라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가 내키지 않은 2·27 민정불참 선서식 이후 사태를 반전시키는 데 있어서 물리력의 뒷받침을 해준 것이 민기식이었다. 당시는 3군 사령부가 설치되기 전이라 육군 전투 병력의 거의 전부를 민기식의 1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그는 일화가 많은 사람이다. 술, 言中有骨(언중유골)의 농담, 그리고 많은 奇行(기행).
1952년 전시 중에 국회 내무분과 위원장이던 徐珉濠(서민호·뒤에 국회부의장 역임) 의원이 술집에서 권총을 발사한 현역 대위와 시비가 붙은 끝에 그 장교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정당방위 시비를 부른 이 사건의 군사재판에서 서민호 의원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의 절차에 대해서 국내외 여론이 비판적으로 돌았다. 군은 할 수 없이 평소 서민호 의원에 대한 재심을 하게 되었고 재판장에 민기식이 임명되었다. 민 준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특무대장 김창룡과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이 사형선고를 하라고 압력을 넣는데도 서민호에게 8년 징역형을 선고한 뒤 피신해버렸다. 국방부는 그를 파면했다. 백선엽 육군 참모총장이 이 대통령을 설득하여 복직시켰다.
민기식 소장이 육군 행정참모부장으로 근무할 때 대통령의 명령으로 장교들 가운데 蓄妾者(축첩자)를 가려내어 추방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군 정보기관에서 올린 축첩자 명단은 수백 명이나 되었다. 閔 장군은 기관의 명단에 기록된 장교들의 아내에게 연락하여 신고토록 하면서 “아내가 남편을 축첩자로 신고하기 곤란하면 장모, 장인, 처남명의로 신고하시오”라고 했다. 가족들이 신고한 축첩자는 두 명밖에 없었다.
반골기질과 해학취미를 같이 가진 민기식은 1957년 3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의 충청도 지방 방문을 수행하면서 ‘한 시대의 아첨’이 老(노)권력자를 눈멀게 하는 현장을 체험했다. 경무대 경찰서 순경들의 머리를 깎아 중으로 위장한 뒤 甲寺(갑사)에 배치하고, 소나무를 다른 데서 잘라 와서 땅에 꽂아놓고 ‘산림녹화’라 속이는가 하면, 세 살 난 어린아이까지 환영인파로 동원하고…. 민기식은 생전에 써두었다가 공개하지 않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이가 죽었을 때 북한주민들이 동상 앞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 놓아 우는 것을 보고 그런 쇼의 기술은 우리가 먼저 썼으며 우리가 한 수 앞섰음을 느끼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애국심이 강한 훌륭한 분이나 국민을 훈련하고 조직력을 갖출 인물은 아니라고 보았다>
5·16 군사혁명 직전 2군단장이던 그는 외출 나오는 미군들보다 양공주 수가 열 배나 많아 ‘한 번에 양담배 한 갑’밖에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화천, 춘천경찰서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루에 한 갑 받고 미군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열흘에 한 번 한 보루(열 갑)씩 받고 하는 것이 몸도 덜 상할 것이오. 통제를 강력하게 하여 거리로 나서는 양공주 수를 줄이세요. 그러면 값도 오를 것이오.”
이렇게 시장논리를 적용한 결과 민기식이 군단을 떠날 때는 ‘한 번에 10달러’로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5·16 쿠데타에 협조한 뒤 ‘이상한 짓거리도 했군…’하고 쓴 웃음을 지으면서 2군 사령관으로 영전했다고 한다. 박정희 의장은 5·16 직후 민기식 사령관에게 장군 숙군 대상자 명단을 보여주면서 “뺄 사람이 있으면 빼세요”라고 했다. 민기식은 국방부 안 모 국장의 이름이 눈에 뜨였다.
“안 장군한테 술을 많이 얻어먹었으니 빼주십시오.”
박정희는 “빼세요”라고 했고, 민 장군은 자기 손으로 직접 안 장군의 이름을 삭제했다.
민기식 중장이 5·16 혁명 직후 2군 사령관이 되어 대구에 부임했더니 청수원이란 음식점에서 ‘박정희 부사령관이 있을 때 갚지 않고 간 외상값 500만 환’을 청구해왔다. 민기식은 ‘접대부도 없고 술은 정종, 막걸리에 안주는 빈대떡밖에 없는 집인데 이렇게 많이 마실 수갉’하고 혀를 찼다고 한다. 두 달쯤 뒤 박정희 의장이 대구를 시찰한 자리에서 민 사령관에게 물었다.
“민 장군은 외상 술값이 얼마나 됩니까.”
“2군단장 할 때 한 60만 환쯤 빚지고 왔습니다.”
“겨우 그 정도입니까. 여기 100만 환을 드릴 테니 앞으로는 현금으로 잡수세요.”
“이건 부정부패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민 장군은 사리사욕을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부대 운영을 위해서 쓴 것이니 애국적입니다.”
“술이 무슨 애국적입니까.”
술을 애국적으로 마시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었던지 박 의장은 함경도 軍脈(군맥)의 대표격인 박임항 1군 사령관을 교체하면서 민기식을 후임자로 발령했다. 1962년 5월의 일이었다.
부임 직후 민기식은 휴전선을 따라서 근무하는 일선 중대장 25명을 사령관 관사 앞뜰에 집합시키고 부사령관, 참모장, 사령부 전 참모들을 배석시켰다. 민 사령관은 35도짜리 소주 다섯 상자를 가리키면서 선언했다.
“이제부터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욕대회’를 하겠다. 앞에 큰 식기에 부은 술을 마시고 녹음기 앞에 가서 마음대로 털어놓으라. 여기에서 한 말은 내가 책임진다. 다만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아는 유일한 지도자 박정희 장군과 우리의 우방 미국을 욕해선 안 된다. 나머지는 나에게 개×× 라고 해도 좋으니 마음대로 욕하라. 욕을 제일 잘 한 자에게는 일등상을 주겠다.”
민기식 1군 사령관은 일선 중대장들을 상대로 벌인 ‘욕대회’에서 그들이 털어놓은 70여 개의 건의사항을 정리하여 녹취기록과 함께 박정희 의장을 찾아갔다. 통신장비와 탄약의 부족, 그리고 복지문제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박 의장은 “나도 야전군 참모장을 할 때 느꼈던 문제점들인데 즉각 해결하겠소”라고 했다.
민기식 중장은 또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 근무 중이던 우리 장교와 하사관을 납치해가자 그 보복으로 특공작전을 벌여 북한군 장교 두 명을 납치해왔다. 멜로이 미 8군 사령관은 “북한 측에서 자꾸만 장교 두 명을 국군이 납치했다고 방송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갚하고 물었다. 민 장군은 “그런 일이 없다”고 버티다가 한참 뒤에 미군 측에 넘겨주었다. 1964년에 미군 헬기가 북한지역에 불시착했을 때 미군은 전향하지 않고 있던 북한군 장교 한 명을 보내주고 미군 조종사를 건네받았다.
1963년 3월 6일 김재춘 정보부장은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조작과 공화당 사전 조직, 워커힐 건설, 새나라자동차, 회전당구대 도입)의 수사 중간발표를 했다. 정보부 전 간부 등 관련자 15명을 구속 수사 중이란 것이었다. 박정희로선 자신이 김종필에게 묵인해 준 사건들인데 여론에 밀려 관련자들이 잡혀 들어가니 기분이 울적했을 것이다.
그 하루 전 박정희는 강원도 지역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춘천 미군 비행장에 내렸다. 민기식 사령관은 자신의 관내에 온 박의장을 영접하려고 원주에서 춘천으로 가려 했더니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이 전화로 “왜 정치적으로 노느냐”고 따졌다. 身病(신병)으로 한 달여 입원했다가 최근에 복귀했던 민기식은 박의장의 민정불참 선언 이후 군내의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민기식이 춘천 비행장에 나가보니 박의장의 행차는 과거에 비해서 초라했다. 수행자는 이후락 공보실장, 장경순 최고위원, 그리고 수행기자들이 전부였다. 출영 나온 인사들도 몇 안 되었다. 박 의장은 “나는 이제 정치에서 손을 뗐으니 나오지 말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박 의장을 수행한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가 민기식 사령관에게 다가오더니 “요사이 일선 분위기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민기식은 대강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미공개 회고록).
“서울에서 정치가 소란스러운데 정치가 안정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일선이 불안해진다. 정부에 나갔던 군인들이 원대 복귀한다고 하나 그들의 복귀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군의 지휘 체계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만섭 기자가 전화로 부른 기사내용은 다소 달랐다. ‘군단장급 이상의 장성들이 모임을 갖고 박 의장이 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로 했다’는 요지였다. 김종오 총장은 이 기사의 진위를 확인하려고 민기식 사령관을 전화로 찾았으나 민 장군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종오 총장은 ‘李(이) 기자를 구속해서 진부를 가리자’고 나왔으나 재치 있는 이후락이 “그 문제는 여기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이날 춘천의 한 호텔에서 묵은 박 의장 일행은 다음날 아침 호텔을 나오다가 키가 큰 이만섭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이만섭 기자 아직 안 잡혀갔군. 잡아가버리지 않고”라고 농담을 했다. 의외로 표정은 밝았다.
박정희 의장은 원주로 가는 차중에서 동승한 민기식 장군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괜히 혁명을 해가지고 정치에 발을 잘못 디뎠어요. 죽일 놈들…”이라고 하다가 “혁명동지들끼리 불화가 생기고 뜻이 맞질 않아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박정희는 또 “민 장군, 머리나 식힐 겸 바람이나 쐴 겸 해서 설악산에나 가십시다”라고 했다. 민기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만두시는 길에 이임사라도 하십시오. 내일 사령부로 중령급 이상 장교들을 다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훈련도 못 하는데 그만두시오. 그리고 민 장군도 그만둘 사람을 따라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1963년 3월 6일 박정희 의장과 동승하여 원주로 가던 민기식 1군 사령관은 한 해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 야전군을 시찰하러 온 박 의장을 모신 차가 원주역 못미처 어느 국민학교 앞을 지나갈 때였다. 국민학교 2학년 정도밖에 안 되는 앳된 소년이 박 의장과 민 장군이 동승한 차 앞으로 달려 나오면서 ”박정희 이 나쁜 놈의 새끼야!”라고 소리 지르면서 돌을 던졌다. 돌은 정통으로 유리창에 맞았으나 깨지지는 않았다. 민 장군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니 통행인은 보이지 않았고 그 소년은 달아나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저 어린 것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가시지요.”
박 의장도 묵인하여 차는 사령부로 직행했다. 민 장군이 추측컨대 그 학생의 가족 중 누군가가 5·16 혁명으로 한 맺힌 피해를 본 것이라 생각했다. 민 장군은 그때 묵묵히 참아준 박 의장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차는 군사령부에 도착했다. 박 의장과 민 장군은 사령관 숙소에서 새벽 2시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도 박 의장은 군 수뇌부의 이름들을 대면서 “그자들을 믿었는데 죽일 놈들이야. 하기야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던 혁명동지들도 그 모양이니 그까짓 놈들이야… 괜히 혁명했어. 괜히”라고 중얼거렸다. 체념한 듯한 박 의장의 모습을 보는 민기식의 마음도 언짢았다.
민기식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새벽 4시면 일어났다. 박 의장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민기식 사령관이 아침 8시에 박 의장 숙소에 들렀더니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간밤의 낙담하는 모습이 떠오른 민기식은 불현듯 ‘혹시 박 의장이 자살한 것이 아닌갗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불러 모은 장교들은 연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 30분쯤 일어난 박 의장은 “얼마나 모였습니까” 하고 민 장군에게 물었다.
“중령 이상은 다 모였습니다. 박 의장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납득할 만한 이임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도 오늘부로 사표를 내겠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신정부가 들어서도 공무원들은 괜찮을 겁니다. 자진해서 사표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날 박정희가 원주 1군 사령부 연병장에 모인 장교들을 앞에 두고 준비된 원고도 없이 즉석연설로 토로한 내용은 그의 정치행로를 바꾸는 한 계기가 되었다. 그가 9일 전 민간인 정치인들과 함께 민정불참을 선서한 이후 그를 혼돈과 방황, 그리고 울분에 빠뜨렸던 것들이 이 연설을 통해 정리되고 그는 새로운 궤도를 타게 된다. 김종필의 외유를 전후하여 흔들렸던 박정희는 다시 권력에의 의지를 세우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먼저 “이런 자리에 오면 내가 살던 집에 다시 돌아오는 그런 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전제한 뒤 정치적 중립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군에 간섭하지 않아야 군이 엄정한 중립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일부 군 장교들 중에 지각 없는 장교들이 정치인들을 따라다니면서 추파를 던지고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 군인답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군의 명예를 손상시킨 일이었습니다.”
“민간정치인들에게 (정치를) 맡기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추태를 부리고 舊惡(구악)을 저지르고 민주 발전에 해독을 끼친 그런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얼굴, 그 인물들이 나와서 모든 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요 얼마 전에 외국인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본인에게 한 바가 있습니다. ‘의장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것을 양보했는데, 만약 그 사람들이 이번에 국민들에게 약속한 선서를 그들이 이행하지 않아 정치적인 위기가 도래한다면 의장은 방관만 하고 모른 체하고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은 여기에 대해서 이런 해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사태가 도래했을 때 이 나라는 몇몇 정신차리지 못한 정치인들을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니며 하물며 그들이 장난을 치기 위한 장난판이 아닙니다.’
나는 그 외국인사에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은 그런 경우에 이것을 못 본 체하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인가, 방관하지 않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인갗 하고 반문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기자들은 원주시내 우체국과 전화국으로 줄달음을 치기 시작했다. 3월 8일자 모든 신문은 ‘국민에 해독 끼치고 질서 혼란케 한 기성 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방임하는 것이 애국이냐, 방관 않는 것이 애국이냐…’란 제목으로 1면 머리에 朴 의장의 경고를 실었다. 누가 읽어도 정치에 혼란이 생기면 혁명정부는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긴 연설이었다.
2·27 선서 이후 현실정치를 떠난 것처럼 보였던 박 의장은 이 연설로써 다시 정치적인 위상을 과시했다. 이 시기의 박정희의 행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의 민정이양 불참선언을 ‘정치적 하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민정불참 선언을 하면서도 민정이양과 함께 군복을 벗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권력에의 집념을 버리지 않고 반격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월 8일자 <조선일보>는 1면 하단 ‘萬物相(만물상)’란에서 박정희가 주장해 온 세대교체론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썼다.
‘인격적으로 원숙해질 무렵에 이른 사람에게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기본권의 침해이다. 오해 없기 위해 만물상자의 연령을 밝히면 이제 겨우 40고개를 넘긴 애숭이다.’
박정희는 이때 나이 마흔여섯, 벌여놓은 일은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팔팔한 장년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1963년 3월 9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두 시간 동안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와 필립 하비브 참사관을 청와대로 초청해 장시간 요담했다. 회담 내용을 묻는 기자들에게 미 대사관 대변인은 “관례상 청와대 측이 먼저 밝힐 문제”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박정희는 이날 이틀 후에 발표할 사건에 대해 미리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3월 11일 오전 10시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은 군부 쿠데타 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김동하 전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박임항 건설부 장관 및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을 비롯한 육군·공군의 현역 또는 예비역 장교, 그리고 3명의 민간인 등 20명을 구속하고 한 명을 수배했다. 이들은 ‘현 정부가 실시한 기성 정치인 전면 해금에 불만을 품고’ 박정희 의장과 최고위원, 기성정치인들을 무력으로 살해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제거하여 유혈로써 정권을 장악하려 기도했다>
기자회견장에서 김재춘 정보부장은 “조사 범위에 따라 구속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3월 13일엔 11명의 추가구속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첫날 구속 수배된 2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박임항(건설부 장관, 육군 중장, 만군 출신, 함남 태생), 김동하(전 최고위원, 예비역 중장, 만군 출신, 함북 태생), 박창암(전 혁검부장, 예비역 준장, 함남 태생), 이규광(국토건설단장 보좌관, 육사 3기, 예비역 준장, 경북 출신), 김명환(육본 작전참모본부, 육군 대령, 황해도 출 신), 이종환(공군 10전투비행단, 공군 중령, 서울 태생), 권창식(공군 10전투비행단 대대장, 공군 중령, 서울 태생), 서상순(공군본부 인사국, 공군 중령, 강원 태생), 김동야(공군 야전사 32정찰대장, 공군 중령, 함북 태생), 이승국(공군본부 인사국장, 공군 중령, 공군행정 2기), 강계삼(국방부 기획조정관, 육군 대령, 육사 8기, 함남 태생), 박준호(육사 생도대장, 육군 대령), 양한섭(동화통신사 기자·경남 태생), 이종태(전 HID 인천대장, 예비역 대령, 육사 4기 미검거), 김영하(회사원, 예비역 대령), 이종민(전최고회의 전문위원), 이진득(3사단 부사단장, 육군 대령, 함남 태생), 박병섭(해병대 서울지구 헌병대장, 해병 4기, 경남 태생), 방원철(전 치안국 정보과장, 예비역 대령, 함북 출신), 김광식(전 최고회의 전문위원)>
이들 21명 중 육군 전투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또 이들 중 박임항, 박창암, 김동하 및 방원철은 함경도 군맥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구속자 20명 중 함경도 출신이 7명이었다. 이 때문에 함경도의 별명인 ‘알래스카’를 따서 이 쿠데타 음모사건 수사는 군 내부의 함경도 인맥 거세작전이란 뜻의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재춘 당시 정보부장은 부임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상태에서 이 사건을 발표했다. 김재춘은 최근 기자에게 “이 사건의 수사 발단은 쿠데타 모의에 참여했던 공군 장교들이 공군참모차장 출신인 정보부 차장 박원석 장군을 밤에 찾아가 제보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박원석(뒤에 공군참모총장, 석유공사 사장 역임)은 ‘음모자들이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나에게 그런 정보가 올라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이 정보에 따라 수사에 착수하면서 김재춘은 박정희 의장에게도 보고했다. 박 의장은 “확인해봐. 그런데 아마 사실일 거야”란 묘한 말을 했다고 한다. 김재춘은 쿠데타 모의의 중심인물인 이규광 전 육군헌병감이 조사를 받고 있는 안가에 가서 직접 진술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규광의 말에 따라 많은 연루자들이 속속 구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술의 진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라 한다.
李圭光 전 헌병감은 최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건은 엄청나게 과장된 것입니다. 내가 민정에 참여하려는 박정희 의장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조직을 구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병력을 동원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쿠데타를 합니까. 공군장교들은 박정희 의장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진급문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박 의장이 2·27선서를 통해서 민정불참을 선언한 이후에는 활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쿠데타 모의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이규광 당시 건설부 장관 보좌관이 박정희 의장이 민정불참 약속을 깨는 빌미를 만들도록 실현성도 없는 이런 쿠데타 모의를 꾸며 박임항 건설부 장관을 물고 들어갔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을 강하게 부정한 이규광은 “나도 그 사건으로 2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李圭光은 ‘박정희의 민정참여 계획에 불만을 품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는데 김재춘의 최초 발표에는 ‘기성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 허용에 불만을 품었다’고 하여 이들 소위 음모자들이 군정연장을 바라는 인물이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가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결정적인 계기로 활용되었다. 신문들은 일제히 쿠데타 음모 수사진행상황을 연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정보부에서 흘린 정보에만 의존한 탓인지 과장된 기사가 많았다.
김현철 내각수반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 의사를 밝혔다가 박 의장의 만류로 취소되었다. 박병권 국방장관은 3월 12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으나 박 의장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박 의장은 상황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오히려 사태 반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1963년 3월 12일 밤 김재춘 정보부장은 기자들에게 “쿠데타 음모계획서가 입수되었다”면서 “이 계획표에 의하면 거사 후의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은 박임항 중장으로 되어 있고, 이달 15일 최종 모임을 한 후 이달 말께나 4월 초에 거사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의외의 고위층이 관련된 듯한 혐의가 드러나 수사 중이라서 사건 전모를 발표하기엔 시일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3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쿠데타 음모사건 연루자 11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구속자들 가운데는 5·16 당일 혁명군의 선두에 서서 한강다리를 건넜던 당시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전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과 박정희 의장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 후배인 최주종 5관구 사령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사가 주체세력 내부로 확대되면서 공포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3월 13일 저녁 박정희 의장은 박병권 국방장관, 김재춘 정보부장,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 그리고 주요 최고위원들을 장충동 의장 공관으로 불렀다. 주제는 소위 박임항-김동하 쿠데타 음모 사건이었다. 김재춘 부장이 수사 진행상황을 보고했다. 며칠 전부터 주체세력 내 친김종필계 육사 8기 강경파 장교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비상계엄령 선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날 홍종철 대령이 그런 주장에 앞장을 섰다. 그런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려면 국방장관이 국무회의에 안건을 제출해야 한다. 박병권 장관은 “사회가 안정되어 가는데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고 강하게 반대했다. 홍종철 대령이 일어나더니 솔직히 털어놓았다.
“여러분, 사실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겠다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다음에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박병권은 깜짝 놀랐다.
“아니, 2·27선서식을 치러 박 의장이 민정참여를 안 하겠다고 선언한 지가 언제인데 군정연장이라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민정불참 선서는 장난이 아닙니다.”
유양수 최고위원 등 온건한 인사들도 박병권 장관에 동조했다. 아무 말 없이 회의를 지켜보던 박정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회의는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박 의장은 자신의 의도대로 회의가 진행되지 않아 초조해 보였다. 김재춘이 보니 박 의장은 담배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담뱃불을 재떨이가 아니라 탁자 위에 비벼 끄고 있었다. 박정희 의장은 회의를 끝내면서 말했다. 냉철한 그답지 않게 흔들리는 말투였다.
“비상계엄령 이야기나 군정연장 이야기는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합시다.”
다음날 박병권 장관은 김재춘 정보부장을 찾아와 내뱉듯 말했다.
“김 부장은 어때요? 내 생각에 동조하나 반대하나. 어제 저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사전에 짠 것이 분명해. 에이 불쾌해!”
이날 김현철 내각수반은 새뮤얼 버거 대사를 불러 으스스한 이야기를 했다.
“쿠데타 음모와 암살모의가 속속 적발되고 있다. 박정희 의장의 대통령 출마와 민정불참 약속의 취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 같다. 반미시위도 예상된다. 한국군의 여러 부대가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 일선 부대가 북한으로 집단 越北(월북)할지도 모른다.”
놀란 버거 대사는 멜로이 미 8군 사령관을 만나러 갔더니 그의 사무실에 친미적인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었다. 버거 대사는 두 사람에게 김현철 수반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두 사람 모두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김 수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김종오 총장은 “일선부대의 월북설 같은 것은 금시초문이다”라고 했다.
버거 대사는 “김현철 수반이 ‘族靑系(족청계) 장군들에 의한 쿠데타 음모가 발견되었고 테러조직을 동원하여 박정희 의장을 암살하려던 정당도 있다’고 말했다”면서 사견을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이런 쿠데타설은 혼란을 조장함으로써 박정희 의장이 민정불참 선언을 취소하도록 하기 위해서 조작된 것 같다. 김종오 총장과 박병권 장관은 박 의장에게 김종필의 외유와 정보부 관련 부정사건을 수사하도록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낸 분들이 아닌가. 이 사실에 대하여 김종필과 그의 지지자들은 절대로 두 분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공화당 내외에 포진하고 있는 김종필 세력은 온전하며 돈도 많아 적극적이다. 장관과 3군 총장들은 머지않아 김종필 세력에 의한 숙청자 명단에 포함될지 누가 아는가. 사태가 매우 악화되고 있다. 전에도 그랬듯이 김 총장은 이 사태에 개입하여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버거 대사는 한국군 수뇌부를 이용하여 박정희의 야심에 제동을 걸고 싶어 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날 몸이 불편하다며 출근하지 않고 공관에서 각료들을 불러 사무를 처리했다. 이후락 공보실장은 공관을 방문하고 돌아와 “이번 쿠데타 사건이 민정이양 계획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계엄령 선포문제도 현재로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고 煙幕(연막)을 쳤다.
박정희는 김용순 내무위원장과 김희덕 외무국방위원장을 따로 공관으로 불러 요담을 가졌다. 최고회의에서는 홍종철 문사위원장, 김형욱 운영기획위원장이 길재호, 옥창호 두 최고위원들과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김종필 계열의 핵심이었다. 이날 밤 홍종철과 김형욱은 공관으로 박 의장을 찾아가 오래 密談(밀담)을 나누었다.
3월 15일 오전 박병권 국방장관은 쿠데타 음모사건에 책임을 지고 김현철 내각수반에게 재차 사표를 제출했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와서 짐 정리를 한 뒤 식사를 하고 있는데 급보가 들어왔다. 최고회의 건물 앞에서 군인들이 ‘장관 물러가라!’, ‘군정연장하라!’, ‘계엄령 선포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병권 장군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다.
1960년 4·19 후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영관장교들이 정군운동을 할 때는 육본 인사참모부장으로서 박정희 소장과 함께 그들을 엄호해주었다. 이 때문에 매그루더 당시 미 8군 사령관이 우리 정부와 군 수뇌부에 대해 “두 박 장군을 전역시켜라”고 강하게 권고하기도 했었다. 정군운동이 벽에 부딪히자 영관 장교들은 혁명을 결심하고 추대할 지도자를 고르고 있었는데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항상 후보에 올랐던 이가 박병권이었다.
박 국방장관은 군인들의 시위 현장으로 갔다. 김진휘 수도방위사령관이 나와서 시위 군인들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 80여 명으로 추산되는 군인들은 최고회의에 파견 나가 있는 장교들과 하사관들이었다. 그들은 주먹을 휘두르면서, 또 구보도 하면서 ‘군정연장’ 요구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시위자들은 首警司(수경사)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이 시위는 박정희 의장의 경호책임자 박종규가 조직한 것이었다고 한다. 박 의장이 박종규 중령에게 그런 시위를 지시한 것인지 박종규가 박 의장의 뜻을 읽고서 감행한 시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박정희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여야 정당과 언론은 일제히 건군 이래 최초의 군인 데모를 준엄하게 비판했다.
박 의장도 15일 이후락 공보실장을 통해서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 성명서를 통해서 ‘이번 쿠데타 음모 사건을 계기로 後患(후환)의 염려가 없도록 禍根(화근)을 철저히 제거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군인데모도 민심을 자극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으로서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는 쿠데타 음모, 군인 데모, 여야의 시끄러운 정당 활동을 싸잡아 혼란으로 규정하는 문법을 썼다. 그런 상황 해석은 반격의 발판이 된다.
15일 저녁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박정희 의장, 김현철 내각수반, 김재춘 정보부장, 김종오 육군 참모총장, 이동원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대사 공관의 만찬에 초대했다. 미국 측에선 멜로이 미 8군 사령관,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 킬렌 유솜(USOM:미국 원조기관) 처장 등이 참석했다. 미국 측으로서는 압력을 많이 넣어 김종필을 외유 보내고 박 의장으로 하여금 민정불참을 선언하도록 하였으니 對韓(대한) 공작은 크게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미 양쪽의 관계가 서먹해져 이런 자리를 통해서 풀어보겠다는 뜻이 깔린 만찬이었다.
만찬사가 교환되고 건배가 있은 다음 박정희가 불쑥 버거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어디 딴 데 좀 갑시다.”
박 의장은 주위의 분위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 무뚝뚝하게 말했다(이동원의 기억). 박 의장은 자리를 툭 차고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 나가더니 버거 대사가 따라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각하 여기선 안 됩니까.”
“다른 데로 갑시다.”
두 사람은 내실로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담소를 계속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의장과 대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현철 내각수반이 안으로 불려갔다. 그 뒤로도 긴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박 의장이 대사에게 군정 4년 연장의 뜻을 밝혔다’는 말들이 만찬장에 퍼졌다. 이동원 실장은 하비브 참사관으로부터 그런 귀띔을 들었다. 이동원 씨는 “비서실장도 모르게 이럴 수갉하는 생각을 하니 허탈감이 밀려왔다”고 회고했다.
미국 대사관 사람들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대사관 요인들은 이 긴급 사태를 본국에 보고하기 위해 만찬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수행한 사람들을 데리고 의장 공관으로 갔다. 이동원 실장만은 화가 나서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박 의장은 이후락 공보실장을 불렀다. 몇몇 최고위원들을 소집하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박정희 의장은 복안을 밝혔다.
“나는 미국 대사에게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야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이후락 실장은 군정연장을 제의하는 문안을 작성토록 하시오. 그리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정당 활동의 금지, 언론·출판·집회의 제한을 규정한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이 마련되어 있으니 최고회의에서 통과시켜주시오. 내일 발표합시다.”
이날 밤 서울 주재 미국대사 버거로부터 긴급전문을 받은 딘 러스크는 16일에 이런 훈령을 보냈다.
<한국군 수뇌부의 태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입장은 아니지만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귀하는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박정희 의장에게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
a. 미국 정부는 군정 4년 연장안에 대해서는 승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반대할지도 모른다.
b. 이 조치는 박 의장이 되풀이해서 다짐했던 민정이양 약속과 배치될 뿐 아니라 특히 1961년 11월 14일 케네디 대통령과 만났을 때 발표한 공동성명 내용과도 어긋난다.
c. 이 조치는 세계 여론의 규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d. 미국 정부는 對韓 원조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 박 의장이 意(번의)할 시간을 주기 위하여 공개적인 논평은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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