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문경공 낙촌 박충원(文景公駱村朴忠元), 박계현(朴啓賢),응원군박안세 (凝原君 朴安世), 박응현(朴應賢)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2. 16. 21:42
문경공 낙촌 박충원 文景公 駱村 朴忠元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6호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17-2
낙촌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재직 당시 단종의 현신과 화답하고 단종의 묘역을 장릉으로 천장하였는데,
그 내용이 신도비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단종이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동쪽으로 갔다가 얼마 후 후명이 있어 졸하니,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였지만 장사조차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였다.
오직 그 고을의 아전이었던 엄흥도가 밤중에 몰래 시신을 등에 지고 깊은 골짜기에 묻어 주었다.
그러다가 엄흥도가 죽자 끝내 단종이 묻힌 곳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이곳에 부임해 온 수령 7명이 계속해서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명종 때에 낙촌 박충원 선생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배척을 당하여 태학에서 이 고을로 오게 되었다.
도착하니 앞선 수령들의 연이어 죽으매 영월군 아전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자「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명에 달려 있다.」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 촛불을 맑힌 채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때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어렴풋히게 사자가 나타나 선생을 수목이 무성히 덮여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곳에는 단정한 옷차림을 한 여섯 명의 선비가 빙 둘러 서 있었다.
한 사람이 말하길「이 사람은 충성과 덕이 두터운 어른이니 용서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박충원 공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나는 박팽년이라고 한다. 우리 임금께서 이곳에 묻혀 계신데 나무꾼이 함부로 들어와서 나무를 할 뿐만 아니라
돌보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대가 잘 가꾸어서 우리 임금의 원한을 풀어주시오.」하는 것이었다.
박충원 선생이 꿈에서 깨자마자 수레를 탈 겨를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가 그 곳을 살펴보니
과연 초목이 어지럽고 잡초가 무성한 것이 꿈속에 본 광경과 같은 무덤이 있었다.
박충원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곧 무성한 잡초를 베어 내고
그 무덤의 봉분을 만들고 주위에 터를 닦고 소나무와 회나무를 심었다.
그리고는 제문을 손수 지었다.
「왕실의 맏아들이며 어리신 임금께서 불운의 명을 만나 외진 이곳으로 쫓겨나셨네.
작은 이 청산에 계신 만고에 원통한 혼이시여 부디 강림하시어 이 음식을 흠향하소서.」
마침내 묘지기를 두고 해마다 제사를 드리니 그 고을의 재앙이 이 때부터 그쳤다고 한다
密陽朴氏糾正公派世阡之幽苑
밀양박씨규정공파세천지유원
문경공 낙촌 박충원 (文景公 駱村 朴忠元)
1507(중종 2)∼1581(선조 14).
본관은 밀양(密陽). 字는 중초(仲初), 號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박조(朴藻)의 아들로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 기찬(奇欑)의 따님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 합격, 1531년 문과 급제
1534년 예문관봉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 헌납,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1537년 병조정랑, 이조정랑을 거쳤으며,
조부 박광영(朴光榮)의 상을 당하자 고인인 아버지 박조(朴藻)를 대신해 상복을 입었다.
1540년 다시 승문원교검을거쳐
1541년(중종36)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발령되었다.
이때 영월군의 태수 3명이 연이어 죽어나가서 민심이 흉흉했는데,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端宗)의 묘에 제사를 지낸 후 묘역을 돌보니, 5년을 재직하면서 탈이 없었다고 한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1550년(명종5) 1월부터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대사성(大司成), 7월 다시 우부승지로 임명
같은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해 3년의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1553년(명종8) 대사성,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를 거쳐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가고,
1558년 한성우윤·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사헌부로서 호남·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 兵曹判書 朴忠元(대제학 병조판서 박충원)’이란 친필 10자를 하사하였다.
1567년(명종22) 1월 4일 예조판서(禮曹判書), 1월 18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쳤으며,
5월 원접사로서 명의 사신을 접대하고 10월 예조판서를 거쳐
1569년(선조2) 윤6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으나,
7월 대사헌 백인걸(白仁傑)이 자신을 탄핵하려 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1570년 예조판서, 1571년 1월 이조판서, 6월 우찬성(右贊成), 12월 우참찬(右參贊),
1572년(선조5) 11월 형조판서, 12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쳤다.
1576년(선조9) 7월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홍문관과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왕이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지만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1577년 9월 선조가 문묘(文廟)를 배알할 때 호가(扈駕)하였는데, 병으로 칩거하여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1581년(선조14) 향년 75세로 졸했으며,
1758년(영조 34)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 『낙촌유고(駱村遺稿)』가 있다.
《박충원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1989년 10월 23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吏曹判書大提學 密原君諡文景密陽朴公諱忠元之墓 貞敬夫人星山李氏祔左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이조판서대제학 밀원군시문경밀양박공휘충원지묘 정경부인성산이씨부좌
낙촌 박충원의 장자 문장공 관원 박계현文莊公 灌園 朴啓賢
문장공 관원 박계현文莊公 灌園 朴啓賢
1524(중종 19)∼1580(선조 13)
본관은 밀양(密陽). 字는 군옥(君沃), 號는 관원(灌園).
박광영(朴光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조(朴藻)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박충원(朴忠元)이며, 어머니는 이인수(李獜壽)의 딸이다. 조성(趙晟) 형제의 문인이다.
1543년(중종38) 진사
1552년(명종7) 식년문과 을과급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 예문관검열, 정자, 역임
1555년 사가독서 부수찬
155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8년 이조정랑, 홍문관부교리, 사헌부장령, 성균관직강, 승문원참교 역밈.
1559년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이 박계현을 포섭하고자 혼인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560년 만포진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馬僉節制使)를 시켜 변방으로 내몰았다.
1563년 사간원대사간을 거쳐 성균관대사성 이어서 예조, 형조, 병조 참의역임
1565년 도승지, 시약청제조(侍藥廳提調)를 거쳐 한성좌윤이 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겨울에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66년 경기도관찰사
1567년 경상도관찰사로 권벌(權橃), 이언적(李彦迪)등의 신원을 계청, 이듬해 호조참판
1573년(선조 6) 예조참판, 1575년 호남관찰사를 지냈다.
1577년 지중추부사와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동인·서인의 당쟁이 심해지자 이를 걱정해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편서로는『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朴公啓賢之墓 貞夫人善山金氏之墓
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동지경연성균관사홍문관제학박공계현지묘 정부인선산김씨지묘
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同知經筵成均館事弘文館提學 諡文莊密陽朴公啓賢之墓 貞夫人善山金氏之墓
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동지경연성균관사홍문관제학 시문장밀양박공계현지묘 정부인선산김씨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