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시편 1:1-2, 벧전 1:23-25)
1. 대강절에는 다섯 개의 촛불을 킵니다. 하나는 예수님 촛불이고요 4개는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의 촛불입니다. 오늘은 희망의 촛불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희망을 말하는 것은 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삶을 포기하기까지 하지요.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망하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희망도 함께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부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있고, 죄인인 세리 마태가 나오고, 손이 오그라진 사람이 나오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이야기, 12년을 피를 흘린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같이 절망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병원을 세우시고 찾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이 사는 동네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2. 우리는 희망을 원합니다. 희망을 잡으려 하고 희망이 있으면 살만합니다. 어떤 희망일까요? 어떤 희망을 원하세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희망은 무엇일까요?
거대한 희망을 원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로, 통일을 원하는 분도 있고, 예수님의 재림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통사람들의 희망은 단순합니다. 먹고 살만하면 됩니다. 몸이 건강하면 됩니다. 그리고 가족이 화평하면 됩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희망은 동시에 복이 되는 것이지요. 복이 있다고 할 때에 먹고 살만하고, 건강하고, 가족이 화평한 경우이지요. 그게 바램이고 희망이지요.
그렇기에 희망이 복 있는 것이고, 복 있는 것이 희망이지요. 복이 없는 희망은 희망일 수 없고, 희망이 없는 복은 복이라 할 수 없지요.
3. 우리의 희망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장 1절의 첫마디도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복 있는 사람을 희망하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 중에 “박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질하게도 복이 없다는 말이지요. 인생을 한탄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 반대말로 “대박”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누구나 큰 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이 지혜로운 것은 복 있는 사람이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앞서 기록한 말씀이 바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하고, 죄인들과 섞이지 말아야 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여기서 복 있는 삶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복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먼저 복되지 않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고서는 결코 복 있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정말 새겨 들을 말씀입니다. 건강하기를 바라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너무 기름진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너무 단 음식을 많이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좋아지기를 바라면 먼저 나쁜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희망적이기 위해서는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고서는 희망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할 때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희망을 앗아가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것들 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가 희망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저항한다는 것은 면역력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면역력이 강해야 하지 않습니까? 면역력이 강하다는 것은 몸의 병균에 저항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몸에는 누구나 암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면역력이 강하면 그 암세포의 활동에 저항하므로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지요.
5. 희망적인 삶을 위해서는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선 정말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이 있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있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있고,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겉치레가 있고, 결코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주변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기가 나쁜 곳에 살면서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산당 치하에 있으면서 자유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경기가 어려우면서 우리의 생활이 좋아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희망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희망적이기 위해서는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짜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망이기 위해서는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모르고는 희망적인 것을 붙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희망을 주십니다. 그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는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6. 그러면 희망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의 중심 인물인 베드로, 바울, 요한을 통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세상에 나가서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라고 묻자, “인생은 풀이요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은 그 앞에서 한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앞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거듭난 것”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한번 태어나고, 또 두 번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한번 태어나는 것은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두번째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번 태어나는 인생은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때가 되어서 풀은 마르게 마련이고 꽃은 떨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살다가 끝나는 인생으로 희망적이지 못한 인생을 말합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는 인생으로는 희망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 희망 없는 인생만을 쫓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망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에 저항하여 “이것은 아니다.”라고 할 때에 새로운 눈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의 길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고자 하여도,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인생에 사로잡히고는 희망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7. 베드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배운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남보다 더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열정대로 되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주변에서 힘 없이 죽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동료인 야고보가 순교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죽는 것인데, 그 중에 죽지도 않고 움직이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과 말씀은 자기와 제자들의 가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것이 이것입니다. 인생은 가고 없지만 말씀은 계속하여 살아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번의 인생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사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이지요. 말씀으로 살았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이 아니고는 달리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희망이었던 것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 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산 것입니다.
8. 다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니라.” 그리고 바울에게 “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율법학자입니다. 율법을 전공하였고, 법으로 먹고 사는 자입니다. 그는 법으로 율법을 어긴 예수의 무리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바울의 눈에는 모두가 범법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핍박하는 바울을 심판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빛으로만 나타날 것이 아니라, 천둥번개까지 동원하여 바울을 쳐서 불구자로 만들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에게 은혜로 찾아오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거듭나게 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고 먼저 다가오시고, 오래 참아 주셨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처럼 잘못한 사람을 법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 것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는 하나님에게서 빗나가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이 희망이었던 것은 율법이 제일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이 제일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타인을 볼 때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하여 희망이 사랑에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희망적이지 못한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9.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제일 먼저 순교한 야고보와 형제입니다. 두 형제의 별명이 있습니다. <보아너게>로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성격이 과격하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사마리아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요한과 야고보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독차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예수님 곁에만 앉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기대어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 사랑 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독차지하려 했습니다. 사랑이기보다는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요한을 한번도 싫다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러한 요한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3:1절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요한1서 4장 7-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참사랑을 붙잡은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까지도 감싸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길을 가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서야 자신의 이기심이 욕심인 것을 알았고, 희망이 없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희망이 사랑에 있음을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은 욕심이고 남을 위한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위하여 마음을 쓰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이 곧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10. 베드로 사도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나그네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사는 동안에 한번이라도 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살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바울의 새로운 인생을 잘 말해주는 사건이 레미제라불입니다. 사제관에서 은쟁반을 훔쳤습니다. 이것을 법으로 다스릴 것인가, 은혜로 기회를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훔친 것이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기적인 모습은 누구나 경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배려하면 그를 좋아합니다. 어느 소년이 배가 너무 고파서 빵을 훔쳤습니다. 주인에게 잡혀 뺨을 몇 대 맞았습니다. 주인을 더 때릴 기세였습니다. 그 때 지나가는 어떤 아저씨가 빵 값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한 노인네가 가족도 없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앞에 젊은 의사가 인사를 하였습니다. 노인에는 빵 값을 내 주었던 아저씨였고, 젊은 의사는 뺨을 맞던 소년이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인생이 희망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마음으로 만나는 절기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