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계몽주의를 올바른 것으로 여기고 그에 따르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의 왕들만은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행동했다 태양왕 루이14세의 후계자 루이 15세, 루이16세는 무능력한 사람들로 여전히 호화롭고 사치스런 향연과 오페라, 새로운 궁전, 공원에 돈을 들였다 ( 사기꾼들이 재무장관이 되어 협박과 사기로 막대한 돈을 긁어 모았다. 영주인 귀족이 왕궁을 나와 자기 영지에 돌아오기라도 하면 농부들은 최악의 재앙을 각오해야 했다. 영주는 영지의 재판관도 겸했기에 농부를 제 마음대로 처벌할수 있었다)
* 그시절의 풍습 : 남자들은 무거운 가발을 벗어던지고 하얀분을 뿌린 가벼운 가발을 썼으며 꽁지머리를 달랑거리며 다녔고 멋지게 인사하고 춤을 추는 것에 익숙했다. 여자들은 꼭 조이는 코르셋형 상의에 둥글고 풍성한 치마를 입었다 (화려하고 우아하며 지극히 세련된 궁정생활 한가운데 마리아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왔다 프랑스 황태자비가 되었을때 그녀는 겨우 14세 소녀였다)
* 마리앙투아네트는 매혹적인 가면무도회나 오페라에 아주 열심이었고 무대에 직접 서기도 했다. 프랑스 왕궁에서의 생활은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마리앙투아네트의 어머니와 큰오빠인 요제프2세는 사치와 경박함으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라며 끊임없이 타일렀다.)
1777년
* 요제프 2세가 동생에게 쓴 장문의 진지한 편지중에 (그런 식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예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혁명이 일어나고 말것이다)라는 글이 있다
1789년
* 화려한 궁정생활은 12년이나 더 계속 되었고 실제 일어난 혁명은 더 무서운 것이었다 (왕실은 국고를 탕진하고 1789년 루이 16세가 삼부회, 즉 귀족, 성직자, 시민계급의 대표자를 불러 의회를 소집하여 왕실의 재정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게했다. 삼부회의 결론이 왕의 마음에 안 들자 삼부회를 해산시키라고 명했다. 그러자 미라보라는 열정적인 사람이 나서서 우리는 국민의 힘으로 여기 모여 있는 것이며 아무도 이힘을 우리에게서 앗아가지 못한다고 전하라고 대응했다)
* 왕이 군대를 시켜 삼부회를 해산시키자 파리 시민들이 분노에 치를 떨었다 (시민들이 절대 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가 감옥를 부수고 경비병들을 살해했다. 그동안 삼부회에서는 계몽주의 원칙을 완전하게 관철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자리에서 귀족대표들은 모범을 보여 자발적으로 모든 특권을 포기했으며 모두 열광했다. 이 결의에 따르면 프랑스 인은 누구나 관직에 오를수 있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무와 권리, 즉 인권을 가졌으며 국가의 진정한 지배자는 국민이며 왕은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문에서 이결의를 읽은 시민들은 국민의 통치라는게 저잣거리 사람들이 직접 통치를 맡아야 한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다 )
* 그럼에도 정신을 못차린 루이 16세는 자국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 왕실과 협상을 벌였다. ( 이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갔다. 경비병을 때려 죽이고 국왕내외와 아이들, 시종들을 잡아서 파리로 끌고갔다. 왕과 그 가족은 이제 국민의 감시 아래서 생활하게 되었다. 루이 16세는 가족들을 이끌고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다. 도망 와중에도 가면무도회에라도 가는 듯 온갖 격식과 범절을 다 갖추려 했기 때문에 곧 발각되어 다시 끌려와 더욱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 신분제도가 폐지되어 삼부회 대신 결성된 국민의회는 많은 개혁안을 결의했다 (카톨릭교회는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고 외국으로 도망간 귀족들의 재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여러 법률을 제정할 대표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는 결의도 채택되었다)
1791년
* 프랑스 각지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파리로 물려들어 혁명을 추진했다. (프랑스의 국력이 약해지는 것은 주변 나라에서 환영할만한 일이었으나 오랫동안 방관하지만은 않았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소규모의 부대를 프랑스에 보냈다. 이러한 조치에 프랑스 시민은 더욱 분노하여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저항했다. 특히 귀족과 왕의 추종자들이 외국세력과 결탁한 반역자라는 의심을 받아 어느날밤 수천명의 귀족들을 집에서 끌어내 감금하고 살해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 말살하려했다)
* 혁명의 신봉자들은 가발을 쓰지 않고 뾰족한 빨간모자를 쓰고 긴바지를 입었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며 [귀족에게 죽음을,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다녔다. 특히 과격한 자코뱅파는 귀족뿐 아니라 견해가 다른 사람은 모두 제거하려 했다. 단두대가 발명되었고 매일 여러 광장에서 사형선고와 처형이 이루어졌다
* 지도자인 당통은 열정적 연설로 이름을 떨쳤고 대범하고 무자비한 성격으로 왕당파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말라고 선동했으며 또 다른 지도자 로베스페에르는 당통과 정반대의 인물로 고지식하고 검소하며 냉정한 성격의 변호사였다. 지루할만큼 긴 연설로 유명했고 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럼에도 인간 본연의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적 수백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 루이 16세 역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참수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도 얼마후 참수되었다. (외국의 왕실은 두 사람이 처형되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많은 군대를 파리로 보냈으나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프랑스 인들은 모든 남자들이 군대에 소집되어 독일군을 소탕하였다. 그동안 파리와 지방도시들에서는 공포정치의 광기가 점점 더 극에 달하고 있었다. 로베스페에르와 일부 지도자들은 크리스트교를 낡은 미신이라 선포하고 신의 자리에 법을 올려놓았다. 신 대신 이성을 경배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 당통은 매일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는 일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는 자비와 연민을 베풀자고 주장했으나 범죄자에 연민을 베풀자고 하는자도 범죄자라고 하는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목이 잘렸고 로베스피에르의 승리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후 로베스피에르의 목도 달아났다)
* 프랑스의 적들은 모두 격퇴되었다, 귀족들은 모두 죽거나 추방되지 않았으면 자발적으로 평민이 되었다. (법앞의 평등이 실현되었고 교회와 귀족의 재산은 농노의 굴레에서 해방된 농부들에 분배되었다. 프랑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가질수 있었고 능력만 있으면 어떤 직책이든 오를수 있었다)
1795년
1795년 혁명재판소는 폐지되고 5명의 대표가 이끄는 총재정부가 새로운 원칙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혁명의 이념은 프랑스 너머까지 전파되어 인접국가들에도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벨기에와 스위스도 인권과 평등이란 기본 원칙에 따라 공화국을 세웠으며 프랑스는 군대를 보내 이 나라들을 지원했다. 그런데 이 지원군 중에 훗날 혁명 전체보다 더 거센힘을 갖게 되었던 한 군인이 복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