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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순교자 형과 옥살이 모아보기. 3편
9. 순교자들에게 가해진 남형들
1) 춤추는 곤장. 난무하는 남형(濫刑)[법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형벌을 가함]
가) 장폐(杖斃): 장형을 당하여 죽음
관가에서는 매를쳐서 죽이는 장살형으로 처형했다 하지만 교우들에게는 교수형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의 관행상 일단 장폐하려고 죽을때까지 장형을 가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즉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경우에는 곧바로 올가미로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형을 실시했기 때문에 사람마다 달랐다고 할 수있다.
자료: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 중에서]
우포도청의 형리들은 우술임 수산나와 그의 동료들에게, 명백한 불법이지만 당시 관가(포도청)의 오랜 관행이기도 했던 장폐를 시도했다. 즉 죽을 때까지 무자비한 매질을 가하는 방법이었는데 물고로 위장된 장살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이임 데레사 정철염 가타리나 등과 함께 우 수산나는 장형으로 죽지않자, 결국 올가미를 걸어 교수형을 집행함으로써 1846년 20일 우포도청에서 순교했다.
박해자들은 손쉬운 교수형으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곤 하였다. 한 명의 포졸이 순교자의 목을 맨 올가미 줄 끝을 구멍으로 내보내고 방문(옥)을 나오면, 다른 포졸들이 달려들어 닻을 끌어올리듯 줄 끝을 팽 팽하게 잡아당겨 묵직한 나무토막(옥사기둥)에 묶어 숨을 끊어버렸다.
1879년의 기묘박해 때는 한 톨의 낱알도 아까운 듯 순교자들을 굶겨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뒤 중국으로 추방된 드게트 신부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순교자들은 굶주림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나는 기겁하여 물러섰습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고, 비참과 기아, 그리고 무서운 문둥병 같은 것으로 완전히 변해버린 산 송장들이지요, 진짜 해골들이었습니다”
2) 고참 죄수가 신참 죄수에 사형(私刑. 개인이)을 가하기도
▲신참죄수의 손가락, 발가락을 끈에 묶어 매단 채 촛불을 들이대고 있다.
감옥 내 가혹 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정조 7년(1783) 10월에 황해도 해주감옥에서 발생한 박해득 치사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사망한 박해득은 해주감옥의 신참 죄수였다.
옥졸 최악재란 자는 박해득에게서 그동안 늘 해오듯 으레 돈 50냥을 뜯으려 하다, 말을 듣지 않자 고참 죄수 이종봉을 시켜 박해득을 손봐주도록 지시했다. 이에 이종봉은 박해득을 잡아 담 아래에 세우고 쓰고 있는 칼의 끝을 두 발의 발등 위에 올려놓고 새끼줄로 칼판과 다리를 함께 묶었다. 그러자 박해득은 곱사등 모양을 한 채로 옴짝 달싹 못하다 결국 썩은 나무가 넘어지듯 담벼락에 부딪히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져 열흘 만에 죽고 말았다.
‘옥(獄)은 이승의 지옥’. 앞서 언급한 『목민심서』에 나오는 다산 정약용의 이 말은 뜻하지 않게 죽은 신참죄수 박해득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3) 외교인 가정에서의 폭력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1817〜1846)
일명 ‘덕이’,수원 출신,서울 돌우물골 거주 / 비녀 / 우포도청 장살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에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이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블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그녀가 20세였던 해 동짓날 외교인 인 집주인이 그녀에게 동지 제사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는데 그녀가 이를 거부하자 주인은 화가 나서 그녀의 두 팔을 등 뒤로 묶고 등과 팔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워 거기에 맷돌을 달아 놓고 그 상태로 예 식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제사가 끝나자 주인은 그녀를 짐 싣는 안장 위에 앉히고 제사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때리라고 명했다.
피가 흐르고 온몸의 살이 찢어지고 몸 곳곳의 뼈가 드러났지만 가타리나는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인이 직접 때리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굴복하지 않다가 의식을 잃자 매질을 그쳤다.
그녀의 부모가 딸을 데려갔고 그녀는 오래 지나서야 겨우 회복했다. 몸이 회복되자 그녀는 다시 주인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었고, 봄 제삿날이 돌아오자 주인은 여전히 그녀에게 동참하기를 강요하려고 했다. 그녀가 또다시 거부하자 격분한 주인은 자기 손에 닿는 모든 물건을 가지고 셀 수도 없이 그녀를 때리더니 그녀가 기절하고서야 매질을 그쳤다.
10. 유대철(베드로)성인의 순교행적.
신앙을 증거 하려면 시뻘건 숯덩 이를 삼켜라!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소년 유대철(베드로)성인은 유진길 성인의 맏아들. 집안의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끗끗한 용기를 보면서 순교원의가 불타오른 소년 유대철은 스스로 포도청을 찾았다.
이어지는 혹독한 형벌. 너덜거리는 살점들.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 그러나 박해자들은 결코 은총의 힘을 얻은 어린 소년을 다스릴 수 없었다. 포졸이 구리 대통으로 허벅지 살점을 떼어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단호하였다.
“어떠한 형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아세요.”
작은 천사의 용기는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목 졸라주임)하고 말았으니, 때는 1839년 10월 31 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11. 최경환 성인의 순교행적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監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팔 다리 를 부러트리는 주리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둔나무 중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최경환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태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석이다.” 그렇게 성인은 옥중에서 장독(공장으로 생긴 상처)으로 순교하였다.
12. 복자 박취득(라우렌시오) 순교행적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옥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1797년 8월 19일 박취득은 홍주(洪州) 목사 김이호(金履鎬)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매를 흠씬 맞았다. 형리는 집게로 맨살을 집어 뜯기까지 했다.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협박에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삶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감입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목사 앞에서도 그는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혹독한 매질을 더한 뒤 그를 서학 죄인들을 전문적으로 취조하던 해미의 좌영(左營)으로 넘겼다. 당시 해미 현감은 조한진(曺翰振)이었다.
심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고문의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현감은 감사에게 처분을 요청했고, 매질해도 항복하지 않으면 죽여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현감은 박취득에게 그 공문을 읽어주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후 여러 달 동안 박취득은 8일 또는 10일에 한 번씩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상처투성이의 그를 옷을 벗긴 채 진흙 속에 던져 밤새 추위 속에 비를 맞게까지 했다.
박취득은 온몸이 너덜너덜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갑니다. 세월은 부싯돌에 이는 불똥과 같아 길지 못합니다. 저는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1799년 2월 27일, 그는 15번 또는 16번째의 심문에서 곤장 50대를 맞았다. 현감은 아예 그를 죽일 작정으로 때리면서 물까지 부어 물볼기를 쳤다.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다. 현감과 형리들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그를 귀신 보듯 했다. 완전히 까무러친 그는 감옥에 다시 내던져졌다.
몇 시간 뒤 그는 혼자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감방에 들어가 누웠다. 이튿날 그가 아직죽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현감은 옥사 장을 때리며 너까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옥사장은 감옥으로 다시 와서 박취득을 죽도록 더 때렸다. 때리다 지친 옥사장이 잠깐 잠이 들었을 때,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이 다가가자 박취득은 깨어나 그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처는 이미 다 나아 흔적도 없었다.
옥사장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요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끼로 목을 졸라서 마침내 박취득의 긴 목숨을 거두었다.
달레의 기록에 따르면 1799년 2월 29일 오전 11시에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감옥에 갇힌 뒤에 맞은 곤장은 모두 1400대가 넘었다. 8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주고 굶긴 적도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잔혹한 매질이요 고문이었다.
13. 복자 최해성 요한의 순교행적
최경환 성인과 7촌 사이로,최해성은 충청도 홍주현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일대) 출신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그는 교회 서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체포돼
무려 21차례에 이르는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재판관(원주관장)이 호출하여 “네가 정말 죽기를 바라느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요한은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재판관이 크게 분노하여 곤장과 편태로 가공할 만한 형벌을 명하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종교를 위해 죽겠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네가 죽을 때까지 치도록 하마.” 요한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으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 하였습니다.
그는 스물한 차례나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고문을 당하였는지 살과 가죽이 터져 창자가 몸 밖으로 쏟아졌으며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문초 중에 당한 형 벌 외에도 포졸들과 악당들에게 온갖 악행을 다 당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 12번째 편지 중에서]
14. 성인 남경문 베드로 순교행적
그가 병오년 7월 그믐께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치명하신 줄을 아오나 다른 사정은 모르고, 죄인 삼촌이 가끔 포청에 다니며 옥졸 [유직에에 게 돈도 주며 술도 먹인 까닭에 남경문 베드로가 죽은 사정과 때를 알고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낸 일을 삼촌에게 친히 들었습니다 …
죄인의 삼촌이 남경문 베드로가 치명한 줄을 알고 포 청에 가매, 옥졸들이 그 시신을 섬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찾아 다가 보니, 모가지에 올가미 자국이 완연히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수형으로 죽은 것이 분명 합니다. 또한 그 칠규[사람의 얼굴에 있는 일곱개의구멍]를 불로 지진 것은 교수형을 집행한 뒤라도 혹 숨기가 있는지 시험하여 본 것 같습니다.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 중에서]
15. 성인 이호영 베드로순교 행적
재판관은 그의 다리뼈가 튀어나올 때까지 주뢰를 틀었으며 배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호영은 말했다. "저는 절대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재판관은 형리를 시켜 그의 허리와 다리에 매질을 가하며 그에게 말했다. "만일 네가 소리지른다면, 나는 그것을 네가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이호영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가 재옥 4년 만에 병들어 무술년(1838)에 옥중 치명한 줄만 아옵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오나 이호영 베드로의 아내가 시체 찾으러 갈 적에 옥졸이 말하되 “서러워 마오. 영감이 필경 하늘로 갔겠으니, 그는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다른 것은 모르나 죽을 때 눈에 붉고 이상한 빛이 보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 중에서]
16. 성, 김대건 신부 새남터 형장 순교사
군사들은 김 신부의 속바지까지 벗기고 양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회가루를 뿌렸다. 그런 다음 군사 2명이 김 신부의 겨드랑에 몽둥이를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원 둘레로 3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군사들은 김 신부에게 갖은 희롱과 모욕을 주었다.
희롱이 끝나자 김 신부를 매고 돌았던 군사 2명은 그의 무릎을 꿇리고 두 귀에 화살을 뚫어 꽂았다. 그런 다음 김 신부의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모래사장에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김 신부는 이런 와중에도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하면 되었소? 마음대로 칠 수 있겠소?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소"라고 말했다.
군사 12명이 칼을 들고 서로 싸움을 하듯 김 신부 주위를 빙빙 돌며 검술시범을 보이더니 차례로 김 신부의 목을 쳤다. 김 신부의 머리는 8번째 칼을 맞고서야 떨어졌다.
군사 한 명이 김 신부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관장에게 보여주니, 관장은 형 집행을 조정에 보고하려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는 만 25살에 순교했다.
헌종은 장대에 매달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저잣거리에 매다는 효수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 모셔진 김대건 신부 두개골. 최용택 기자
17. 서소문 밖 형장 순교사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이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2014년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된 124위 순교 복자 중에서도 27위가 바로 이곳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바로 이곳에서 "월락재천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고 하여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