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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만록(甲辰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찬
○ 임인년 한여름에 내가 황강(黃崗)으로 근친(覲親)을 갔을 때, 성영(成泳) 영공(令公)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서로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그가 말하기를,
“조정(명 나라)에 있을 적에 새로 간행한 《조선시선(朝鮮詩選)》을 보았는데, 바로 오명제(吳明濟)가 편찬한 것이었소. 그 안에는 영공이 오명제와 작별하며 지은 율시 한 수가 있었소.”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무술년 서울에 있을 때 어느 장군의 막하(幕下)인지는 모르나, 오명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문장에 능한 사람이었다. 나의 임시로 사는 곳과 가까워서 때로 찾아오기를 서너 차례 하였으나, 앞에 말한 이별하는 시에 대해서는 내가 지을 수도 없었거니와 실로 그런 일도 없었다. 그 책이 서장관 조성립(趙誠立)의 처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구해 보려 하니, 짐보따리 속에 깊이 들어 있어 서울에 가면 보여 주겠다고 하였다. 내가 서울에 돌아와 가져다 보니, 〈회감(懷感)〉이라는 제목 아래에 ‘어ㆍ오 참군께 드림[呈于魚吳參軍]’이라 하였다. 시에,
삼베옷 온통 길 먼지에 날리고 / 麻衣偏拂路岐塵
수염은 텁수룩하고 얼굴은 늙어 아침 거울마다 다른 모습일세 / 鬢改顔衰曉鏡新
상국의 좋은 꽃은 근심 속에 아리땁고 / 上國好花愁裏艶
고향의 꽃다운 나무 꿈속의 봄이어라 / 故園芳樹夢中春
편주는 안개 달 속의 바다에 뜨기를 꿈꾸고 / 扁舟煙思浮海
필마는 관하에서 나루터 묻기에 지쳤다네 / 匹馬關河倦問津
칠 년 전쟁에 이별을 서러워하는데 / 七載干戈嘆離別
푸른 버들의 꾀꼬리 소리가 나의 애를 태우는구나 / 綠楊鶯語太傷神
라고 하였다. 내 마음에 적이 이상히 여겨 친지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것인데, 7년 간의 전쟁이란 말이 마침 오늘날의 사실과 비슷하므로, 오명제가 이것을 따 가지고 아무개가 그와 작별하는 시라 하여, 중국에 가서 과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오명제의 허황됨이 이와 같으니, 그와 잠시나마 만나서 그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한탄스럽다.
이른바 《조선시선》이라는 것은 시만 뽑아 놓았을 뿐 아니라, 그 권수(卷首)의 목록에는 우리 동국의 역대 역성(易姓)의 시말을 기록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 이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재상ㆍ조사(朝士)ㆍ규수(閨秀)ㆍ승가(僧家) 등 백여 명의 성명을 나열하고 그들의 출처(出處 나가 벼슬하거나 집에 들어앉음) 등을 소상히 밝혔으니, 이는 길에 떠도는 말을 들어서 쓴 것이 아니고 필시 사실을 아는 문인(文人)이 지도한 것일 테지만, 정확하게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 이름 아래에는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고, 지금은 연로하여 한강(漢江)에 물러가 있다 하였고, 끝에 “임인년(1602, 선조 35) 봄 정월 초하루에 속보(續補)하였다.”하였다. 그가 말한 한강이라 한 것은 필시 내가 그때 서강(西江)에 살고 있던 것을 가리킨 것인데, 신축년 10월 27일의 일이니, 이날부터 임인년 정월 초하루까지는 겨우 63~64일밖에 안 된다. 오명제가 중국에 있으면서 나의 거취를 어쩌면 그리도 이처럼 빨리 듣고 있단 말인가. 기해년(1599, 선조 32) 철병 이후로는 중국인이 나오지 않았고, 비록 북경에 간 역관(譯官)이 있기는 하였으나 나의 거취와 같은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 어찌 서둘러 저쪽에 전한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니, 정말 괴이한 일이다.
○ 옛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 사실이 전기(傳記)에 나온 것이 역력히 말해 주고 있고, 우리 나라의 풍속 또한 그러하였다. 그런데 임진란 이후로 중국의 대소 장관과 정동(征東 일본 정벌)의 사졸들이 전후에 몇천 만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데, 모든 음식을 먹을 때 마르고 국물이 있는 것을 가릴 것 없이 전부 젓가락만을 사용하고 숟가락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대명 고황제(大明高皇帝)의 유훈(遺訓)에 진우량(陳友諒)을 평정하기 전에는 음식을 먹을 적에 감히 숟가락을 쓰지 말라 하여 그 꼭 취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 그대로 습속이 되었다.’고 하나, 그런지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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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형(尹國馨)
1543년(중종 38)~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수부(粹夫)이고, 호는 달천(達川)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윤관(尹瓘)의 16대손으로, 부친은 중종(中宗) 때에 현령을 지낸 윤희겸(尹希謙)이다.
선조(宣祖) 조에 문관으로 정언(正言)‧사간(司諫)‧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충청감사로 나갔다.
충첨감사 시절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과 함께 참여한 용인전투에서 패하면서 관직이 삭탈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다시 등용된 후 1598년(선조 31)에 해방도(海防道)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이호민(李好閔)‧유성룡(柳成龍) 등과 교유하다가 임진왜란 직후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함께 탄핵되었다. 1605년(선조 38)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복귀하여 좌윤(左尹)과 동지사(同知事)를 지내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형조참판(刑曹參判)‧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