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에게>
덕질할 결심
2022. 10. 03
보라
모든 걸 이룬 기분은 어떠한 기분인가요? 당신은 본인이 모든 걸 이뤘다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모든 걸 이룬 것처럼 보여요. 전 평소에 편지를 자주 쓰지 않습니다. 꼭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쓰는 편지가 아닌 그저 제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써왔던 편지는 굳이 전달하지 않았지만 마음먹으면 전달할 수 있는 대상에게 써왔어요. 그러나 이번 편지는 정말로 당신에게 닿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을 알고 있지만 당신은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이지요.
저는 당신과 사귄 적도 없고 만나본 적도 없지만 지금 당신을 떠올리면 전 애인을 생각하는 기분이 듭니다. 아련하기도 하고 때때로 괜히 밉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요. 아마도 제가 한때 열렬히 응원하고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사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걸 요즘 말로, '덕질'이라고 하지요. 저는 누군가를 꾸준히 덕질해 왔습니다. 다만 제 성격상 저의 에너지와 돈을 다 쏟아부을 정도로 덕질을 해본 기억은 없습니다. 덕분에 덕질을 그만둘 때도 큰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고 털어버리는 편이었죠. 당신을 좋아하게 된 나이는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아이돌을 덕질하는 팬들은 대부분 어린 학생들 아니냐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말속 깊은 뜻은 어린 팬들과 아이돌을 무시하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전 지금 나이가 어린 것도 맞기 때문에 저 말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는 걸 압니다. 제가 20대가 되고 30대가 된다면 이 덕질을 멈출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전 누군가를 좋아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덕질 나이를 이야기하기 전, 제가 당신에게 반했던 순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입덕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당신을 먼저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와 당신이 나온 예능을 보다가 한 눈에 반한 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잠옷을 입고 가래떡을 꿀에 찍어 먹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반했지요. 나중에 찾아보니 당신은 그 그룹의 막내였습니다. 당신과 당신 그룹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저는 얼굴을 보고 반했습니다. 사실 제가 덕질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얼굴이 제 스타일이라 좋아하게 된답니다. 웃긴 사실은, 덕질이 아닌 제 주변 사람을 정말로 짝사랑하게 되는 계기도 덕질과 비슷한 계기로 짝사랑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덕질과 짝사랑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드네요. 짝사랑도 저 같은 경우엔 상대방이 날 좋아하지 않지만 끝었지 잘해주고 관심가지고 때때로 챙겨주곤 하잖아요. 덕질도 감정적 교감을 서로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팬'이라는 존재들과 교감을 하는 거지 개개인과 나눌 수 없는 점에서 비슷한듯 합니다.
물론 얼굴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지만 뒤늦게 당신의 노래에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들은 저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왔고, 한창 질풍노도 시기를 겪었던 중학교 시기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엄마와 얼굴만 마주 보면 싸우던 시기였습니다. 엄마와 싸우고 들어와, 당신의 노래를 들으며 훌쩍훌쩍 울었지요. '엄마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알아줘 흑흑'이러면서 매일매일 당신의 그룹 영상을 보고 노래를 들었습니다. 덕질을 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주 하는 말, "쟤네들이 너 밥 먹여주니?"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었습니다. 용돈이 일주일에 만 원이었던 시절이었지만 돈을 차곡차곡 모아 당신들의 앨범을 샀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 덕질을 그만두고 그 앨범들은 다 팔아버렸습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더군요. 그 뒤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앨범을 사지 않습니다.
덕질을 하다 보면 다양한 팬들을 보게 됩니다. 당신도 공연장이나 다양한 곳에서 팬들을 보긴 하겠지만 아마 팬들에 대해서는 안다고 할 수 없을 거예요. 물론 저도 다 알 수 없지만 ‘팬덤’이라는 울타리에 속해있는 저로서 조금 더 다양한 사연들을 알고 있습니다. 사연이라고 말하니 웃기지만 덕질은 밖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와서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의 연예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팬들끼리도 의견이 갈라집니다. 싸우기도 하고, 심각한 상황이면 '탈덕'을 하는 팬들도 생겨나지요. 그거 아시나요, 요즘은 '까빠'와 '순덕'으로 팬이 나눠지기도 합니다. '까빠'는 덕질 대상을 사랑하긴 하지만 동시에 욕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애증 관계랄까요. '순덕'의 본 뜻은 한 연예인만 좋아한다는 말이지만, 이제는 어떤 것이든 다 감싸주는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딱 나눠지지는 못하겠지만 전 아마 '순덕'에 가까운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기론 당신의 팬들도 대부분 '순덕'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이렇게 팬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부류가 있고 다사다난 합니다.
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덕질하는 대상과 일상을 함께 하고 있고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아까 제가 당신의 앨범을 팔아버렸다고 했잖아요. 저는 팔아서 처리할 수 있는 정도지만 어떤 팬들은 정말 다 팔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산다거나, 다양한 굿즈들로 컬렉션을 해놓는 팬들도 있습니다. 해외 투어를 가면 모두 쫓아가는 경우도 있고, 앨범을 왕창 사서 팬싸를 가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과소비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사실 그 정도에 금액은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금액이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당신도 알까요? 많은 팬들은 아마 당신보다 적은 벌이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감정, 시간, 돈을 모두 당신에게 쏟고 있는 것이지요. 덕질과 이루어진 관계들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 생각해요. 사랑이라고 하기엔 연인이나 가족같은 사이하고는 다르니까요.
제가 살면서 당신처럼 사랑받는 날이 올까요.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콘서트를 다녀왔습니다. 몇 년 전 당신의 콘서트도 가고 싶었지만 결국 가보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긴 합니다. 콘서트에 가서 바라본 ‘아이돌’은 빛이 났습니다. 전 스탠딩에 서서 봤었답니다. 스탠딩은 덥고 습하고 팬들끼리 밀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저 포함 공연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들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고 무대 위에 서있는 그들은 빛나고, 멋있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마치 그 장면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전 지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고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요. 당연히 저도 공연 보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다만 힘들긴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음악을 수천 명 앞에서 선보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요. 공연을 보며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빛 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빛나 보이는 사람들도 마냥 빛나지만 않다는 건 알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큰 축복이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부디 그 빛을 잃지 말고(어둠으로 가지 마요.. 범죄자가 되거나...) 오래오래 가수하길 바라요.
당신은 앞으로도 알 수 없는 EX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