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림의 「나무, 사슴」평설 / 홍일표
나무, 사슴
—푸른 호랑이19
이경림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질기게 견디면
나무둥치 속에 염통이 생기고
쓸개가 생기고
고요히 흐르던 연둣빛 수액이
뛰노는 붉은 핏톨이 되는 걸까
얼마나 멍하니
얼마나 머엉하니 기다리면
수십 년 붙박였던 뿌리가
저리 겅중거리는 발이 되는 것일까
아직 나무였던 시간들이 온몸에 무늬로 남아 있는데
제 몸이 짐승이 된 줄도 모르고
자꾸 허공으로 가지를 뻗는
철없는 우듬지를 그대로 인 채
저 순한 눈매의 나무가
한 그루 사슴이 되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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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너머의 시
어느 술자리에서 이경림 시인은 나이가 드니까 모든 경계가 사라져서 좋다는 말을 하였다. 성의 구별, 빈부, 지위 고하, 미추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분별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니 비로소 삶의 공활한 영지가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최근에 이경림 시인은『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는 시집을 펴냈다.
시집 속에서 「나무, 사슴」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시인의 시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시였다. 이 시에서 시인은 '공활한 영지'를 매우 유니크하게 형상화하였다.
시집 서문에서 '존재가 하나의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60년이 걸렸다'고 말하고 있듯이 시인의 눈은 이미 모든 경계를 넘어 무화의 경지에서 노닐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황현산이 지적했듯 이는 허무적 담론은 아니다. 단순히 허무주의적 존재론으로만 본다면 이는 이경림의 시를 매우 협소한 시각으로 본 것이다. 경계 저편의 고요한 응시를 통해 일궈낸 그녀의 시편은 '허공이 밤새 앓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하고 노을 속에서 '피 묻은 칼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무, 사슴」에서도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의 걸음새는 시원하고 활달하여 걸림이 없고, 독자를 새로운 시의 영지로 이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슴을 보고 나무를 읽어내는 특이하고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시에 탄력을 더하고 신비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견딤’과 ‘기다림’ 끝에 나무에 염통과 쓸개가 생기고 수액이 붉은피톨이 되고, 나무뿌리가 사슴의 발로 전이되는 변환의 이미지는 여러 겹의 울림과 시적 사유를 내재하고 있다. 흥미롭고도 아름다운 상상력이 직조한 이 한 편의 시에서 ‘저 순한 눈매의 나무가 / 한 그루 사슴’이 되는 과정은(정작 나무는 제 몸이 짐승이 된 줄도 모르지만) 삶과 자연의 순환을 꿰맨 자국 하나 없이 유려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고백처럼 경계가 사라진 삶의 지평을 독자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나이가 무색하게 이경림의 시는 젊고 탄력이 있다. 노쇠하지 않은 시정신이 긴장과 장력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느슨하게 풀어져 지극히 상식적인 언술을 되풀이하는 늙은 시들과 비교할 때 그녀의 시는 여전히 청춘이고 우리시의 또 다른 미래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시로 여는 세상》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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