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9 파스카 성야 가해 – 사흗날에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호세 6,2).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수난을 예고하셨다.[1]
처음 예고 때는 베드로가 펄쩍 뛰었다.
다음 예고부터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거나 슬퍼하면서도 여쭙기를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묻히실 때 부활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새겨 두었더라면 도망쳐서 숨지도, 베드로처럼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 날 아침에 숨어 있거나 빈 무덤 앞에서 황당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덤 앞에 모두 모여 밤을 새우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새벽에 혼자 부활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라는 말씀대로 아무도 없었다.
주님 부활 날 이른 아침에[2] 여인들은[3]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이나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빠뜨린 장례 절차를 보례(補禮)하고자 갔다.
루카가 전하는 “그 여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이며(루카 23,27),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멀찍이 서서 예수님 친지들과 함께 바라보던 여자들 ─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함께 해온 여자들이다(루카 23,49).
또한 예수님의 장례 때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했던 여자들이다(루카 23,56).
부활 날 아침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인들이 맨 먼저 뵙는 영광은 예수님께 생전의 존경심과 사랑 때문이었다.
여인들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알지 못했다.
‘그 여인들’과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뵙고 따르며 가르침을 받고 기적에 참여하였지만, 부활 신앙에는 이르지 못했다.
예수님께 대한 일상적인 경애(敬愛)가 ─ 존경과 공경 그리고 사랑이 그들에게 없었더라면 그 여인들은 부활 신앙에 맨 먼저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 대한 경(敬)과 애(愛)는 신심(信心)이다.
신심이 없는 신앙은 삶이 역경에 빠지면 버티지 못한다.
배반하거나 도망친다.
부활 날 아침 ‘그 여인들’에게서 부활 신앙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을 본다
우리가 실망하고 주님을 떠나 흩어질까 봐,
신심이 약한, 그래서 부활 신앙이 없는 우리가 세속의 자식으로 살고 말까 봐
주님께서는 참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지 이틀 뒤에 우리 신심을 살려 주시려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주님 앞에서 살게 해주셨다(호세 6,2).
[1] 예수님의 수난 예고 : 1차(마태 16,21-23; 마르 8,31-33; 루카 9,22), 2차(마태 7,22-23; 마르 9,30-32; 루카 9,43-45), 3차(마태 20,17-19; 마르 10,32-34; 루카 8,31-34).
[2]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마태 28,1),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마르 16,2),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루카 24,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3]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마태 28,1),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마르 16,1),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그 여자들”(루카 23,55; 24,1),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