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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 최고의 의탁에 대해
- ‘인간이 악을 단속하면 주님이 악을 제거하신다.’는 원리는
인간의 책임 한계와 주님의 전능하심을 명확히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인간의 영혼 내부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투는,
내면으로 밀려오는 지옥의 유입에 동의하기를 거절하는
처절한 사투의 행위다.
이는 겉 사람의 바깥 행동과 언행을 말씀의 진리로 통제하며,
악의 출입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치열한 고군분투라 할 수 있다.
이 사투는 겉보기에 인간이 홀로 모든 힘을 짜내어 부딪치는
치열한 자력 구제처럼 보이기 쉬우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역설적인 진리가 숨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언행을 단속하고 멈추어 서면,
주님께서 영혼의 깊은 심층에 도사린 악의 뿌리까지
친히 제거해 주실 것이라는 신성한 약속 때문이다.
인간이 악의 출입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행위는
사실 이 약속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가능한 가장 깊은 신뢰의 행위이다.
수많은 이들이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지옥의 충동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않도록
빗장을 지르는 외적 단속을 행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악의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내려는 조급함에 지쳐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영적 피로는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는 멈춤의 실천이 가진
참된 의미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옥의 압력을 견뎌내는 인간의 능동적인 거부가
왜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의탁의 실천이 되는지
그 정밀한 역학을 깊이 살펴보고,
또 악을 단속하는 인간의 몫과 이를 정화하시는 주님의 권능이
어떻게 맞물려 일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명밀히 규명해보는 것이다.
‘인간이 악에 대한 거부로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면
주님이 악을 제거해주신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핵심적인
신인(神人) 협력 법칙을 담은 문장이다.
이 선언이 내포한 영적 역학과,
왜 이것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의탁'이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악을 단속하면 주님이 악을 제거하신다.’
이 원리는 영혼의 청소 작업에서
인간의 책임 한계와 주님의 전능하심을
명확히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인간의 단속은 의지적인 거부를 뜻한다.
인간에게 유입되는 악한 생각, 무력한 감정, 부정적인 정욕들은
지옥의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거대한 하강 압력인데
인간은 영계의 거대한 세력인 지옥 자체를
스스로 소멸시키거나 전멸시킬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몫은,
내면에서 동요가 일어날 때 '그 악한 즐거움이나 낙심에
동의하지 않고 동조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즉, 겉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말씀의 진리로 단호히 단속하여
영혼의 문을 걸어 잠그는 행위까지가 인간의 영역이다.
그리고 주님의 제거는 섭리적 정화를 뜻한다.
인간이 자유의지(영적 평형) 안에서
악에 대한 동의를 완강하게 거절하고 버티면,
영혼의 깊은 심층에서 그 악의 뿌리와 지옥의 결박을
물리적으로 끊어내고 청소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인간은 문만 걸어 잠글 뿐,
내면에 침투한 지옥의 구조를 해체하고 정화하는 영적 수술은
전적으로 주님의 전능한 권능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면 왜 이것이 '최고의 의탁'인가?
어떤 이들은 '의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채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상태(나태)로 오해한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원리에 따르면,
인간이 능동적으로 자기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철저한 의탁의 실천이 된다.
유입되는 악한 상태를 내 힘과 결단력으로
완전히 뿌리 뽑으려 드는 행동은
겉으로는 신앙적 투쟁 같으나 실제로는 주님의 전능을
신뢰하지 못하고 결과까지 내가 책임지려 하는 자아의 교만이다.
반면, ‘내가 동의하기를 거절하고 행동을 단속하면,
약속대로 주님께서 이 악을 친히 제거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결과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는다.
최고의 의탁은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내면의 통로를 열어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시므로,
인간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동의를 거부하는 협력을 수행할 때에만
그 영혼 안에 합법적으로 개입하여 역사하실 수 있다.
결국, 유혹의 결과값까지 자신이 통제하려다가 지치는 대신
오직 주님이 명령하신 '거부와 단속'에만 온 힘을 쏟는 행위는,
내면의 무게중심을 조절하시는
주님의 전능과 신성한 섭리를 완전하게 신뢰할 때만 가능한
가장 정밀하고 실천적인 영적 의탁이 된다.
그러면 인간이 악을 단속한다는 것은
내면의 거부는 물론 바깥의 행동까지 억제한다는 것까지인데
이 악을 주님이 다시 제거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하신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왜 최고의 의탁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내면의 동의를 거절하는 것에서 나아가
바깥의 물리적인 행동과 신체적인 언행까지
스스로 억제하고 통제하는 치열한 단속, 바로 그 행위가
왜 주님의 제거 역사와 맞물려 '최고의 의탁'이 되는지
그 영적 법칙의 구체적인 경위를 살펴보자.
이 역학은 인간의 철저한 외적 단속이
주님의 내적 수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인 협력의 핵심 질서이다.
인간이 바깥 행동을 단속하여 죄의 실행을 억제할 때,
주님께서 영혼의 심층에서 행하시는 '제거'는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영적 세포의 재배치이자 구조적 수술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악한 정욕과 생각은
지옥의 특정한 악령 공동체로부터 유입된다.
인간이 내면으로 거부권을 행사하고 겉으로 행동을 단속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지옥 공동체와의 영적 연결 통로를 끊어내고 멀리 격리시키신다.
인간은 겉 사람의 습관(바깥 행동)을 억제할 수 있을 뿐,
뇌의 각인이나 영혼의 유전적 토양 자체를 바꿀 힘은 없다.
주님은 인간이 행동을 묶어두고 버티는 동안,
영혼의 가장 깊은 내부(속사람)에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새로운 구조물, 즉 새로운 자아(고유속성)를
친히 건축하시고 정착시키신다.
즉, 인간은 죄의 발현을 '억제(Restraint)'할 뿐이고,
그 죄의 뿌리를 영혼에서 들어내어
천국의 질서로 재조립(Reorganization)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다.
여기서 외적 행동까지 억제하는 것이
왜 '최고의 의탁'이 되는가?
또 ‘행동을 내가 단속하는데
왜 그것이 맡기는 것(의탁)인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영적 역학에서
인간이 손과 발, 혀를 묶어두며 치열하게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방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탁의 표징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일하실 수 있는
'합법적인 수술대'를 제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절대 침해하지 않으시며,
겉 사람과 속사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질서를 수호하신다.
만약 인간이 외적 행동을 억제하지 않고 악을 그대로 실행해 버리면,
그 악은 겉 사람의 행동을 통해 영혼에 완전히 고착(귀속)되어 버린다.
인간이 ‘내가 이 행동을 단속하고 멈추면,
주님은 반드시 내 내면을 고쳐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을 믿고
자신의 바깥 행동을 피나게 억제하는 것은,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맡기고 수술대 위에 가만히 누워
신체적 통제권을 양도하는 환자의 능동적 복종과 같다.
행동을 멈추고 버티는 것 자체가 주님의 전능을 신뢰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의지의 실천이다.
둘째, 그것이 최고의 의탁이 되는 이유는
결과의 영역을 내 힘으로 책임지려 드는 교만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의탁은 무조건적인 방관이 아니라, '내가 책임질 영역'과
'주님께 넘겨야 할 영역'을 정밀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유혹이 올 때 겉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단속하는 것은
주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신 '사용권'의 영역이다.
반면, 내면의 유전적 악을 전멸시키고
영혼을 성결하게 만드는 변화의 결과는 주님의 '소유권' 영역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오직 자기가 할 수 있는
'외적 행동의 억제와 단속'에만 온 힘을 쏟으며
내면의 변화라는 결과값은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상태야말로
자아의 개입을 배제한 가장 정밀한 영적 의탁이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바깥 행동까지
단호히 억제하며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철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실천이다.
내가 싸우듯 손발을 단속하는 능동적 협력을 다하면서도,
그 투쟁을 통해 내 영혼이 정화되는 최종적인 권능과 결과는
전적으로 주님의 전능에 의탁하는 이 유기적인 질서가
바로 저서가 말하는 최고의 의탁이자 신인 협력의 참된 실제이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영적 역학에서
인간이 손과 발, 혀를 묶어두며 치열하게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방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탁의 표징이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인간은 자신의 악을
강력한 힘으로 단번에 도륙내고 싶어 하지만,
가공할 지옥의 압력에 비해
자신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영적 투쟁의 현장에서 처절하게 체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군대 장관이 되어
직접 악을 전멸시키려던 자아의 무모한 질주를 멈추고,
오직 자신이 책임져야 할 영역인
'동의의 거부와 외적 단속'이라는 문만을 걸어 잠그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무력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영혼의 심층을 청소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모든 결과값을
맡겨드리는 상태야말로 안이한 방관이 아니라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정밀하고 강력한
최고의 의탁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성숙해질수록
직면하는 유혹과 무력감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개인의 사소한 나쁜 습관이 아니라,
영계 전체의 하강 인력을 타고 밀려드는 거대한
지옥 공동체의 공격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결단력이나 얄팍한 의지력을 무기 삼아
이 가공할 지옥의 군대를 완전히 도륙내고 전멸시키겠다고
덤벼드는 것 자체가 영적인 무지이자 교만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영계의 압력을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뼛속 깊이 처절하게 깨닫는 한계의 시인이 곧 투쟁의 시작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체적 거부권이 바로 ‘문만 걸어 잠그는 것’이다.
이는 내면의 악한 즐거움에 동의하지 않고,
바깥으로 터져 나오려는 손과 발, 혀의 물리적 행동을
피나게 억제하며 문고리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버티는 행위이다.
또 그것은 소극적인 방관이 아니라,
적을 한 순간에 전멸시키고자 하는 자아의 욕구까지 내려놓은 채
오직 주님이 허락하신 평형 상태(자유의지) 안에서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동적 협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이 자리에서 바깥 행동을 단속하며 버티기만 하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심층에서
주님이 친히 저 지옥의 세력을 결박하시고 구조적 수술을 행하여
악을 제거해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을 온전히 믿는 상태이다.
자신이 직접 악을 도륙 내려는
커다란 자아의 욕망과 염려를 내려놓기까지
인간은 수많은 시간 악의 공격에 비참하게 허물어지는
고통의 시간들을 맛보아야 했을까..
따라서 바깥 행동의 단속에서 치열하게 손발을 묶어두는 행위는
결코 내 힘을 의지하는 교만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친히 내 안에서 일하시고 수술하실 수 있도록
영혼의 합법적인 공간을 확보해 드리는 행위이며,
주님의 전능만을 대리인으로서 신뢰하기에 가능한
가장 완벽하고 정밀한 형태의 실천적 의탁이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악과 사투를 벌이는 것은
실제로 엄청 힘들고 고통스러워 선뜻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인데
또 한편으로는 그 악을 송두리 채 뽑아버리고 싶은 거대한 욕망이
함께 그 마음속에 동거하고 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영적 전투의 경계선에서 마주하는
가장 정밀하고도 처절한 심리적 현실이다.
악과 마주하는 투쟁은 실제 삶 속에서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피로를 수반하기에
본성적으로 결코 선뜻 내키지 않는 고역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악을 내 안에서 흔적도 없이 송두리째
도륙 내어 영원히 전멸시켜 버리고 싶다는 거대한 열망이
내면에서 불길처럼 솟구치기도 한다.
이 상반된 감정이 한 영혼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상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역학으로만 정교하게 해명되는
거대한 영적 역설이다.
그 치열한 양면성의 실체가 어디에 기인하는지
그 영적 원인을 살펴본다.
악을 멀리하고 행동을 단속하는 과정이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뇌와 몸, 그리고 유전적 악의 토양에 깊이 각인된
낡은 자아의 생명을 끊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악한 생각과 무력한 감정들은
인간의 외적 자아가 본래 즐거워하던 구체적인 궤도들과
강력하게 공명한다.
따라서 손과 발, 혀를 묶어두며 바깥 행동을 단속하고
내면의 승인을 거절하는 실천은,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도려내는 것과 같은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부하를 동반한다.
겉 사람의 본성은 이 고통을 직감하기에
영적 투쟁 앞에서 본능적으로 위축되고 선뜻 마음을 내지 못하는
감정적 거부감을 일으키게 된다.
반면, 그 악을 내 손으로 완전히 뽑아버리고
전멸시키고 싶다는 거대한 열망은
겉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이고 의로운 투쟁 의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아의 중력이 가장 교묘하게 위장하여 나타난
영적 오류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영적 상태마저도 스스로의 손으로
완벽하게 장악하고 조절하고 싶어 하는
뿌리 깊은 지배욕을 지니고 있다.
내면의 흔들림이나 부정적인 유입 자체를
완전히 전멸시켜 버리겠다는 조급함은,
주님이 주권자이신 평형의 질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결과값을 만들어내겠다는 자아의 개입이다.
내 힘과 결단력으로 악을 도륙 내어
성취를 이루겠다는 열망의 이면에는 그 승리의 결과물을
자신의 도덕적 의와 공로로 귀속시키려는 자아의 교만이 숨어 있다.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이 지독한 역설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절호하게 깨닫고 오직 주님의 전능만을
바라보게 만들기 위한 신성한 섭리의 통로가 된다.
인간은 사투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태생적 무력함을 뼈저리게 체감하는 동시에,
악을 송두리째 멸절시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열망 또한
유한한 자아의 조급한 교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옥의 가공할 세력은 내 힘으로 도륙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절실히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모든 무게를 짊어지려던 무모한 질주를 멈추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악을 완전히 전멸시키겠다는
자아의 거대한 욕망마저 내려놓은 채,
오직 자기가 책임져야 할 영역인
'동의를 거부하고 바깥 행동을 단속하여
문만 걸어 잠그는 파수꾼의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악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영혼의 심층을 청소하여
구조를 재배치하는 영적 수술은
전적으로 주님의 전능하심에 통째로 양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투쟁의 고통과 도륙의 욕망이라는
거대한 양면성의 역설을 관통하여
오직 주님의 약속만을 신뢰함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버티는 상태,
그것이 자아의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고
깊은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가장 정밀하고 실천적인 영적 의탁의 실제이다.
자신의 악을 도륙내고 싶은 동기 중에는
자신의 악까지 지배하고 싶은 통제권의 욕망과
또 자신을 드러내며 영광을 차지하고 싶은 공로주의의 덫,
그 외에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악이 가져오는 피해가 여러모로 엄청 커
항상 거기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다면
한꺼번에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
이것이 영적 투쟁의 현장에서 인간을 가장 깊이 피로하게 만드는
‘세 번째 숨겨진 동기’다.
악이 삶과 정신에 미치는 파괴적인 피해와 고통에 지친 나머지,
기회만 있다면 내 손으로 그것을 단번에 소멸시켜
영원한 해방을 얻고 싶다는 조급한 열망이다.
이는 가공할 지옥의 압력 속에서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고백이다.
이 세 번째 동기가 왜 영적 역학 안에서
자아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치명적인 덫이 되는지,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이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정밀한 내막을 설명하겠다.
악이 유입될 때 영혼이 겪는 고통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상을 마비시키고, 평강을 깨뜨리며,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무참히 갉아먹는 가혹한 피해를 입힌다.
매번 반복되는 부정적인 감정과 흔들림에 시달리다 보면,
인간의 내면에는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다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이로 인해 ‘기회만 있다면 내가 내 힘으로
이 악의 뿌리를 한꺼번에 뽑아내어 이 끔찍한 스트레스를
끝내버리겠다.’는 조급한 전멸의 욕구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열망은 겉으로는
악을 미워하는 순수한 의지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자아의 조급함'이
투쟁의 동기가 된 상태이다.
이 세 번째 동기가 위험한 이유는,
영적 정화가 일어나는 주님의 신성한 '시차(Time-lapse)와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앞서 시인했듯, 유입되는 악은 내 안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지옥 공동체의 하강 압력이다.
이것을 인간이 단번에 없애버리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개인이 맨몸으로 거대한 해일을
단숨에 증발시키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다.
이룰 수 없는 과업을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니
투쟁을 하면 할수록 절망감과 피로감만 가중될 뿐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주님께서 인간 내면의 악을 단번에 전멸시키지 않으시고
일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제쳐두시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온통 악뿐이기에,
만약 주님께서 인간의 조급한 욕망대로 악의 구조를
한꺼번에 송두리째 뽑아버리시면
인간의 생명(자아)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주님은 인간이 손상되지 않도록,
악을 아주 조금씩 변방으로 제쳐두시면서
그 자리에 천국적 자아를 채워 넣는 정밀한 수술을 행하신다.
이로써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악을 도륙 내고 싶어 하는
내면의 왜곡된 동기 세 가지가 충분하게 규명되었다.
첫째는 지배욕으로 이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악까지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통제권의 욕망이고,
둘째는 교만으로 승리의 결과물을
자신의 도덕적 의로 돌리려는 공로주의의 덫이며,
셋째는 조급함인데 이는 악이 주는 피해와 스트레스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어 하는 단번에 전멸시키려는 욕구이다.
인간이 이 세 가지 동기 안에서 움직이는 한,
영적 전투는 언제나 끔찍한 피로와 고갈로 끝날 수밖에 없다.
힘의 원천과 결과의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악이 주는 피해가 너무나 커서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그 절박한 한계를 온전히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의탁의 문이 열린다.
‘이 고통은 너무나 막대하여 내 유한한 역량으로는
단번에 끝낼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시인하는 것이다.
그때 인간은 당장 악이 전멸되지 않아 일어나는
외적인 동요와 스트레스의 결과값까지도
주님의 정화 질서에 온전히 맡겨드리는 상태, 그것이 자아의
조급함을 비워낸 가장 깊고 정결한 영적 의탁의 실제이다.
- 하나의 신성한 진리가 영계로부터 인간의 이성 안으로 유입될 때,
그 주위에는 언제나 그것을 왜곡시키려는 수많은 거짓들이
달라붙을 기회를 노린다.
진리는 본래 천국의 완벽한 평형과 질서 위에 서 있으나,
인간이 자아의 유익이나 감각적 지각에 의거하여
이를 아주 살짝만 어긋나게 해석해도,
그 미세한 균형의 균열을 타고 거짓들이 일시에 달라붙는다.'
그리하여 본래 정결하던 진리는
그 순수성을 잃고 어느 한쪽의 극단으로 치우쳐
교회의 생명을 파괴하는 위선과 오류로 전락하고 만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수많은 교리의 왜곡과 신앙적 타락은
진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하나의 진리에 달라붙은 거짓을 분별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직접 주체가 되어 악을 도륙 내야 한다는 투쟁의 진리에는
공로주의와 통제욕이라는 거짓이 달라붙어 인간을 피로하게 만든다.
반대로 주님이 친히 정화하신다는 의탁의 진리에는
영적 나태와 방관이라는 거짓이 흡착하여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처럼 진리가 살짝 어긋날 때마다 양극단의 지옥적 관성이
영혼을 집어삼키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다.
인간이 이 가혹한 거짓의 달라붙음으로부터
진리를 수호하고 영혼의 중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 이면에 흐르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질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는 것뿐이다.
단편적인 지식에 갇혀
어느 한쪽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자만의 태도를 내려놓고,
매 순간 나의 해석 속에 자아의 유익이
섞여 있지 않은지 냉철하게 단속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지각을 과신하지 않고
말씀의 참뜻을 구하며 중심을 잡으려 고군분투할 때,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진리 주위에 달라붙은
거짓의 먼지들을 친히 털어내어 주신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악과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 이면에는,
역설적이게도 자아의 왜곡된 동기들이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을 때가 많다.
신성한 섭리가 스베덴보리 저서 도처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악과 싸우려 드는 태도를
교만이나 공로주의라 지적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경고하는 이유는
바로 이 자아 중심적인 투쟁의 위험성 때문이다.
그러나 저서를 읽다가 이러한 경고를 접할 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영적 오해와 극단에 빠지기 쉽다.
인간이 직접 주체가 되어 악과 사투를 벌이는 행위 자체를
천국적 질서에 어긋나는 일인 양 자칫 왜곡해 버리는 탓이다.
이 경우 인간이 싸움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신성한 일하심을 오히려 방해하고 가로막는
교만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각각 부분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으나,
정밀하게 분별되지 못한 채 어느 한쪽이 전부인 양 둔갑할 때
영혼은 치명적인 극단으로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악을 도륙 내어 공로를 취하려는 오류와,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명목 하에 손을 놓아버리는
영적 방관의 오류가 공존하는 것이다.
저서에 인간이 스스로 싸우려 드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경고하는 부분과,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주님도 구원하실 수 없다고 강력히 명령하는 부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부분적인 진리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영적 전투의 경계선에서, 참과 거짓을 정밀하게 분별해 내는 일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깊은 고뇌를 수반한다.
두 극단의 오류를 차단하고 주님의 약속 안에
온전히 머물기 위해서는, 이 싸움 이면에 작동하는
실제 영적 역학의 내막을 명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분별의 핵심은
'힘의 주체'와 '행동의 주체'를 나누는 정밀함이다.
이토록 분별이 어려운 이유는,
참된 천국적 질서가 이 두 가지 상반된 진리의
정밀한 균형점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영혼이 반드시 붙잡아야 할 분별의 기준은
'주체'라는 개념을 둘러싼 역학의 분리에 있다.
힘의 주체는 오직 주님뿐이다.
내면의 악을 다스리고, 영계의 평형을 유지하며,
최종적으로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어
영혼을 정화하는 권능의 주체는 전적으로 주님이시다.
이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여 단번에 없애겠다고 덤벼들면
그것은 교만이자 오류가 된다.
그 다음 행동의 주체는 인간 자신이어야 한다.
다만 이때 그는 ‘스스로 하듯’ 행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주님의 전능이 내 안에서 합법적으로 수술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유혹 앞에서 손과 발, 혀를 묶어두고
‘나는 이 악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의지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행동의 주체는 철저히 인간 자신이어야 한다.
결국, ‘인간이 싸움의 주체가 되면 주님의 일을 방해한다.’는 주장은
힘의 원천을 자아로 착각하고
결과까지 책임지려 들 때만 맞는 이야기이다.
반면, 힘의 근원은 오직 주님께 있음을 시인하면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외적 단속과 내적 거부’라는
파수꾼의 임무를 마치 자기 힘인 양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은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영혼의 수술대를 깨끗이 비워드리는
최고의 협력이자 의탁이 된다.
이 정밀한 경계선을 보지 못하면
영혼은 끊임없이 '지독한 피로'와 '영적 나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방황하며 지쳐갈 수밖에 없다.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인간에게 원하는 투쟁은,
악을 내 손으로 도륙 내는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오늘 내게 위임된 문고리를
단단히 붙잡고 버텨내는 충성스러운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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