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1
강구안은 육지로 바다가 들어온 항구를 말한다. 강구안 통영항의 뒷산 기슭에는 통영성이 있었고 동, 서, 북 3곳의 피랑에 포루(鋪樓)가 있었다. 피랑은 이곳 말로 절벽이나 언덕배기 비탈을 의미하는 벼랑이다. 또한 포루는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동피랑은 통영성의 세 곳 중 하나인 동쪽벼랑이다. 현재 50여 가구, 80여 세대, 200여 명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동피랑이라는 말은 여간해서는 듣기 어려운 말이지만 우선 옛 군사시설과는 무관하게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와 예쁘게 포장된다. 그렇다고 통영의 동피랑이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바다와 항구에서 시달리며 일하던 노동자들이 살던 허름한 곳으로 낙후된 곳이다.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다.
통영시가 도심의 일부로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어 2007년에 이 마을을 철거하고 동포루를 복원하는 공원화사업을 계획하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민단체 등이 동피랑 구하기에 나섰다. 서민의 피와 땀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우리들의 지난날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곳으로 철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지혜를 짜내며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다. 마침내 전국 미술대학 학생과 개인이 호응하며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그 동안 투자와 애정이 헛되지 않게 통영에서 첫 손을 꼽아도 좋을 만큼『동피랑 벽화마을』이란 관광명소로 이름을 올렸다. 마침내 드라마 ‘빠담빠담’ 촬영지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어 동피랑 벽화마을은 바닷가 달동네의 화려한 변신이었다. 동쪽 언덕배기 양지바른 동피랑 마을은 골목길 벽면마다 아기자기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동포루‘ 누각이 있고 통영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람을 잡아놓고 발아래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며 빚어내는 통영항의 경관은 한국의 나폴리로 불릴 만큼 손색이 없다. 동피랑의 담벼락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젖어드는 벽화마을의 선구자다. 다소 모자란 그림이라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 같은 생동감에 바다가 출렁이는 것 같다. 가슴이 시린 사람에게는 따스하게 답답한 사람에게는 막힌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같다. 그만큼 벽화를 그린 층이 다양하고 찾아오는 사람들 또한 다양하다. 자신만이 안고 있는 추억을 꺼내보듯 살짝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그런 모습에서 때로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며 이런 때 써도 좋지 싶기도 하다. 통영항은 1906년 일본인이 현재의 강구안 일대 해안을 메우면서 근대적인 항만으로 건설된 곳이다. 밤에 가장 아름다운 항구가 여수항이라면 낮에 가장 아름다운 항구는 통영항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항구는. 푸른 바닷물이 넘실대며 바다가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이다. 그 위에 고깃배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줄지어 정박해 있다. 서호시장과 중앙시장, 통영활어시장에 충무김밥 등 지역 유명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항구에서 언덕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일상에 지친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오랜 삶터였던 동피랑으로 곳곳에 기념이 될 만한 소품과 먹거리에 잠시 머물며 쉬어갈 자리도 마련해 놓았다. 무명의 언덕마을에 벽화 그리기로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초대작가와 전국 공모로 선정된 전문가는 주로 큰 그림을 그렸으며 작은 그림은 많은 비전문가가 참여하여 102점을 그렸어도 서로가 잘 어울린다. - 2019. 01. 06.(소한)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