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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인왕산.,'자수궁 & 인경궁' 터.
인왕산은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부암동 &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338.2m).
원래, 인왕산은 인왕사(仁王寺)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40~50분 도보거리에.,인왕사.
풍수지리설을 떠올리며 이 길을 걷다보면
한양에 궁궐터를 정할 때 무학대사 말대로
인왕산 아래 정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인왕산 동쪽에 궁궐이 들어섰다면 '어진 임금'이라는
인왕산의 이름처럼 조선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기보다는
궁궐에서 해가 뜨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경복궁 주변에는 오늘날까지
조선시대 사라진 궁궐 터들이
수수께끼처럼 문헌 상에., 존재.
인왕산 아래.,'자수궁 & 인경궁'
그외, 현존하는 궁궐로는.,경희궁.
경희궁은 인왕산 사직단 아래 위치.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복원된 경희궁.
.
경복궁 왼쪽에 자리한 인왕산은
옛부터 황제가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풍수설에 의한 말들이 심심찮게 돌았다.
청계천 상류.,수성동계곡
한양 도성 안 빼어난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한양을 대표할 풍경은 모두 다 인왕산 주변을 맴돌아 있다.
필운대(弼雲臺), 청풍계(淸風溪), 반송지(盤松池), 세검정 등.
'국도팔영(國都八詠)' 한양 명승지의 절반이.,인왕산 자락.
지금은 인왕산 주위로 병풍 같은아파트가 그 기운을 막는듯.
독립문역에서 무악동 옥바라지골목을 지나 인왕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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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태조가 경복궁 수호 호국도량으로 창건.
인왕사는 선바위 국사당과 함께 특이한 가람을 구성.
5개 종단의 11 암자가 인왕사 단일 명칭 아래 공존한다.
인왕사는 500년 전에도
현재도 경복궁 수호 도량.
조선 개국 초기에,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궁궐 내원당 조생 스님을 주지로 보내 창건.
대부분 태고종 조계종 스님들로 4년에 한번씩
각 암자의 암주들이 인왕사 주지를 맡고 있으며
인왕사 대웅전 대표적인 전각 외 염불암 송림사
기원정사 관음암 용해사 미타정사 서래암 보덕암
용천암 대원암 성불암 등이 인왕사를 외호하고 있다.
선바위는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인왕사 국사당에서 5분 도보거리에 위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영험한 기운이 있다는.,선바위.
일제 강점기인 1925년 6월 15일
남산 국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진 후
사람들의 믿음이 더 굳어졌다고 전한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궐터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 차천로 '오산설림'을 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았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라며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무학대사는 탄식하며,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라고 하였다.
또 신라 말, 도선대사 산수비기(山水秘記) 기록에 의하면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 될 것.”
과연 5대 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발생,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내용은 19세기 '한경지략'에 실려 있다.
또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고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인경궁, 자수궁은
옛 문헌 상에서만 존재할뿐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왕산 자락에서
인경궁 & 자수궁은
어디에 있었던걸까?
인왕산 자락.,인경궁 & 자수궁은
'사직단 위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인경궁은 사직단 부근에 있었으며
자수궁은., 인경궁 위에 있었으리라.'
즉, 창의문(자하문) 아래.,펼쳐진 수성동계곡.
자수궁은 수성동계곡 끝.,다리 인근에 있었던듯.
원래,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았던 곳
태종 5년(1405) 7월 경복궁 안까지 다녔고
세조 10년(1464) 9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그밖에도 민가에 호랑이 피해가 수없이 많아서
세조는 친히 세 번 백악에 올라 호랑이를 잡았고,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버리고개에 가서 호랑이 사냥.
명종 때에도 양근에서 30여 명이 해를 입고
선조 때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 호랑이가 횡행하여
400여 명이 해를 입어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았다.
속설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고 전했다.
"서산", "필운산"이라고도 불렀던.,인왕산.
필운대는 인왕산 별칭 필운산에서 유래되었다.
선조 때 재상 이항복 집터에 암각 유적인.,필운대.
현재, 필운대는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
필운동은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4월 1일
한성부 5부 방명 표지를 세울 때 한성부 서부 인달방 지역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서부 인달방의 분선공내계・사직동계・수성궁내계・내수사계 일대.
필운동은 仁王山 별칭 弼雲山(필운산)에서 유래.
조선 중종 때 명 사신 龔用卿이 손님 접대의 예로
중종의 청을 받고 지은 경복궁 서쪽 인왕산의 별칭.
이는 ‘右弼雲龍’에서 따온 것,
경복궁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인왕산은 오른쪽에 위치한 운룡.
운룡은 임금을 상징,
경복궁의 오른쪽에서
임금을 보필한다는 뜻.
인왕산 기운은 국운을 움직이는 힘이였고
인왕산에 올라서면 그 시람의 기운에 따라
산의 기운이 움직였고 옛부터 전해온.,인왕산.
옛부터 서대문구는
황해도· 평안도.,길목.
서울 북서쪽.,관문 역할.
한양 주산을 정할 무렵.,인왕산 왕기설
광해군은 인왕산 왕기를 억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 자수궁, 인경궁을 건설.
선왕 후궁들의 거처.,옥인동 자수궁.
(광해군 8)에 인왕산 기슭의 민가를 헐고
승군을 징발하여 자수궁(종로구 옥인동)과
인경궁(사직동 부근), 경덕궁(훗날, 경희궁).
인경궁(仁慶宮)· 자수궁(慈壽宮)과 함께
건축 시작 후, 1620년 10월 완공한 경덕궁.
인경궁은 태평관 건물을 허물어 재목과 기와를 사용.
인조 10년 인목대비가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서거.
인조 26년 인경궁 재와(材瓦)로 홍제원(弘濟院)을 지었다.
이후부터 인경궁의 자취는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615년 광해군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이후 창경궁 중건 진행 중 풍수승 성지(性智)에 의하여
인왕산 왕기설이 제기되어 1616년 창건된 인경궁(仁慶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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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대 궁궐로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은
경복궁 ,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 경희궁이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한 세계문화유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
경복궁 동쪽에 위치해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
임진왜란때 불타 광해군 때 재건 후 정궁 역할을 했다.
태종 5년(1504년) 응봉산 아래 완공
태종때 왕자의 난 영향으로 주로 기거
태종6년 1505년 인소전, 광연루 건축
1511년 해온정, 금천교 건립
1512년 정문 돈화교 건립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
1607년(선조 40년) 소실된 궁궐 중 먼저 복구
1611년(광해군 3년) 완공 후, 창덕궁의 법격 상승
경복궁 복구를 포기한 채 창덕궁을 법궁으로 결정
보조궁궐로 건립한 경덕(희)궁(이궁), 인경궁(소실)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조선의 법궁 구실.
조선 역대왕이 가장 오래 머문 창덕궁.
창덕궁은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 회국사신 접견장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신정전.
왕과 왕족 거처.,희정당, 대조전
창덕궁 비원은 일제가 붙인 지명.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의 후원
궁궐 북쪽에 있어 북원 혹은 금원.
창경궁은 조선초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였다.
성종 14년(1483)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거처.
당시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
통명전 등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등이 있었다.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불탄 후, 창덕궁과 같이 재건.
창경궁은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다가 처형 당했는데,
그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궁궐 안 선인문 안뜰에 8일동안 두어 죽었다.
창경궁은 순종 즉위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 건물들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 이름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안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장조· 정조· 순조· 헌종 등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
광해군 때 재건한 정문·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옆 창덕궁과 더불어 조선시대 궁궐의 중요한 유적.
경복궁은 1394년 창건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완성.
조선 초기에 사용하였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
그후, 1867년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
현재, 경복궁의 건물들은 그 때 지어졌거나
1980년대 이후 복원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조선 초, 왕자의 난으로
방번, 방석 형제가 시해당했고
명성황후가 사해당한 곳도 경복궁.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1593년 행궁으로서 사용.
선조의 뒤를 이은 광혜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간 왕궁으로 사용.
1615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만 거처.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폐위,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270년간 별궁.
1897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 후,
왕궁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에도 이곳에서 거처
이때부터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명명된 덕수궁.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운명.
현재, 18,635평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중화전,
광명문,석어당, 준명당,즉조당,함녕전,덕홍전,및 석조전 등.
덕수궁은 구한 말 고종이 일제 압박으로 양위를 당하고
한많은 여생을 마감해 3.1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창덕궁은 별궁이었으나 사실 상 정궁 역할.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임시궁궐 광해군 때 정식 궁궐.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는 서궁으로 불리운 경희궁.
경희궁이 법궁인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한 궁이라.,서궁.
경희궁은 1988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일부 만 복원되었다.
1617년(광해군 9) 인경궁·자수궁과 함께 건축을 시작
1620년 10월에 완공후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원래 경희궁 자리는
인조 생부 정원군 잠저였는데,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전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8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은 1823년 사직단 뒤로,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 산문으로 이축되고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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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에는 다섯 개의 큰 궁궐이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아울러, 창덕궁의 권역에는
궐보다 중요한 종묘가 있었고,
경복궁 서쪽과 경희궁 북쪽에 사직단.
자금성(紫禁城)은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면적만 축구장 100여 개 크기인 72만㎡며,
그 안에 약 800채 건물과 8800개 방이 있다.
하지만 막상 자금성에 들어가면
좁은 통로와 높은 벽에 가로막혀
그 규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데,
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산(45.7m).
바로 자금성 북쪽의 경산공원(景山公园).
이곳에선 자금성뿐 아니라 종고루(钟鼓楼),
북해공원의 백탑(白塔), 중남해(中南海)까지
베이징 시내를 사방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
대부분 평지인 베이징에서
보기 힘든 산이며 인공산이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낮지만,
자금성을 감상하기에는 충분한 높이.
북해공원 호수와
자금성 해자를 판
흙을 쌓아 만든 산.
사람의 손으로 쌓아 올린 산이
아파트 20층 높이에 맞먹을 정도.
원래, 경산은 원나라 황궁의 일부분이었으나
명나라 영락제(1360~1424)가 자금성 건립 때
이곳의 건물들을 해체해 봉우리만 남게 되었다.
훗날 청나라 건륭제가 이곳 5개 봉우리에 정자를 건립.
주상정(周赏亭), 관묘정(观妙亭), 만춘정(万春亭),집방정(辑芳亭),
부람정(富揽亭)로 불리며 가장 높은 곳은 중간에 있는 중봉(中峰)이다.
이외에도 공원 내에는 공자를 모시는 기망루(绮望楼)와
청∙명대 황제 시신 보관처 수황전(寿皇殿), 영사정(永思殿),
관덕전(观德殿), 호국충의묘(护国忠义庙) 등의 건물이 있다.
또 공원 동쪽에는 명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베이징 함락때 목매 자살했다는 고목 한그루
경산(景山)은 베이징 중심축이며 자금성 북쪽.,인공산.
남쪽으로는 자금성 신무문(神武门), 서쪽으로 북해(北海).
원래 황실 정원이며, 근래에 와서 일반인에게 공개된 공원.
경산공원(景山公园) 면적은 약 23헥타아르,
송백(松柏)이 울창하며, 모란이 많이 피었다.
경산(景山)은 진산(镇山) 만세산(万岁山)
매산(煤山) 등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으며
13세기 중엽에는 원나라 황궁의 일부분이었다.
경산은 황궁을 둘러싸는 해자와 인근 연못에서
퍼낸 흙을 쌓아 만든 45.7m 높이 인공산으로 조성.
산상에 송백을 원내에 학과 사슴이 무리를 이루었다.
북쪽 부근에 수황전 등 황궁 누각 & 다양한 과수.
중양절마다 황제는 경산을 올라 연음을 베풀었다.
명나라가 베이징 천도 당시 산이 없었기에
인공산을 만들어 풍수산(风水山)이라 불렀다.
숭정(崇祯) 17년(1644년) 구력 3월 19일,
이자성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쳐들어오자,
명 마지막 숭정황제(33세)는 신무문으로 나와
경산 동쪽 비탈 홰나무(槐树) 밑에서 자살하였다.
조선시대 궁궐로서
현재, 복원되지 않은 궁궐은
인왕산자락에.,자수궁과 인경궁.
광해군때 궁궐로., 옛 문헌에 만 존재.
현재, 옛터에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광해군 재위 때 건축한 자수궁과 인경궁은
조선 후기에 왜 흔적조차 없이 멸실된걸까?
수창궁은 태조 이성계가 즉위, 정종, 태종도 이곳에 임어(臨御).
조선 성종 연간에 이미 허물어져 개성부 창고로 사용되었던.,궁궐.
고려왕조가 원에 항거하며 강화천도 당시 사용한 궁궐 명칭에서 유래.
강화 천도 당시에 사용되었다는
수창궁 역시 위치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개경 수창궁은 옛터를 보존.
오늘날, 대중가요 '황성옛터'가 수창궁 터.
그러나, 자수궁과 인경궁은 옛터 흔적조차 없다.
조선 후기에 인위적으로
철저하게 멸실한 결과이다.
조선 개국 초,
태조 이성계가
정사를 펼쳤던.,곳.
신덕왕후 거처.,자수궁.
사실 상,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 후 거처한 궁.
조선시대 '한성 북부 순화방'에 있었던 궁.
(종로구 자하문로 19길 36 군인아파트 등)
태조와 신덕왕후,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
그후 자수궁에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때부터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게된.,'자수궁'
그후, 선왕의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어 한때 여승방.
그후로는, 명나라 여인이던 굴씨 부인이 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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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광해군 8년) 풍수설에 의하여
인왕산 아래 현재 종로구 사직동, 누각동에
궁궐을 창건하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주장이 제기.
광해군은 인왕산(仁王山) 아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16대 인조 아버지의 사저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었으며.
인목대비를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으로 폐출시켰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수성궁(壽聖宮)은
원래, '세종대왕 3남' 안평대군의 집.,비해당 터.
광해군 재위 때 수성궁 터에 자수궁(慈壽宮)을 건축.
자수궁은 인경궁의 뒤쪽에 지었다고 하며
인경궁은 1616년 인왕산 왕기를 누르기 위해
경희궁과 남북으로 이어.,인왕산 아래에 창건.
인조는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
창경궁에 옮겨지었고 인경궁은 영조 대에 완전 철폐.
1630년(인조 8년)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인조는 인경궁에서 폐출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풍정(豊呈)을 거행.
인목대비는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승하(昇遐).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경복궁 서쪽에.,경희궁.
경희궁 북쪽에.,인경궁.
인경궁 뒤쪽에.,자수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은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궁궐.
자수궁은 수성동계곡에 위치.
광해군은 왜 3 궁궐을 남북으로 배치한 것일까?
3궁궐은 '조선 개국의 산실' 수창궁을 복원한듯 하다.
혹, 고려 개경의 남북으로 배치된 수창궁을 모방한걸까?
'고려 도읍'
개경 도성의
서소문 안에
송악산 자락에
있었던.,수창궁.
조선건국 후 고려의 종묘를 부수고,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를 탄압하는 등
고려왕실의 흔적까지 지우려했던 혁명 공신들.
고려 사직을 막내리게 한 쿠데타 현장.,선죽교.
서울에서 불과 50km거리에 위치한 개성의 고적(古蹟)들
936년 후삼국 통일후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망할 때까지
개성은 고려 도읍지이자, 우리나라 중세역사의 중심무대였다.
개성은 찬란했던 불교의 무수한 유산을 간직한 곳이자
대각국사 의천 등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거쳐갔던 장소.
고려 말, "송악산이 세 번 울면, 국운이 트인다."던.,개성.
1392년 7월 17일 고려(918-1393) 34왕 공양왕이 선위(禪位)
이성계가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태조에 즉위.
태조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정종2년(1400년) 11월13일에 세자 이방원이 예궐하여
조복을 갖추고 명을 받고, 연을 타고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수창궁.
그후, 정종이 즉위 후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
태종 즉위 후, 태조가 태상왕, 정종은 상왕이 된 곳.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령.
한양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건축.
태조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이어, '8월 6일~ 9월 24일' 49일간, 충 98일 간 축성공사.
19만7천4백명을 동원해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축성.
북 : 백악산~ 동 : 낙산 ~남 : 남산 ~ 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축성한 공사 전체구간.,5만 9.500여척을
600척씩 97구간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명명했다.
'조선건국 한양천도'
산실인.,개경 수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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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초에서 중기까지
동서로 배치된 한양의 궁궐들.
조선시대 궁궐 외조는 궁궐 안 관청이 자리하는 공간,
치조는 신하들의 조하를 받고 집무를 하던 궁궐의 정전.
조선시대 정전은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 왕의 권위를 강조.
연조는 왕의 침식과 휴식을 위한 개인생활공간.
연조 영역에는 왕과 왕비, 왕대비의 침전이 자리하고,
그 옆에 궁궐 안에 필요한 제반시설과 관계자들 생활시설.
왕세자 거처는 주로 동쪽에 자리하여 동궁(東宮)이라 부른다.
경복궁은 조선 개국 초, 법궁이자 정궁이다.
광화문은 경복궁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국왕이 드나드는 경복궁의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이었기에 웅장하다.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한 궐문 형식.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뤄졌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광화문 문루(門樓)에 종을 걸어 때를 알렸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경복궁 창건 당시 광화문은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불렀고
세종 8년(1426)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이라 불렀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졌다.
광화문이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 축에 맞춰 복원.
원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m 뒤로 물러나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된.,광화문.
세종로 경복궁(景福宮)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 낙산과 인왕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경회루.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을 질때 많은 전각들이 훼손.
1990년대 총독부 건물을 철거후,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면적은 432,703㎡이며, 동서 500m, 남북 700m 규모로 남아 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273년 간 방치.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광해군이 일부 복원.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자 백성들이 태워버린 것.
하여,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임시궁궐이었고
광해군 재위 동안에 덕수궁은 정식 궁궐이었다.
그러나, 덕수궁은 비좁아 이전할.,새 궁궐이 필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에
성난 민심이 태웠던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다시 중건하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곳은 이미 민심이 왕실을 떠난 곳.
조선왕실의 실추된 권위를 되찾으려면
아예 새 궁궐터로 이어하려 했던 광해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를 위한 새 궁궐 터를 모색.
풍수설에 의해 찾아낸 곳이.,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덕수궁 북쪽으로 인왕산 자락까지.,남북으로 궁궐을 신축.
국가 재정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라
3곳 궁궐의 건축을 위한 재원 조달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과다조세, 매관매직 등 부작용도 발생.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건축하는 동안에
매관매직 자금조달 등 악역을 맡은.,김개시.
그러던 와중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된.,광해군.
광해군은 새로운 궁궐을 3곳에 건축하던 도중에
권좌에서 쫓겨났기에 궁궐 공사는 중단되었던 것.
그무렵, 경희궁은 거의 완공 단계.
광해군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
인조반정 후, 인조가 첫발을 딛게 된.,경희궁.
인조는 창덕궁을 복원한 이후에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지만
인조 2년 이괄의 난때 또 다시 불탄 창덕궁.
창덕궁은 선조 말년에 복원공사.
광해군 재위 때에야 복원공사 완료.
인조 재위 2년 '이괄의 난] 때 불탄 후
또 다시 복원되는 등 수난의 역사를 반복.
조선 후기에는 경복궁을 대신하여
동궐 창덕궁은 '법궁이자 정궁'의 역활.
경희궁은 '창덕궁 서궐이자 정궁'의 역활.
...............................
...............................
경복궁은 연산군때 중종반정을 전환점으로
조선 중기에 법궁의 역활을 사실 상 마감한다.
고종 때 복원되었지만, 곧 국결이 기울었던 때문.
그러한 비운의 역사를
품고있는.,인왕산 치마바위.
서촌 수성동계곡 위에.,치마바위.
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복궁을 품은 '북악산'은 상징적인 곳.
인왕산 수성동은 사실 상, 조선왕조의 산실.
한양 도성의 축성공사
경복궁 궁궐 공사를 포함
한양 신도시 건설 주역들이
조선 개국 초 모여 살았던 곳.
서촌 세종마을 옥인동 수성동 등.
조선시대 '청운의 큰 뜻을 품고.,'
8도의 인재들이 모여든 곳.,청운동.
인왕산 자락 청운동은 조선 역사의 산실.
인왕산.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지나
서촌, 통인시장 지나.,수성동계곡.
그곳에서 위로 더 오르면
인왕산석굴암으로 가는 길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에 있는.,석굴암.
그곳에서 위로 더 올라가면.,석굴암 약수터
석굴암약수터는 치마바위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
치마바위에 오르면,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원비였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전설이 전한다.
신씨는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원비이자,
연산군의 측근이었던 '신수근'의 딸이다.
성희언, 박원종 등이 신수근 형제를 죽이고
연산군 폐위 후, 연산군의 아우 진성대군을 옹립.
이른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진성대군.
중종은 장인 신수근 등이 살해된 와중에
즉위 직후 부인이 걱정되어 중전에 봉하였다.
그러자, 반정공신들이 신씨를 내쫒을 것을 주장.
반정공신들은 중전 신씨가 친정아버지 신수근과
그 형제들을 이미 죽였기에 훗날 보복이 두려웠다.
중종은 중전 신씨를 지키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신수근(1450년 ~ 1506년)은 문신이자 왕실 외척.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아들로 임영대군의 외손이요,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며, 세종의 외증손.
따라서, 왕실과는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 외에도 그의 부인은 권람의 6째 딸로 남이의 처제.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 참여를 거절해 살해 당한 것.
중종은 중전 신씨 폐출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연산군 측근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나눠주고,
기녀 300여명을 노비로 보내 주었지만 허사였다.
유자광 같은 반정공신은 대비전에서까지 으름짱.
"중전 신씨를 폐출하지 않으면 임금을 폐출하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신씨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인왕산 아래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신씨는 궐을 나오며, 살아있는 동안에 인왕산 치마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 남편을 그리워하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한다.
그후,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함께 살때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널었다.
중종도 경회루에 올라 그곳을 보며 신씨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런 중종을 반정공신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결국,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에게 새 장가를 들게 하였고,
그후 중종은 10여 후궁을 맞이하며 원비 신씨를 잊어갔다.
원비 신씨는 남편이 사직단 제사를 지내러 올 때마다
말죽을 쑤어 사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가 중종이 탄 말에게
먹이는 등 부부애를 과시했지만, 끝내 궁궐로 돌아오지 못했다.
원비 신씨는 71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51년 간 인왕산 치마바위에 붉은 치마를 널었다.
그러다가, 영조 15년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권되었다.
단경왕후는 왕비로 있었던 기간은 일주일.
당시 20세 단경왕후는 71세로 죽을 때까지
자식 한명 없이 중종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중종에게 단경왕후는 조강지처였지만
옛 여인 중 하나로 잊혀진 여인이었다.
중종은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488년(성종 19) 성종 &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출생.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실록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청단(聽斷)을 잘했다."라고 기록.
성종은 서열 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반정으로 1506년(연산군 12)에 왕위에 올랐지만
본인 스스로는 전혀 반정의 뜻이 없었던 군주였다.
반정하던 날에 군사들이 그의 집를 애워쌌는데,
반정 공신들은 누가 해칠 것을 염려해 보호했던 것.
진성대군은 놀라 자결하려 하자 부인 신씨가 만류했다.
"군사들의 말 머리가 이 집을 향해 있으면
우리가 죽지 않고 무엇을 더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군사들의 말 머리가 집 밖을 향해 있으면
우리를 호위할 뜻이니, 그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신씨는 진성대군의 소매를 붙잡고 말리며
사람을 내보내어 살피게 했더니,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 - 연려실기술 권7, 중종 조 -
반정 군사들이 자신의 집을 호위할 때까지도
자신이 왕으로 추대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반정 세력은 궐 안을 장악 후 대비인 정현왕후에게
진성대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도록 종용.
처음엔 반대한 정현왕후가 결국 허락해, 그날 즉위식.
얼마나 급하게 진행되었는지
예식에 갖출 면류관이 없어서
익선관을 쓰고 즉위했다 한다.
이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중종은
한동안 반정 세력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중종이 얼마나 힘 없는 왕이었는지는
단경왕후 신씨의 폐비 문제에서 드러난다.
중종과 신씨는 자식은 없었으나 금슬이 좋았다.
첫부인 신씨가 폐비된 후
중종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두번째 왕비로 맞이한.,장경왕후.
장경왕후는 1남 1녀를 낳았으나
1515년(중종 10)에 원자(12대 인종)를
낳은지 엿새 만에 죽자 신씨를 복위를 시도.
그러나, 반정공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중종은 1517년(중종 12)에
세번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를 맞이.
윤지임 딸로, 13대 왕인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는 명종 외 4 딸을 더 낳았다.
중종은 이 밖에도 경빈 박씨가 낳은 복성군을 비롯하여
9 후궁에게서 아들 7명과 딸 6명을 더 낳아, 총 9남 11녀.
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공신 지위.
특히, 반정의 핵심 3인방인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각각 이조판서, 우의정, 병조판서에 올라 정권을 장악.
연산군 학정으로 문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는데 성공.
그러나, 왕도 어찌하지 못하는 막강한 세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고 훈공 등급을 정하고, 관작을 남발하였으며
역적 유자광에게조차 반정공신 자격을 준 잘못을 범했다.
즉위 초, 반정 세력에게 휘둘리던 중종은
점차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되찾으려 했다.
그래서, 등용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趙光祖).
그러나, 결국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의 사림들을 유배했다가 사사하였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 개혁정치도 실패로 끝난 것.
그후, 중종 역시 개혁을 포기했고
조정은 훈구권신들이 여전히 득세.
중종실록에는 원비 신씨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기록.
1698년 숙종은 연경궁 내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지내게 하고.,한식에는 묘제.
1739년 영조는 그녀를 왕후로 복위시키고
익호를 단경(왕후), 능호를 온릉으로 추봉하고
왕비릉 '정릉, 사릉' 예를 따라 새로이 상설을 설치.
........................
........................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부산포(동래), 제포(薺浦, 창원), 염포(鹽浦, 울산).
삼포 왜구들이 조선의 통제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킨 것.
삼포를 개방한 시기는 세종 때였다.
1418년(태종 18)에 단행한 대마도 정벌로
조선과 일본의 교섭중단 한참 후 개방된 삼포.
조선 조정에서 삼포 개방은
일종의 유화 정책이었던 셈.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삼포 왜인의 수가 증가.
불법체류, 정해진 규정을 위반, 거래 행위가 문란.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백성에게 돌아갔다.
성종 조에 이르러 이러한 폐해를 없애고자
삼포 왜인들에 대한 단속과 통제가 강화되고,
중종 때 더 강화되자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
'삼포왜란' 폭동을 일으킨 왜인의 수가 4~5천 명.
조선 약탈을 노리던 대마도주가 이들을 지원했다.
폭도들은 제일 먼저 부산포와 제포를 연달아 공격
그 여세를 몰아 웅천과 동래 지역까지 치고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부산진첨사인 이우증(李友曾)이 죽고
제포첨사 김세균 납치 등 민간에 대한 약탈이 자행.
조정은 좌의정 유순정을 도순찰사에 임명해 반란 진압.
진압군이 수륙 양면으로 파상공격을 펼친 결과
6일 만에 왜인 폭도들의 거점이 모두 초토화되고
대마도주 아들이 전사하자 왜인들은 대마도로 도주.
이 일을 계기로 중종은 삼포왜관 폐쇄 및 교역 단절
그러나, 2년 후인 1512년(중종 7)에 임신조약을 체결.
국교는 다시 정상화되었고, 제포 한 군데만 다시 개항.
.
삼포왜란을 계기로 중종은 비변사(備邊司)를 신설.
당시까지 국방업무는 의정부와 병조에서 맡아서 했다.
그러다 보니, 삼포왜란과 같은 변란에 대처하지 못했다.
비변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초법제적 임시기구.
이후, 비변사는 변란 때마다 대처하는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임진왜란 후, '군사 행정 외교· 통상' 최고 의결기관으로 승격.
그러나, 비변사의 확대와 강화는
국가의 기능이 한 기관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해 국정이 문란.
결국, 비변사는 1864년(고종 1)에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을 때까지 계속 그 기능과 권한을 유지.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대폭 축소시켰고
사실 상으로, 폐지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제 사이 한일합방(韓日合邦) 조약.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로도 호칭.
을사조약 이후 급격하게 기울던 대한제국은
결국 일제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
그후, 황현, 민영환, 한규설, 이상설 등은 반대해
자결하거나 독립운동을 전개해 14만 명이 독립운동.
대한제국의 마지막황후였던.,순정효황후.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 폐위 당하면서
순종이 즉위하자 14세 나이에 황후가 되었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장인을 둔 순종과
‘채무왕’ 윤택영 아버지를 둔 황후의 수난.
“황태자 가례때 윤택영 부채가 200만 냥에 달해
매일 그의 집 앞에 빚쟁이들이 몰려온다는 소식.
순종은 어제 10만원을 특별히 하사하셨다고 한다”
윤택영의 빚이 200만 냥, 즉 20만 원이었으니
당시 웬만한 기와집이 1만 원이었으니 20채 값.
요즘 서울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60억 원.
물론 기사에서는 결혼비용으로 진 빚이라고 했지만,
고종의 후궁 엄비에게 황태자비 간택뇌물까지 포함된
빚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것이 조선 '채무왕'이 된 요인.
순정효황후는 1910년 9월 28일 국권 강탈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 진행을 엿듣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황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춘 것.
그러자 큰아버지 치마 속 옥새를 빼앗아 이완용에게 바쳤던 것.
윤덕영은 강제 병합 후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 5만 원을 받았다.
1940년 죽을 때까지 친일 기관인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 등의 요직.
총독부 전시정책 자문기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과 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아우와는 달리 재물을 모아, 1920년 설립된
해동은행의 초대 은행장에 선출되기도 한 친일파.
그러나 고종 황제 국장 때 ‘분참봉 첩지’를 위조해
판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곧바로 하차하는 수모.
‘분참봉 첩지 위조 사건’은 윤덕영이 주동이 되어
몇몇 다른 귀족과 함께,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주관.
임시직 ‘분참봉’ 임명 첩지를 위조해 판매한 사건이다.
분참봉 첩지가 있으면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던 시절
황후의 백부 지위를 이용한 웃지 못할 사기극이었다.
윤택영은 강제 병합 후 황후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후작 작위와 현금이 아닌 매국 공채 504,000엔을 받았지만
귀족 작위처럼 세습되며 은행이자 만 받을 수 있는 ‘세습 공채’
당장 현금이 필요한 윤택영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래서 그는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들에게, 은사금이
공채로 나와 재산이 300원뿐이라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11년 빚쟁이들에게 소송을 당했고,
4월 11일에는 집 안에 있던 물건에 경매가 붙여져
그 부인의 옷, 고종이 하사한 꽃병까지 경매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몰락한
황실 친인척들 뒤치다꺼리 여생을 보냈다.
한국전쟁 때는 정부에서 손을 써주지 않아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인민군에게 둘러싸였지만
“내가 조선의 국모”라며 호통쳤던 일화가 전한다.
시누이인 덕혜 옹주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돌아오는 모습까지 지켜봐야만 했던 황후는,
1966년 낙선재에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
슬하에 자녀는 없었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모’.
60만 인파가 지아비가 있는
순조의 유릉 가는 길을 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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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인왕산 치마바위에 새겨진 각자.
오른쪽 대형각자는.,天皇陛下萬歲(천황폐하만세)
가운데는 파악불가, 왼쪽은 昭和(소화 : 일본 연호).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
그가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각자.
1939년, 가을에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개최.
이를 기리기 위해 치마바위에 새긴.,각자(刻字).
매일신보 1939년 9월17일자,
그 전날 인왕산 현지에서 거행된
기념각자 기공식 장면을 전하고 있다.
“이 기념문자는 인왕산 높이 39m,
폭이 40m 되는 큰 치마바위에다가
사방 9자에 새긴 각자.,‘동아청년단결’
동아(東亞) 오족(五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
1939년 시작하여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
1937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기 위해 만든 맹세문의 내용을 새기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 마감한.,치마바위의 각자.
첫째 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
둘째 열.,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
셋째 열.,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朝鮮總督 南次郞).
그리고, 이보다 약간 왼쪽으로
사이를 띄어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토키사부로’ 한자 글귀가 새겨졌다.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인왕산 치마바위.,각자.
1962년 결성된 인왕산악회 요람.,치마바위.
인왕산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진산 중 하나로,
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태동케 한 역사의 산이다.
태조는 한양 도읍에 내사산을 이어 성곽을 세운다.
인왕산(仁王山 : 338m)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1395년 9월에 경복궁 종묘 사직을 완공.
1396년 20만 백성을 동원해 98일만에 축성.
총 59,500척(18.6km)에 이르는 한성 축성 공사.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2차에 걸친 대공사로 4대문과 4소문을 잇는 성벽 완성.
1422년 세종(재위 1418년 - 1450년) 때에는
32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을 보수.
기존에 있던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공사는 철저한 구간별 책임제로 실시하였다.
천자문 순서대로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담당 군현을 정해 사후 보수까지 맡겼다.
책임제 흔적은 구간명,
담당 군현명을 새겨놓은
당시 성돌에서도 확인된다.
한양도성은 나라의 안정과 왕권을 보여주는 상징물.
한성을 외부와 연결하기 위하여 모두 8개의 문을 설치.
동서남북 4대문, 그 사이 4소문은 도성 백성들의 통행로.
4대문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유교의 덕목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담아 작명.
도성에는 사람이 아닌 하천을 위한 문도 있었다.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위치한 수문이다.
한성을 동서로 가르는.,청계천.
남산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이
수문 지나 도성 동쪽 밖으로 나갔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개경으로 환도.
1405년 태종 때, 완성된.,한양 천도.
백악산(白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목멱산을 남산,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
백악산 아래에는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궁궐이 들어섰다.
이때문에 인왕산은 본래 서산(西山)이라 불렸다.
서산이 인왕산이라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세종 때.
인왕산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화강암 바위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장안 5대 명승지 중 하나.
일제강점기에는 인왕의 표기를 인왕산(仁旺).
1993년 민간인의 출입구역이었던 인왕산을 개방.
1995년에 이르러 본래 지명 인왕산(仁王)으로 환원.
1933년 인왕산 개방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일에 시행.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부대 청와대 습격사건 후,
25년 만에 인왕산과 청와대 앞길을 국민들에게 선물한 것.
그 전까지 서울 시내 대형호텔의 청와대 방향 창문은
열지도 못하고 북악스카이웨이 출입조차 통제되던 시절.
그후,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때 청와대 곁에 조선시대 칠궁과
북악산 개방으로 이어져 청와대 문턱을 낮추는 물꼬가 되었다.
칠궁(七宮)은 역대 왕들의 생모(生母)이면서도
왕비에 오르지 못한 7 후궁의 신위를 모신 사당.
처음에 영조 생모 '숙빈최씨' 사당 육상궁(毓祥宮).
칠궁.
..............................칠궁(七宮)........................
육상궁(숙빈 최씨).,숙종의 후궁으로 영조의 어머니.
연호궁(정빈 이씨), ,영조의 빈으로 진종의 어머니.
저경궁(인빈 김씨)., 선조의 후궁으로 인조의 할머니.
대빈궁(희빈 장씨).,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의 생모.
선희궁(영빈 이씨),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 생모.
경우궁(수빈 박씨).,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의 생모.
덕안궁(순빈 엄씨)..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 생모.
.....................................................................
인왕산 곁 북악산 칠궁은
조선 중기부터 구한 말까지
후궁으로서 왕 또는 추존왕의
'7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사당.
옛부터,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옥인동・누상동・사직동・부암동.
수성동, 서촌 세종마을은 조선시대
왕재가 서린 곳이라는 풍수설 진원지.
특히, 광해군 재위 때
인왕산 왕재 설이 성행.
인왕산 3곳에 궁궐을 건축.
조선개국 후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인왕산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받았다.
좌 청룡.,낙산
우 백호.,인왕산.
태종 5년(1405) 7월에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아
경복궁 근정전 앞까지 들어와 어슬렁거리고 다녔으며,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까지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까지., 호랑이가 침입.
그 밖에도 호랑이로 인한 민가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세조는 친히 세 번이나 백악에 올라가서 호랑이를 잡았고,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버리고개에 가서 호랑이를 사냥하였다.
그러나, 명종 때에도 양근에서 30여 명이 해를 입고
선조 때에는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의 호랑이가 횡행하여
400여 명이 피해를 입어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았다.
인왕산., 호랑이 & 범바위.
그리하여, 속설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는 말이 성행하였다.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부암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 홍제동 경계에.,인왕산.
인왕사(仁王寺)가 있던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개국 후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도,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인왕산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서 주목 받았다.
....................인왕산 필운대...........................
백사 이항복은 원수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이 있던 곳으로 유명.
인왕산 자락에서., 남쪽 끝 봉우리.
현재, 배화여고 배화여대 앞에 위치.
인왕산의 다른 이름.,필운산(弼雲山).
....................................................
"인왕산의 기운이 국운을 움직이는 힘."
"사람에 따라 그 기운이 움직인다는 산."
경복궁을 지을때 맞선.,정도전과 무학.
경복궁 주산을 인왕산으로 삼자는.,무학.
경복궁 주산을 북악으로 삼자는.,정도전.
정도전 :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라고 하면서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무학대사 :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과연, 5대 조선왕조 만에
세조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20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또,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
과연. 후궁의 서자인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사직골(사직동)..................
社는 토지신, 稷은 곡물신을 의미한 것인데,
토지신은 곧 국토를 주재하여 관리하는 신으로,
곡물신은 농작 풍흉을 좌우하는 신이라 보았기에
조선시대 종묘와 함께 사직은 가장 중요시하던 시설.
인왕산 아래 종로구 사직동 1- 28.
국왕이나 대신은 종묘 사직과 생사와
존망을 같이 할 의무를 느끼기도 하였고
사직은 국가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했다.
..............................................................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광해군은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 건축한.,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경희궁.
경복궁 서쪽, 사직단 북쪽에.,인경궁.
청와대 서쪽 지역에 있었다는.,자수궁.
인경궁은 이궁(離宮)으로 창건했던 궁궐로,
경덕궁(慶德宮)에 비하여 규모가 컸던 궁궐.
자수궁(慈壽宮)은 종로구 옥인동에 있던 궁궐.
..............색문동(塞門洞)..............
종로구 신문로2가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의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 사이에
세종 때 새로 세운 돈의문(敦義門), 즉 新門이
태조 때 서대문 격 서전문(西箭門)을 폐하고 막아
색문동 혹은 색문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곳이 신문 안인 광화문 방향의 새문안길 좌우쪽이므로
"새문안" "신문내(新門內)"라고도 불리웠던.,현재 신문로2가.
서전문(西箭門)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된다
서전문은 한양도성의 서쪽 활터에 위치한 문에서 유래.
........................................................................
한성의 '북문' 숙청문(肅淸門)은
1395년(태조 4)에 건립되었으나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쪽과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여 창의문과 함께 폐쇄.
.
원래, 숙청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험해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으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없어 사용할 사람이 없었기에
문을 폐쇄해도 아무 지장이 없어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나
숙청문을 열고 숭례문(남대문)을 닫았던 풍속이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여 사용되는 정도.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한다.
숙청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이전.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
1976년 문루를 건축 후, ‘肅靖門(숙정문)’ 편액을 걸었다.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
숙정문은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을
이에 대신해 흔히 북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도성 북쪽의 문은
한양 4소문(小門) 중 하나인 동쪽 동소문.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
동소문(東小門)이 곧, 혜화문(惠化門)
혜화문은 조선 초기부터 불리는 이름이다.
혜화문은 창경궁 동쪽에 낙산 성벽.,동소문.
............................
............................
창의문을 지나 세검정 쪽으로 가다
왼편 부암동 백사실계곡을 올라가면
안평대군이 머물던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은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 성문을 열어, 왕실 권세가들만 통행 가능.
현재,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1741년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현재, '창의문'의 조선시대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창의문(彰義門)은 종로구 창의동에 있는 성문(城門).
한성 성곽의 4소문(四小門) 중 하나로.,자하문(紫霞門).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인 출입금지.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던 성문.
하여, 창의문 밖 백사실계곡 '무계정사'와
수성동계곡 '비해당'을 소유했던 안평대군은
문종 재위 동안에 왕실 종친 중에서 실권자였다.
수성동계곡은
청계천의 상류.
청계천은 조선 태종 때 조성한.,개천(開川).
도성 안에서 종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물길.
즉, '종로 1가~6가' 한성 상권의 중심.,개천(開川).
.
수성동계곡 기린교 인근
안평대군 자택.,비해당 옛터.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문종 재위 때
조선의 실권자.
세종대왕의 18 아들 중에서
가장 왕재가 뛰어났던.,3남.
2남 '수양대군'과는.,라이벌.
인왕산 서편 수성동이 예술가 안평대군 공간이었다면
인왕산 동편 무계동은 그의 정치 야망이 꿈틀거렸던 공간.
수성동 비해당 집과 별장 무계정사를 오가며 야망을 키웠다.
막상 찾아가 보면, 근대소설가 현진건 집터.
조선 초, 안평대군이 여러 문사들과 교유한 곳.
방룡소흥(旁龍所興)의 땅에 지어졌다는 이유로 철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를 잇는다.'.,방룡소흥.
.............안평대군(1418~1453)..............
단종 즉위 후, 둘째형 수양대군과 권력다툼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세종대왕의 삼남.
어머니는 소헌왕후. 큰형은 문종, 둘째형 세조.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50년 문종 즉위 후. 조정 실력자.
1452년 단종 즉위 후,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투쟁.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 유배 이후 귀양지에서 죽었다.
안평대군 호는.,비해당(匪懈堂).
집은 인왕산 수성동 기린교 곁 인근.
왕기가 서린다는 명당 집터가.,비해당.
.....................................................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보았던
무릉도원을 지은 별장.,무계정사.
인왕산 부암동 백사실계곡에 위치.
조선시대 백석동천이.,오늘날, 백사실계곡.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현통사 입구.,백사실계곡.
......................................
'바야흐로 정신이 아른거리고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꿈에 박팽년과 봉우리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여러 갈래 길이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꺾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무릉도원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물은 돌고 돌아서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하였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넓은 마을이 나타났다.
2, 3리쯤 될듯한데 사방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도화 숲에 노을이 떠오른다. '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
정경이 소슬하여, 그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이에 나는 곁에 있던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 감탄.
산을 내려오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정묘년(1447년) 4월 무릉도원 꿈을 꾼 일이 있었는데
지난해 9월 우연히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칡넝쿨과 바위를 잡아 올라 이 아름다운 곳을 얻게 되었다. '
'이에 꿈에서 본 것과 비교해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
'그래서,
올해 들어
두어 칸을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걸었다. '
........................................................
안평대군이 꾼 봄날의 꿈은
무계정사란 건축물로 나타났고,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렸던 것.
'안견의 후견인'.,안평대군.
안평대군은 그림과 글씨, 가야금 등
예술 방면에는 못하는 것이 없는, 예인(藝人)
글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명나라 사신이며 학자인 예겸이 조선에 왔다가
신숙주(申叔舟)의 책 표지에 쓰인 범옹(泛翁)이란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신숙주는 글씨를 쓴 안평대군이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후라
머뭇거리가 강희안 글씨라고 둘러댔다.
예겸이 강희안의 글씨를 얻기를 간곡하게 청하자
신숙주는 강희안에게 몇 글자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예겸은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안평대군 글씨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명나라 황제가 그의 글씨를 보고 "매우 좋다.
이것이 조맹부 글씨다"라는 칭찬을 했다고 한다.
세종과 문종 연간에는 화원에게
5품 이상 품계를 주지 않는 것이 관례.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정4품까지 승진.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에는
근대문학 소설가 현진건이 살았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 중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로 6개월간 옥고.
직장을 잃은 그는 가족 생계를 위해 관훈동에서
이곳 부암동 무계정사 터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현진건은 양계장을 차려 호구지책을 도모
울분 때문에 밥보다 술을 더 자주 찾았다.
결국 이곳에서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생활고가 겹쳐 제기동으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장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계정사 터는
현진건이 떠난 뒤
폐가 모습을 그대로 간직.
안평대군의 정치적 구상이 좌절되고
왕재가 서려있던 그의 일장춘몽이 깨진 뒤
그 불행한 기운이 소설가에게 옮겨간 것일까?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이
마포에 지은 정자.,담담정.
안평대군이 이곳에 만여 권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다는.,담담정(淡淡亭)
중국배를 구경하고 각종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
이후, 신숙주의 별장이 된 곳.
훈민정음 창제 및 야인정벌 공로.
세조 재위 때 영의정 신숙주의 별장.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거주.
..............................
..............................
이방원의 책사 수장 하륜(河崙)은
궁궐터로 서대문 밖의 무악벌을 주장.
오늘날의 서교동, 연희동, 동교동 일대.
최규하(서교동), 전두환(연희동),
노태우(연희동), 김대중(동교동) 등
대통령 넷을 배출한 땅기운이 강한 지역.
무학대사는“인왕산이 주산이 되면
좌청룡 북악산, 우백호 남산을 거느린
궁궐(경복궁)은 자연스럽게 동향으로 건축
관악산이 내뿜는 불기운도 막아냈을 것이다.”
북악산 앞 경복궁과 청와대 터는
피비린내 끊이지 않는 기가 센 곳.
1398년 태조 7년 방원은 경복궁에서 정도전을 참살.
“정도전이 태조(太祖)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인 뒤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후 살해하려 했다” - 방원 -
인왕산에는 수많은 기자신앙과 토속신앙 상징들
그 흔적들이 어우러진 선바위와 호국도량 인왕사.
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자락.,인왕사(仁旺寺).
인왕사에서 유래된 지명이.,인왕산.
풍수 상, 조산 북한산에서 주산 북안산에 연결
낙산이 좌청룡이며,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는 산.
동쪽은 아늑하고 풍치가 빼어나 장안 제일 명승지.
북쪽은 무계동(武溪洞)이라 불리워
중국의 무릉도원에 버금가는 절경지대
조선 초 태조가 경복궁 수호도량으로 창건.
인왕사.
인왕사는 선바위ㆍ국사당으로 불리는
무불습합의 신앙지와 함께 특이한 가람.
5개종단 11개 암자 명칭이 하나의 인왕사.
선바위로 오르는 여정에 다양한 암자들.
인왕사가 500여 년에도 그랬듯이 현재도
경복궁을 수호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 개국 초에는 "서산(西山)"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에 걸쳐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인.,인왕산.
일제강점기 인왕산 표기를 인왕산(仁旺山)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
산 전체가 화강암이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
1993년 개방 전까지 군사상 출입통제 구역이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北岳)을 주산(主山),
남산을 안산, 낙산과 인왕산을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 조성.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
이를 배경으로 그린., 정선 작 '인왕제색도'.,유명.
인왕산을 등산코스는 5개이며
각각 두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고,
인왕산 종주하는데 3시간 정도 소요.
제1코스 사직공원 입구·약수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2코스는 사직터널·성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3코스 독립문역·인왕산 일주문·국사당·선바위·
철조망문·능선길·범바위·인왕천 갈림길· 정상·305능선·
기차바위· 인왕아파트 갈림길· 홍심약수·부암동사무소·하림각,
제4코스 사직공원·북악스카이웨이·국사당·
달팽이바위· 인왕산약수· 해골바위· 정상,
제5코스 경복궁역·자하문길·영추문·청와대 앞길·
청운중학교·최규식 경무관 동상·자하문·성곽길·정상.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독립문역, 홍제역
하차 후 사직공원에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
.........................
.........................
1616년(광해군 8)에 인왕산 기슭의 민가를 헐고
승군을 징발하여 자수궁과 인경궁(仁慶宮 : 사직동)·
경덕궁(慶德宮 : 훗날 경희궁) 등 세곳에 지었다는 궁궐.
풍수지리가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 등
인왕산왕기설(仁旺山王氣說)이 강력히 제기되자
광해군이 인왕산 왕기를 누르기 위해 창건한 3곳 궁궐.
당시 자수궁이 지어진 곳은
'오학의 하나' 북학(北學) 터.
인조가 반정한 뒤, 경덕궁만 남겨두고 인경궁과 자수궁을 폐지.
자수원(慈壽院)이라 이름을 고친 뒤 이원(尼院 : 僧房)이 되었다.
후궁 중 아들 없는 이는 이원에 들어 한때 5,000 여승이 살았단다.
.
그 뒤 1661년(현종 2)에 여승의 폐해가 심하여
부제학 유계(兪棨)의 상계(上啓)로 폐지시키면서
어린이는 환속, 늙은이는 성 밖으로 옮기게 하였단다.
1663년 자수원의 재목으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을 세우고,
일량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단다.
.......................
.......................
조선시대 인왕산 자락에 건축했다는.,3곳 궁궐.
'옥인동 자수궁 & 사직동 인경궁. 경희궁.'.,옛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으며 그 위치는 어디였을까?
....................자수궁 터., 답사 루트....................
경복궁역~ 서촌~ 통인시장~ 세종마을 ~수성동계곡
~석굴암~치마바위~정상 ~선바위 & 국사당~ 독립문역.
세종마을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며, 조선시대 중인 마을.
...............................................................................
치마바위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인왕산 석굴암 & 마애미륵불.
마애미륵불 곁.,석굴암.
인왕산 석굴암
그 아래로 10분 쯤 내려오면
청계천 상류.,수성동계곡이다.
그 아래 있는 옥인동 자수궁 터.
현재, 조선시대 자수궁 터는
그 흔적 조차도 찾을 수 없다.
옥인동.,자수궁 터.
옥인동 동명은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옥동과
인왕동에서 첫 글자를 합성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
옥류동천(玉流洞川)은 인왕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백운동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현재 대부분 복개.
상류는 수성동계곡, 하류는 옥류동하류(玉流洞下流).
동국여지비고에는 옥류동하류가 옥류동수(玉流洞水).
옥인동 168번지에서 누각동천이, 누하동 71번지에서
옥동(玉洞)의 물이 합쳐져, 현재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남쪽에서 백운동천과 합하였다는 계곡이.,옥류동 계곡.
우암 송시열의 글씨 '玉流洞'(옥류동)이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며, 이 일대에서 결성된
조선 중인 시사(시를 사랑하는 선비들의 모임)도
옥류동천의 이름을 따 옥계시사(玉溪詩社)라 하였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 옥계시사).........
인왕산 아래 옥류동(玉流洞)의 송석원에서 결성한
문학단체로 일명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한다.
주요인물은 맹주인 천수경을 비롯하여 장혼(張混)·
김낙서(金洛書)·왕태(王太)·조수삼·차좌일·박윤묵 등.
.
그들은 매일같이 천수경 거처 송석원에 모여 시문.
사대부계층에 비하여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신들의
신분적·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자포자기 심사를 읊은 시.
송석원시사 백전(白戰)은 전국적 규모의 시회.
1797년 '풍요속선'을 간행하여 '소대풍요'에 이어
위항인들이 정사년마다 시선집을 간행한 전통을 수립.
.
위항문학은 이 송석원시사의 융성함과 활발한 작품활동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아, 1818년(순조 18)까지 활동했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 기린교.
자수궁은 수성동계곡 아래 옥인동에 있었다는 궁궐.
자수궁(慈壽宮)은 '태조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의 장남.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던 궁이다.
태조 이성계가
계비 신덕왕후를
안장한 곳이.,정동.
태조 이성계와
계비 신덕왕후가
첫아들을 낳은.,궁궐.
태조가 정사를 편 곳은.,개성 수창궁.
한양 천도 후, 태조가 머문 곳은.,자수궁.
자수궁 외 한양에서 태조가 머문 궁은 없다.
경복궁이 준공되기 이전에
태조 이성계가 거주했던 자수궁.
자수궁은 한양 최초의 궁이 아닐까?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운명한.,민씨부인.
기록 상으로, 태조의 정비는 '민씨부인'이지만
사실 상으로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정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 한 이후
정동에서 이장된., 신덕왕후 정릉.
이방원은 민씨부인의 소생이며.,5남.
이방원은 즉위 후, 민씨부인 어머니를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로서.,기록.
종묘에 생모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격상한 것.
하여, 자수궁에 관한 기록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태종 즉위 후, 상당 부분이 멸실.
.......................수성동계곡.................................
2010년 10월 21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
수성동계곡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여름 휴양을 즐기던 곳.
겸재 정선 작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등장하는.,수성동.
수성동계곡은 종로구 옥인아파트 자리에 복원.
계곡 길이는 약 190m이고, 폭은 4.8∼26.2m이다.
하류에는 옛모습의 기린교 돌다리 1기가 남아 있다.
수성동은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
인왕산 아래 첫번째 계곡으로 ‘물소리가 유명.
하여, 수성동(水聲洞)계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성동 ‘동(洞)’은
골짜기를 의미한다.
조선시대 인왕산 물줄기는 크게 나누어 수성동과 옥류동.
두 물줄기가 기린교(麒麟橋)에서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유입.
현재, 옥류동천 계곡은 콘크리트로 덮히고 주택가로 변하였다.
기린교 위 수성동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비해당' 옛 집터.
현재, 수성동계곡은 아파트 철거 후에
옛 모습을 되찾아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
무안군은 동생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후, 자수궁에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던 궁.
이때부터 왕이 죽으면 후궁들을 거처.,'자수궁'
이곳은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어 살았던.,여승방.
먼훗날, '명나라 여인' 굴씨 부인이 살았던 곳이다.
...................
...................
조선 개국 초, '태조의 7남' 무안군 방번(芳蕃)의 집.
방번은 태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신덕왕후 맏아들로
태조 이성계가 인왕산 아래에 살 집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하기 전에 무안군은
'공양왕의 동생' 왕우(王瑀)의 딸과 혼인했다.
왕우는 이성계의 사돈이었기에
고려 말, 왕씨 일가가 몰살 때 생존.
그러나 이것이 무안군에게는 걸림돌.
조선 건국 초기에
태조의.,즉위교서.
"왕씨 후손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와 동복들은 그전과 같이 한곳에 모여 살게 할 것이며,
소재 관사에서 힘써 구휼하여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
그리고,
왕우 아들
조(蟇)와 관(琯)
성씨를 외가를 따라
노(盧)씨로 바꾸게 한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첫째 아들 무안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마음으로.,적극 추천.
그러나,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반대.
무안군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한 탓이었다.
표면 상, 무안군의 성격을 탓했지만,
사실 '공양왕의 동생' 왕우를 견제한 것이다.
하여, 1392년(태조 1년) 세자가 된.,방석(의안군).
결국 무안군은 장인 왕우 때문에 세자가 되지 못했다.
1394년 왕우가 왕씨 모반 사건에 연루되자,
신하들은 다음 해까지 왕우 삼부자(조 · 관)를
귀양 보낼 것을 간언하나 태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 무안군이 병이 들자,
태조는 윤 9월과 윤12월에
무안군 집에 거둥하여 문병.
1397년 왕우가 죽고, 무안군은 다음 해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김포 통진으로 유배 가던 중
양화도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 유숙하여 있을 때
'방원의 형' 방간이 보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당시 양화도는.,현재 여의도.
훗날, 방원의 윗형 회안군 방간은
이방원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고
권좌를 욕심 내다가 죽임을 당한다.
1399년(정종 1년) 태상왕이 된 태조가
무안군의 옛집으로 거처를 옮기려 했으나
조정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기에 무산되었다.
무안군은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었으나,
1437년 세종이 5남 광평대군을 무안군 후사로 정했다.
광평대군은 전해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했는데
세종은 아들이 나가 살 집을 보제원 북쪽에 짓고,
이곳에 무안군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게 했다.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이
제사를 모시다가 20세에 죽고,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이 모셨다.
영순군은 남천군, 청안군, 회원군을 두었고,
광평대군파는 계속 무안대군의 제사를 모셨다.
무안군은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의 상소로
신덕왕후를 종묘에 모시고 난 후, 1680년(숙종 6년)에
사후 282년 만에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어 대군이 된 것이다.
1695년에 세운 '무안대군이헌신도비'에 의하면
처음에 통진의 능동(김포 대곶면 대능리)에 안장.
1442년 실록에 의하면.,광평대군 사후 묘를
학당리 언덕으로 이장하고 과천에 사찰을 건립.
...............1442년 실록..........
"무안군의 아내 왕씨가 호소하길,
'통진현에 있는 '재암(齋庵)'은
병진년(1436년) 다시 지은 것인데,
지금 또 독촉하여 부수라고 합니다."
"과천에 절을 짓는 것은 태조가 무안군의 묘 옆에
재찰(齋刹)을 창립할 것을 명하여 명복을 빌었는데,
지금 그 묘를 옮겼으니.", "이 절은 세운 지가 벌써 3년.,"
...........................................................................
무안군과 혼인한 부인 왕씨는
경녕옹주(慶寧翁主)에 봉해졌는데,
이들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1420년과
1422년(세종 4년) 경녕옹주가 빈전(殯殿)
즉,'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에 제사.
왕씨는 이 시기에 왕실에 출입할 정도가 되었고,
1437년 남편 제사 및 묘 이장 후 1449년에 죽는다.
그러나, 1474년(성종 5년) 이곳이 성종 능침으로 결정.
광평대군묘와 무안대군묘는 광주(강남 수서동)으로 옮겼고,
그 아래 영순군 아들 삼형제가 집을 지어 삼궁(三宮)이라 했다.
이때부터 '궁말' '사당말'로 불리운
궁말에는 700여 개의 묘소가 있었는데,
1981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8호가 되었다.
1994년 강남구 일원동 광평로 205(수서동 739-1)에
안채와 사랑채는 광평대군의 19대손 이병무(李炳武)가
해체 복원후 1999년 한정식집 '필경재(必敬齋)'로 태어났다.
세종의 5남 광평대군파.,종가
고급 한정식집으로 된.,필경재.
조선 초, 고려제도를 따라 무안대군 부인은 경녕옹주.
그리고, 후궁은 조선 세종 때까지 옹주나 궁주로 불렀다.
세종 때 내명부와 외명부에 대한 칭호법이 확립되어
왕의 본궁은 비(妃), 후궁의 가장 높은 자리는 빈(嬪),
정비에게서 난 딸을 공주, 후궁의 딸을 옹주라고 했다.
고려 후기에는 왕의 딸을 공주라 불렀고,
후궁이나 대군 부인을 옹주나 궁주로 불렀다.
공주 유래는 중국에서 왕의 딸을 시집보낼 때
삼공(三公)이 혼사를 주관했기에 '공주'라 불렀다.
문종 때던 무안대군 궁을 세종의 후궁 거처로 사용.
세종은 후궁을 5명 두었고 세종 승하 후 즉위한 문종은
선왕의 후궁들이 살 곳을 이곳에 마련해 '자수궁'이라 했다.
자수궁은 왕의 후궁들이 궁궐을 나왔을 때 거처하던 궁이었다.
세종의 후궁 중
신빈 김씨는 아들 6명을 ,
혜빈 양씨는 아들 3명을 두었다.
특히 내자시(內資寺) 여종으로 궁궐에 들어와
소헌왕후 시녀로 있다가 승은을 입은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가 뒤늦게 낳은 어린 영응대군을 키웠던 곳.
세종은 신빈 김씨가
영응대군과 함께 살기를 바랐으나
세종 사후에 자수궁에서 여생을 마쳤다.
혜빈 양씨는 따로 살 집을 마련하는데,
사헌부에서 문종에게 부당하다고 반대했다.
이에 문종은 선왕의 후궁을
자수궁에 같이 있게 하는 게 마땅하지만,
혜빈 양씨가 본래 병이 있고 숙부 상을 당한 뒤라
병이 중해져 아들 영풍군의 집 곁에 스스로 집을 하나 샀는데,
자신이 두어 간 집을 짓게 해서 편히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종 때 연산군 생모가
폐비가 되어 잠시 살았고
세조와 예종의 후궁이 살았다.
그리고 세조 후궁 귀인 박씨를
근빈으로 삼아 자수궁에 옮기고
이름을 '창수궁(昌壽宮)'이라 했다.
근빈 박씨 아들 덕원군은
어머니가 늙고 지병이 있어
시중을 들 수 있도록 집에 모시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자수궁에 거처하던 선대왕의 후궁들을
문종의 후궁들이 살던 수성궁으로 옮긴 다음
이곳을 '회록각(會祿閣)' 여인들의 거처로 삼았다.
즉, 연산군이 자신과 동침한
여인들을 살게 했던.,회록각.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를 폐비시키는데 가담한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의 직첩을 빼앗고 궐에서
내쫓았다가 직첩을 도로 주어 자수궁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선왕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을 반대.
'모두 머리를 기르게 했고, 모두 한 궁에
머물게 했으며 고기를 먹게 했다.'고 전한다.
명종 때에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를 크게 일으켰고, 1554년 자수궁 내에
종루와 나한전을 지어 문제가 되자 공사를 중단.
.
1563년 또 다시 자수궁을 새로 크게 지었고
재(齋)를 올리고 부처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효종 때에는 자수궁에 굴씨(屈氏) 부인이 살았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돌아올때 청나라 인질이었던 궁녀와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
그 궁녀 중 굴씨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황후의 궁녀.
숭정황제와 황후는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자살.
.
황후를 모시던 굴씨도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황후가 말려 목숨을 부지.
굴씨는 청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혔고,
사령관 예친왕(睿親王)에게 넘겨졌지만
예친왕은 그녀 미모에 반해 죽이지 못했다.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 온 굴씨는
인조 계비 장렬왕후 궁녀가 되었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계획하자
굴씨는 명나라 광복을 고대하며 여생을 보냈다.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해
세자빈마저 사사되었으며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된다.
첫째 경선군, 둘째 아들 경완군은
혼인도 못한 채 제주도에서 죽었고,
셋째 아들 경안군 만이 살아 남았다.
경안군은 1650년(효종 1년) 강화도, 교동도 유배
1659년에 가서야 유배가 풀려 경안군에 봉해졌다.
경안군은 청나라 선양에서 태어났고,
굴씨는 살아남은 경안군을 끝까지 보필.
그래서 경안군의 후손들이 일흔의 나이에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굴씨를 유언에 따라
'한양~만주' 길목(고양시 대자동)에 안장했다.
경안군묘 근처에 묻힌.,굴씨부인
"서쪽 근교의 길에 묻어 달라" - 유언.
그러나, 죽어서라도 조선왕의 군대가
청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 그녀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3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경안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그 아들인 임창군의 묘,
그위에 있는 묘가., 경안군과 부인 허씨의 합장묘,
그 아래 있는 것이 임창군과 부인 박씨의 합장묘다.
조선 말기까지 궁에서 나온 궁녀들이
굴씨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그후,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을 지경.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 관계자에게 굴씨 이야기를 듣고,
그 묘를 찾아 단장하라 지시하여 묘역정비 및 진입로 개설.
현재,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을 뿐 안내판 표지석도 없다.
통일로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대자동 필리핀참전기념비 앞에서
대양로로 우회전하여 가다가 좌측에
정원식당(구 대자동 555번지) 뒤에 위치.
2001년 경안군 집안에서
'소현세자 청국심관시녀 굴씨지묘'
비석을 새로 세우고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현종 때에는 선조의 은혜를 받은 상궁 박씨가 늙어
의지할 데가 없자 자수궁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궁들이 살지 않아 1661년에는 자수궁을 없앴다.
왕의 위패는 정결한 곳에 묻었으며
40세 이하 여승은 환속시켜 결혼을 허락.
의지할 곳 없는 여승은 성밖 승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송준길의 주청으로 이곳에
5부 학당(동학, 서학, 남학, 북학, 중학)
그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이곳에 설립했다.
그러나 북학은 근처 중학(中學)으로
학생들이 몰리자 운영이 어려워져 폐지다.
명종 때 불교식으로 넓혀진 자수궁을 헐어내면서
자수궁 목재 기와를 봉은사에 주려하자 신하들이 반대
1664년에는 자수궁을 허물 때 나온 자재를 성균관에 내려
학사(벽입제, 闢入齊))를 수리, 영조는 비천당(丕闡堂)을 건립.
................비천당..........................
자수궁 건물에서 나온 목재로 지은 건물
성균관대학교 내에 있으며 6.25때 소실되어
1988년 복원되었으며 성균관의 별관 건물로
조선시대 학업을 하고,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
............................................................
1886년(고종 23년) 계동에 있던
경우궁이 자수궁터로 옮겨왔다.
그리고 22년 후
1908년 경우궁을
육상궁에 합사(合祀).
이듬해 늦여름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자수궁터에 격리병원, 경성피병원을 설치.
1911년에 '순화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순화병원은 6 .25 때 전염병 격리병원으로 사용.
그후 '시립중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7년 시립중부병원과 남부병원을 통합하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여 '서울의료원'
서울의료원은 2011년 서울 중랑구 신내동으로 옮겼다.
1456년 자수궁에 불이나, 이후 중건했는데
원래 자리를 피해 조금 아래로 옮겨 지었다.
옮긴 자수궁 위치는
성종 때 기록에 있다.
"자수궁 앞에는 큰 냇물이 있어
도랑이 넘치면 더러운 물이 뜰에 차고
지형이 낮고 습기가 차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번번이 넘쳐 뒷간의 오물이 뜰 안으로 흘러 모인다.
이 때문에 1493년 처음의 자리로 옮겼다.
종로구 옥인동 19번지.,이완용의 옛집 터.
1913년 이완용 집은 순화병원과 나란히 위치.
원래, 자수궁 자리보다 아래쪽이었을 것.
백운동천(白雲洞川)은 현재 자하문로로 복개.
복개 전에 비가 오면, 근처의 도랑이 넘쳤을 것.
그렇다면 옮겨 지은 자수궁이
이완용의 집 부근이 아니었을까?
자수궁터로 추정되는 종로구 필운대로 68
'구 옥인동 45번지'에는 현재, 군인아파트.
옥인동 45번지 면적은 약 2만 4,661㎡(7,460평).
일제강점기 옥인정 45번지 1호와 규모가 비슷하다.
자수궁 흔적으로는., 자교(慈橋, 자수궁교)가 있었다.
'사직로~자하문길' 자하문로 16길과 17길 사이에 위치.
1927년 하천 복개 공사를 하면서 사라졌다.
1939년 '경성토목건축협회보' 자수궁교 사진.
.........자수궁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옛 자료에 남아있는 그 흔적.
자수궁교는 자수궁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
자수궁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옥인동 45번지.
군인아파트, GC남촌리더십센턴, 옥인파출소, 옥인변전소,
부국상사, 종로구보건소, 청윤효자동자치센터, 개인주택 등.
지금은 근처에 자교교회가 있어 자수궁 흔적을 대변해줄 뿐이다.
.
세종대왕이 후궁들을 거처하게 하였던 자수궁(慈壽宮)
예전에는 태조의 7남 무안군 방번(신덕왕후 소생)의 집.
따라서 자수궁은 무안군의 고제(故第)를 그대로 수리 사용.
무안군은 태조가 세자로 삼았던 제8왕자 방석(芳碩)과 함께
태조의 사랑을 받던 왕자라 경복궁 서쪽 옥인동에 집을 하사.
'왕자의 난' 이후 50년 지난 후에도 자수궁이라 불리웠던.,궁전.
그후 5년을 지나 세조 2년(1456) 12월
자수궁에 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타버려
거처하던 궁인들은 경복궁으로 이입(移入).
추운 겨울밤에 불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대신 중신들이 모두 모여 불끄기에 노력.
자수궁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세조 7년 4월에는 왕이 왕후와 함께 자수궁에 거둥.
세조 2년 화재 후 자수궁은 중건되고 세종조 후궁들이
전과 같이 이곳에 거처하였음을 기록 상으로 알 수 있다.
세조 2년 화재 후 중건 때에는 건물이 전소된
그 자리를 피하여 근처의 다른 자리로 옮겨 건축.
30년 후, 성종 24년(1493) 자수궁은 지세가 낮고 습하며
장마철 냇물이 뜰까지 넘쳐 선왕 후궁들이 거처하기 곤란.
다시 예전 자리로 옮겼다가 연산군이 황음행락을 자행할 무렵
선왕의 후궁들을 모두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집으로 옮긴 다음
연산군의 여인부대 거소로 궁이 아닌 회록각(會祿閣)으로 고쳤다.
그후 명종 즉위와 함께 다시 자수궁은 개수, 증광(增廣).
역대 선왕의 후궁들이 불우한 여생을 보내는 곳.,자수궁.
후궁들의 독경(讀經) ·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당시 크게 불사(佛事).
자수궁 중건 & 후궁들의 불교신앙도 공인되었다.
궁(宮) 경내에 불사식(佛寺式) 종루와 나한전(羅漢殿).
명종 9년(1554)부터 18년까지 10년간 자수궁을 중창 증축.
자수궁과 비슷하게 쓰여지던 궁전으로는.,인수궁(仁壽宮).
'인수' 궁명은 태종 때 인수부(仁壽府)에서 출발한 것이며
중종 때 궁인 또는 후궁들 중 질병인(疾病人)들의 거소였다.
인수궁도 명종 조에는 수리 확장을 보았으며
인근 정업원(淨業院) 이사(尼舍)까지 중건 확장.
성종 3년(1472) 덕종 별묘(別廟)를 후원에 지은 연경궁.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 용(瑢)의 옛 집 수성궁(壽成宮, 聖)
그중 연경궁은 성종이 형님 월산대군 정(崎)에게 하사.
연산군 11년(1505)에는 탕춘대 이궁의 영건이 있었다.
연산군이 황음연락(荒淫宴樂)을 즐겼다는.,탕춘대 이궁.
인경궁(仁慶宮)
조선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었던 궁궐.
인경궁은 경희궁에 비하여 규모가 큰 궁궐.
'인경궁'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을 광해군 때 복구.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풍수설을 믿고
불길하게 생각하여 창덕궁으로 이어(移御)를 망설였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交河)에
신궁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 뒤,
1616년 성지(性智)라는 승려가 풍수지리설을 들어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므로 이곳에 궁전을 지으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주장하자 이 말에 따라 이곳에
궁터를 잡게 한 뒤 그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사 중에 새문동(塞門洞 : 종로구 신문로)에
왕기(王氣) 설이 나돌자, 광해군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궁궐을 짓게 한 것이 경덕궁(慶德宮, 또는 경희궁)이었다.
이에 따라 인경궁 공사는 중단되다시피하여
1621년부터는 본격적인 공사가 계속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건설공사는 중지되었다.
병자호란 뒤 1648년(인조 26)에 청인(淸人)들의 요구로
홍제원(弘濟院)에 역참(驛站)을 만들 때 청 사신들의 숙소
등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하여 인경궁과 태평관의 건물을 허물어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였으므로, 인경궁 자취는 사라지게 된 것 같다.
선왕들의 후궁(後宮)들이
거처하는 수성궁(壽聖宮),
자수궁(慈壽宮) 남쪽에 지은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은
1616년 인왕산 왕기를 누르기 위해
서궐(西闕) 경희궁(慶熙宮)과 남북으로
이어서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창건되었다.
인경궁에는 정전 흥정전, 편전 광정전,
내전 청와전, 흠명전, 화정당이 있었고,
이때, 단절된 청기와 굽는 기술을 되살렸다.
조선 16대왕 인조(仁祖)는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해 창경궁으로 이축.
인경궁은 영조 때 완전 철폐되었다.
1630년(인조 8년)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인조는 인경궁에서
폐출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풍정(豊呈)을 거행하였으며, 인목대비는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昇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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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木覓山)· 종남산.·
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 열경산(列慶山)·
마뫼 등으로 불렸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남산, 인경산(仁慶山)'은
궁궐의 남쪽에 위치한 산을 의미한다.
고려시대 개경 수창궁 앞산 지명도 남산.
'인경궁(仁慶宮)은 자수궁에서
남쪽에 위치한 궁궐이란 뜻일까?'
앞으로 풀어야 할.,베일 속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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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慶熙宮)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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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23년)에 건립 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5대 궁궐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 하였다.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조선왕조 3대 궁궐.,경희궁.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
5대궁 중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 울창한 수림이 보전되어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경희궁'에서 유래하였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 '경덕(敬德)'과 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고친 것.
경덕궁터는 인조 아버지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길 꺼리고,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짓다가 정원군 집 왕기 풍수설을 믿었다.
광해군은 그 왕기를 누르기 위해 그의 집을 빼앗아
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경덕궁을 건축.
1623년 인조 반정으로 폐위되며 경덕궁을 쓰지 못한.,광해.
인조가 즉위한 뒤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이곳 경덕궁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
숙종, 영조, 순조가 승하하였던.,서궐(西闕).
새문안대궐, 야주개대궐, 새문동대궐 등으로 불렸다.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다.
일제가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궁궐의 서쪽에 세우면서, 경희궁의 많은
전각들은 헐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현재, 동국대학교 법당 정각원으로 사용.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건되어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때 폐사되고,
신라호텔 정문이었다가, 1988년 계양문(남문)로 이전.
흥화문 본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이다.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 서울중ㆍ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 강남이전때 현대건설에 매각.
그뒤 서울특별시에서 터를 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해 복원공사는 중지되었다.
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 건립.
또 다시 원형이 훼손되었다.
창건당시의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
모두 경희궁지였으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013년 1월, 서울특별시청과 종로구청은
'경희궁지 복원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
정문인 흥화문을 원위치로 복원하며,
방공호 철거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 철거후 흥정당 복원.
성곡미술관 궁장을 포함 경희궁 궁장 일부 복원.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
궁지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된다.
경희궁 배치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는 점.
정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나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흥화문(興化門)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
일제 강점기 박문사(현재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려 일제가 이전해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 승하시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일곽은
남향 경사지에 축대 조성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고
그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 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건물.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고 있다.
현 위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공사 후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에 상월대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자정전은 서궐도안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태령전은 발굴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 자정전과 숭정전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
2000년 복원한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
황학정은 원래 경희궁에 있었던 정자로
고종황제가 청-일-러 3국의 3파전을 근심해
이곳에서 활을 쏘며 피로를 풀었는데, 일제 때
팔려나가 현재 사직공원의 옛 등과정 자리에 있다.
황학정(黃鶴亭)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조선 말 정자.,황학정.
1898년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의 회상전(會祥殿)
북쪽 궁장(宮墻) 가까이에 궁술연습을 위한 사정(射亭).
1922년 일본사람들이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 때,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한말에 도성 안 서쪽에 5사정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
옥동(玉洞).,등룡정(登龍亭),
삼청동.,운룡정(雲龍亭),
사직동.,대송정(大松亭),
누상동.,풍소정(風嘯亭),
필운동(弼雲洞).,등과정(登科亭).
사직동.,황학정
현재, 황학정이 서 있는 자리는 원래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
오사정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버린 현재
황학정에서는 때때로 궁술행사가 거행되어
조선시대 옛 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경희궁 반공호..........................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 터에 만든 방공호.
방공호 건설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 근로보국대 학생이 동원.
서울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
.....................................................
경희궁(慶熙宮)은 숙종과 경종이 태어난 곳이며
'숙종 영조 순조 인현왕후 인선왕후 인경왕후' 승하.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한 곳이며, 조선 후기 270년 동안
조선왕조 정치사에서 중심무대였던 중요성을 간직한 궁궐.
그래서, 창덕궁과 창경궁을.,동궐.
경희궁을 서궐이라 불렀던 곳이다.
1617년(광해군 9년) 착공하여
1620년 완공한 조선후기 궁궐.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이자 차남.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되어
1608년 행궁인 경운궁에서 등극.
1615년 4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자신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이 사는 새문동
현재, 신문로 2가에 왕기가 서려있다고 하여
그 집을 몰수하고 지은 경덕궁이 훗날.,'경희궁'
광해군은 그후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인조)에
의해 폐위되어 권좌에서 쫓겨난다.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능양군은
당시 인목대비가 기거하고 있던
경운궁에서 즉위하여 인조로 등극.
인조는 재위 동안
창덕궁과 창경궁을
법궁으로.,사용한다.
경덕궁은 인조 이후로 철종 때까지
10대 왕이 머물며 정사를 펼친 곳이다.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고
숙종 때부터 헌종 때까지 대부분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하거나 승하하였던.,경덕궁.
1766년(영조36년)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궁이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慶熙)로 고친 후.,현재, 경희궁(慶熙宮)
고종 초, 경복궁을 중건하고 임어하자
경희궁은 왕이 임어하지 않는.,빈 궁궐.
경희궁은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한 후
순조가 왕이 되는 융희 연간에 급속히 훼손.
일제에 의해 전각 대부분이 헐리고
일본인 거류민단에서 통감부중학교 건립.
훗날 경성중학교가 되고 서울고등학교가 된다.
그러면서 경희궁은 면적이 절반으로 축소되고
면적의 일부는 매각되면서 건물들도.,매각 처분.
1920년대 경희궁 회랑을 제외하고 건물 대부분 소멸.
그로부터 경희궁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1984년 서울시가 이 터를 매입
금천교 홍화문 숭정문 숭정전
자경문 자경전 회랑 태경전.,복원
경희궁 터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었다.
흥화문은 제자리 아닌.,박물관 주차장 정문 격.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가 세운 절
남산 박문사 정문으로 쓰려 옮겨갔다가
1988년 장충동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현재 위치로 옮겼으나 원래, 구세군빌딩 자리.
금천교도 복원은 되긴 되었지만
원래, 흥화문이 앞에 있어야 하나
현재 역사박물관 동쪽 입구에 있다.
숭정전은 원래 조계사에 팔렸다가
동국대학교 구내로 옮겨져 현재는
정원각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황학정은 1899년(광무3년)
경희궁에 세웠던 사정.
현재, 사직동에 있다.
황학정 현판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 휘호.
첫댓글 선경나라님 덕분에 오늘도 우리나라 역사에 얽힌 사연들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모든 일이나 장소에는 이렇게 많은 사연들이 있을 둘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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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사직공원~ 황학정~ 석파정.,인왕산 종주코스.
독립문역~인왕사~ 치마바위~세종마을.,인왕산 횡단코스.
즐겨 다니다보니, 관심이 깊어 집니다. 덕담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