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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勃海)는 사막(沙漠)으로 이어지고, 갈석산(碣石山)은 높고 높아 [13-4편]
옛 조선(朝鮮) 강역(疆域), 유라시아(Eurasia)를 넘나들다.
2022년 03월 20일
○ 『갈석(碣石)』과 『갈석(渴石)』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물론(勿論) 글자가 다르다 보니 “각각(各各)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즉(卽)
(1)“갈석(碣石)”은,
➊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접경(接境)의 진황도(秦皇島)【명(明) 때의 산해위(山海衛)=산해관(山海關)】에 있는 산해관(山海關) 아래 ‘발해(渤海) 바닷가에 우뚝 선 바위(碣)’를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➋ 또 하나의 갈석(碣石)은, 「고전(古典) 원전(原典)과 조선왕조(朝鮮王朝)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말하고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갈석(碣石)’」이라고 표현(表現)하고 있으며, 또 “하수(河水)가 갈석산(碣石山)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2)“갈석(渴石)”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규수(嬀水)【아무다리아 강=Amu Darya 江】로 흘러드는 “제라프샨강”【Zeravshan, R=나밀수(那密水)=뉴밀수(忸密水)】남안(南岸)의 도시(都市) “사마르칸드”【Samarkand : 소그드어로 ‘돌(石) 요새(要塞)’ 또는 ‘바위 도시’라는 뜻이며, 몽골어(Самарканд)로는 ‘밤 바위’ 또는 ‘딱딱한 바위’를 뜻한다고 한다.】의 서남(西南)에 있는 성(城)의 이름이며, 관문(關門)은, “철문관(鐵門關)”이라는 이름으로 유명(有名)한 곳이다.
이 갈석(渴石)의 ‘갈(渴)’자는 “목마를 갈(渴)” 자(字)를 쓴다. 즉 사막지대(沙漠地帶)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원전(原典)을 보면 :
지봉유설(芝峯類說) 卷二,諸國部,外國 : 《渴石.在撒馬兒罕西南.城周十餘里.四面水田.故元駙馬居也.山多奇樹.有石峽.兩壁懸崖.宛如斧劈.行二三里.出峽口有門.謂之鐵門關.岑參使交河郡詩曰.鐵關控天崖.萬里何遼哉.卽此也. : 갈석(渴石)은, 살마아한(撒馬兒罕) 서남(西南)에 있는데, 성(城)주위가 십여(十餘)리이며, 사방(四方)이 수전(水田)이다. 옛 원(元)나라의 부마(駙馬)가 살던 곳으로, 산에 기이한 나무가 많고, 돌로 이루어진 골짜기가 있는데, 양쪽 벽이 낭떠러지(懸崖)로, 마치 도끼로 쪼갠 것과 같다. 2, 3리를 가면 나가고 들어오는 문(門)이 있는데, 철문관(鐵門關)이라고 말한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渴石 :《鐵門峽在渴石城之西.懸崖絕壁,高數十仞,徑路崎嶇,深二三里.蕃人守此.亦名鐵門關. : 갈석(渴石) : 철문협(鐵門峽)은 갈석성(渴石城)의 서(書)쪽에 있는데, 낭떠러지 절벽으로, 그 높이가 수십(數十)인(仞)【60-80m】이고, 산이 가파르고 험하여(崎嶇) 지름길을 지나는데, 그 깊이가 2, 3리나 된다. 번인(蕃人)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 이름이 철문관(鐵門關)이다.》라고 하였다.
【살마아한(撒馬兒罕) :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사마르간드(Samarkand)’라고 한다.】
(3) 여기서 한 가지 부언(附言)해야 할 것은, ‘명(明)나라 때의 산해관(山海關)’은, 본시(本是) “유관(渝關) 또는 투관(渝關)”이었다고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설명(說明)한다. 뭔가 이상(異狀)하지 않은가?
왜 사가(史家)들은, ‘유관(渝關)=투관(渝關)’을 “느릅나무 유(楡)”자로 바꿔치기해 ‘유관(楡關)’이라고 한 것일까?
‘유(渝)=투(渝)’는 ‘변하다. 넘치다’는 뜻이고, ‘유(楡)는 느릅나무’를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뜻이요, 그 대상(對象)이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사가(史家)들은, 이를 바꿔치기해 “유(渝)=투(渝)”를, ➨“유(楡)”로 만들어버렸다.
‘유(渝)=투(渝)’는, 또한 본시(本是) 사천성(泗川省) 파현(巴縣)의 ‘땅이름 자(字)’이다.
➤➤➤ 즉(卽)‘유관(渝關)=투관(渝關)’은 ‘진(秦)의 유관(楡關)’, ‘명(明)의 산해관(山海關)‘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었다.」는 뜻일 게다!
이걸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이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면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접경(接境)지대의 ’진황도(秦皇島)‘【진황도(秦皇島)는, 후대(後代) 사가(史家)들이 만들어 놓은 지명(地名)이다.】에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➊ 유관(楡關)은, 〈시황(始皇)의 명(命)을 받은 몽념(蒙恬)과 40만 대군(大軍)이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요새지(要塞地)였고, ‘느릅나무(楡)’로 요새(要塞)를 만들었고, 사막지대(沙漠地帶) 또는 막막(邈邈:漠漠)한 평원(平原)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길가에 느릅나무(楡)를 심어 이정표(里程標)로 하였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유관(楡關)은, 유림새(楡林塞)이며, 유엽(楡葉)이라고도 한다.』고 부언(附言) 설명(說明)까지 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그렇다면,
➋ ‘시황(始皇)’의 ‘진(秦)’나라는 어디에 있었길레,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언기(焉耆) 서(西)쪽 270 리에 ‘유림(楡林)’이 있는 것이며,
➌ 현재(現在)의 섬서성(陝西省) 북방(北方)에 ‘유림(楡林), 유관(楡關)’은 또 무엇이냐?
➍ 또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접경(接境)의 진황도(秦皇島)에 ‘유관(楡關)’이 있으며, 이게 ‘산해관(山海關)’이라는 이야기는 또 뭐냐?
➤ 그렇다면 본래(本來), ‘유관(楡關)’과 ‘유관(渝關)=투관(渝關)’은, 전혀 다른 지방에 있는 요새(要塞)였으며, 서로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없다는 것이냐? 하는 문제(問題)다. 원전(原典)의 기록(記錄)대로라면, “유관(楡關)”과 “유관(渝關)=투관(渝關)”은 관계(關係)가 없다.
➎ 또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유관(楡關)’은, ‘발해(渤海) 바다’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즉(卽) 바닷가(海岸)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내륙지방(內陸地方)’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卽)
舊五代史 外國 契丹 : 《契丹者,古匈奴之種也.代居遼澤之中,潢水南岸,南距榆關一千一百里,榆關南距幽州七百里,本鮮卑之舊地也.其風土人物,世代君長,前史載之詳矣. : 글란(契丹)은, 옛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으로, 대대로 요택(遼澤)지중(之中)에서 살았다. 황수(潢水)의 남안(南岸)으로, 남(南)쪽으로 유관(楡關)이 1,100리에 떨어져 있으며, 유관(楡關) 남(南)쪽으로 유주(幽州)까지 700 리 떨어져 있다. 본시(本是) 선비(鮮卑)의 구지(舊地)이다. 중략(中略).》하였다.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비롯한 옛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유관(楡關)’은 내륙지방(內陸地方)에 있었으며, “유관(楡關)으로부터 유주(幽州)까지 700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 그렇다면 “유관(楡關)이 산해위(山海衛)이며, 산해관(山海關)이며,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다.”는 설명(說明)은 뭐냐?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농간(弄奸)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는 것을 금방(今方)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유관(楡關)은 유관(楡關)이되, 유림새(楡林塞)가 될 수 있고, 유엽(楡葉)」도 될 수 있지만, 「유관(渝關)이나 투관(渝關)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結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에 이용(利用)되어,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과 함께 일조(一助)를 했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 ‘갈석(渴石)’은, ‘사마르칸드 서남(西南)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지세(地勢)는, 지금도 형태(形態)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을 보면 :
갈석(碣石), 갈석산(碣石山)
“갈석(碣石)”이란, 『‘갈석산(碣石山)’이라는 산(山)이 있어야 하고, 그 산(山)의 일부(一部)가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물가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이것을 빗대어 “갈석(碣石)”이라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갈석(碣石)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요녕성(遼寧省)과의 접경지대(接境地帶) 발해(渤海) 바닷가 산해관(山海關)【현재(現在)의 진황도(秦皇島)】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갈석(碣石)”을 찾는데, 중요(重要)한 것은, “첫째는 산해관(山海關)이며, 둘째는 갈석산(碣石山)”이다. 그런데 “산해관(山海關)”은, 명(明)나라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산해관(山海關)의 옛 이름은, ”유관(楡關), 또는 ‘유관(渝關)=투관(渝關)’ 또는 림유관(臨渝關)”이라고도 하는데, 한서(漢書)나 요사(遼史)에서는, 이곳에 ‘일천(一千)여인(餘仞)’에 달하는 림유산臨渝山)이라는 험준(險峻)한 산(山)이 있고, 그 산(山) 아래를 림유하(臨渝河)가 흐른다고 하였다.【인(仞)이란 길이를 나타내는데, 1인(仞)은 약(約) 8자로 2.40m를 말한다. 따라서 ‘일천여(一千餘)’ 인(仞)이라면 “약(約) 2,400-3,000m” 정도(程度)의 높은 산(山)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러나 위에서 설명(說明)했듯이, ‘유관(楡關)’과 ‘유관(渝關)=투관(渝關)’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문제(問題)다. 산해위(山海衛) 또는 산해관(山海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歷史) 기록(記錄)에 따른다면 : 〈‘유관(渝關)=투관(渝關)’은, 2,400-3,000m 정도나 되는 높은 산(山)이 있고, 이 산(山)의 계곡(溪谷)을 따라 흐르는 강(江)이 있는 곳, 그 어딘가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 “유관(渝關)=투관(渝關)”은, 곧 〈유관(渝關)=투관(渝關)=림유관(臨渝關)=림려관(臨閭關)〉이라고 하였으며, “림유지험(臨渝之險)”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림유산(臨渝山)’의 산세(山勢)가 매우 높고 험준(險峻)하여, 그 아래에 ‘림유하(臨渝河)’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요해(要害)의 땅(要害處)’이라는 것이다.
【본래(本來)는, 「‘유관(渝關)=투관(渝關)’=림유관(臨渝關)이고, 림유산(臨渝山), 림유하(臨渝河)」이어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이 이를 바꿔치기해 “유관(楡關)=림유관(臨楡關), 림유산(臨楡山), 림유하(臨楡河)”로 고쳐버렸다. 즉 「”渝“ 자(字)를, ”楡“ 자(字)로 바꿔 놓았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북경(北京) 동(東)쪽 발해(渤海) 연안(沿岸)의 진황도(秦皇島)인 산해관(山海關) 주변일대(周邊一帶)에, “림유산臨渝山)이니, 림유하(臨渝河)”니 하는 산(山)이나 하천(下川)은 없다. 즉(卽) 과거(過去)에도 없었고, 지금(只今)도 없다는 것은, 본래(本來) 그런 산(山)이나 강(江 : 河川)은 없었다.』는 뜻이다.
➤➤➤ 가징 중요(重要)한 ‘지형지리(地形地理) 측면(側面)’에서 이를 보면 : “오늘날 그곳에는 그러한 산(山)이나 하천(河川) 자체(自體)가 없다.”는 점이다.
… 수천(數千) 미터(m)나 되는 산(山)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 험산준령(險山峻嶺)의 산(山) 아래를 흐르고 있던 하천(河川)이 어느 날 없어졌다?
이건 사가(史家)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지명(地名) 이동(移動)을 시켰다.”는 뜻이다.
○ ‘갈석산(碣石山)’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발해(勃海) 바닷가’의 땅, 그 어디에도 “갈석산(碣石山)”이라는 산(山)은 없다.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 그 어디에도 갈석산(碣石山)이라고 불리는 산(山)은 없다.
(1) 史記 卷6 秦始皇本紀. ‘遼碣’: 《요갈(遼碣)이란, 요동(遼東)과 발해(勃海) 인근 갈석(碣石)의 별칭(別稱)인데, 일찍이 진시황(秦始皇)이 순수(巡狩)하다가 갈석(碣石)에 이르러 바위에다 공을 새긴 고사가 유명하다.》고 했으니, “갈석(碣石)은 우뚝 솟아오른 바위”를 말한다.
(2) 갈석(碣石) :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산(山)의 이름이다. 그 소재지에 대해서는 하북(河北)ㆍ열하(熱河) 등 여러 설이 있다. 또 그 줄기 중의 기둥 모양의 바위를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산(山)을 말하는 것인지, 큰 바위가 물 위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를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3) 계산기정(薊山紀程) : 《還澄海樓.東望渺靄之際.石峰嵬峨出水中.此是燕薊碣石云. : 도로 징해루(澄海樓)로 올라가, 동쪽으로 바라보니 운애(雲靉)가 아득한 저편에, 돌 봉우리가 물 가운데 우뚝우뚝한데, 이것이 곧 연계(燕薊)의 갈석(碣石)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4) 농암집 제4권 / 시(詩) 방어가(放魚歌) : 《碣石龍門一萬里 : 갈석(碣石)에서 용문(龍門)까지 일만 리 황하수(黃河水)와… …》라고 하였으니, 「이 기록(記錄)에 따르면 갈석(碣石)과 용문(龍門)은 1만리(萬里) 떨어져 있었으며, 황하수(黃河水)와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5) 백호전서 제2권 / 시(詩) 오언사운(五言四韻) : 《碣石傾天下 : 갈석산(碣石山)은 천하에 제일 높고》하였으니, 「갈석산(碣石山)은 매우 높은 산(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성호전집(星湖全集) 제27권 / 서(書) / 〔答黃得甫 乙卯 : 황득보에게 답하는 편지 을묘년(1735, 영조11)〕: 《古者河走碣石.豁無礙障.今河入於淮.而淮又入海. : 옛날에는 하수(河水)가 갈석산(碣石山)으로 흘러 드넓어서 장애가 없었는데, 지금은 하수가 회수(淮水)로 들어가고 회수가 다시 바다로 들어갑니다.》라고 하였으니,「갈석산(碣石山)으로 하수(河水)가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7) 海東繹史 속집 15권. 地理考) 15 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 갈석산(碣石山)
《晉太康地理志 :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始作)되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通典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이 산(山)에서 시작된다. 지금 살펴보건대, 장성(長城)은 동(東)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橫斷)하여 고구려(高駒驪)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고 하였다.
(8) 서하집(西河集) 제12권 / 서발(序跋) / 送文谷以書狀赴燕序[문곡이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는 것을 전송하는 서문] :《右沙漠兮左碣石.前長城兮後遼水.驅單車兮使萬里. : 오른쪽은 사막(沙漠)이요 왼쪽은 갈석산(碣石山)이며, 앞은 장성(長城)이요 뒤는 요수(遼水)로다. 단거를 몰아 만리(萬里) 사행길 가서》라고 하였다.
서하집(西河集)은, 이민서(李敏敍, 1633~1688)의 문집(文集)이다. 이 분은 후손(後孫)들에게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즉(卽) 〈右沙漠兮左碣石.前長城兮後遼水.驅單車兮使萬里. : 오른쪽은 사막(沙漠)이요 왼쪽은 갈석산(碣石山)이며, 앞은 장성(長城)이요 뒤는 요수(遼水)로다. 단거를 몰아 만리(萬里) 사행길 가서〉라고 하였으니, 21세기 오늘의 한반도(韓半島)인들은, 이런 선조(先祖)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9) 연행록(燕行錄) / 경진년(庚辰年, 1700) 2월 / 29일 계축(癸丑) / 《滄溟渤灪連窮磧, 碣石崢嶸枕大遼, 跋涉漸看家國近 : 발해(渤海) 큰 바다 넘실넘실 사막(沙漠)으로 이어져 있는데. 갈석산(碣石山) 높다랗게 요동(遼東) 벌을 베고 있네. 산 넘고 물 건너니 점차 고국이 가까운데》라고 하였다.
위의 ‘연행록(燕行錄)’은, 『숙종(肅宗) 25년(1,699) 11월 3일(정유)∼숙종26년(1700) 3월 20일(계축)에 돌아와서 복명(復命)한 사은겸동지사행의 부사(副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온,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선(姜銑, 1645~?) 의 사행기록(使行記錄)을 인용(引用)한 것인데, 이러한 연행기(燕行記)는, 특히 직접(直接) 가서 듣고, 목격(目擊)하고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 본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했다는 것에 있다.
위의 글 “(8)+(9)”의 특징(特徵)을 살펴보자.
➊ 〈右沙漠兮左碣石.前長城兮後遼水.驅單車兮使萬里 : 오른쪽은 사막(沙漠)이요 왼쪽은 갈석산(碣石山)이며, 앞은 장성(長城)이요 뒤는 요수(遼水)로다. 단거를 몰아 만리(萬里) 사행길을 갔다.〉는 것이며,
➋ 〈滄溟渤灪連窮磧,碣石崢嶸枕大遼,跋涉漸看家國近 : 발해(渤海) 큰 바다 넘실넘실 사막(沙漠)으로 이어져 있는데. 갈석산(碣石山) 높다랗게 요동(遼東) 벌을 베고 있네. 산 넘고 물 건너니 점차 고국이 가까운데〉라고 하였다.
➤➤➤ 특징(特徵)을 쉽게 이야기하면 : “연경(燕京)에 가려면 발해(渤海)와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나가야 한다.”는 뜻이고, 또 “사막(沙漠)에 들어가기 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는 뜻이며, 「발해(勃海)는 사막지대(沙漠地帶)와 연이어져(連) 있었다.」는 것을 확인(確認)시켜주며, 「갈석산(碣石山)도 높고 높은 산(山)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갈석산(碣石山) : 갈석산(碣石山)은, 고전(古典) 원전(原典) 기록(記錄)에서 존재(存在)하고 있으며, 또한 『조선왕조(朝鮮王朝)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말하기를 “갈석산(碣石山)”이 분명(分明) 있으며, 그들이 연경(燕京)으로 가는 여정(旅程) 길에 있었다.』는 것이다.
갈석주(碣石州)
○ 갈석주(碣石州) : 新唐書.地理志7.下.羈縻州.西域 【原文】: 《大汗都督府,以悒噠部落活路城置.領州十五.附墨州以弩那城置.奄蔡州以胡路城置.依耐州以婆多楞薩達健城置.犁州以少俱部落置.榆令州以烏模言城置.安屋州以遮瑟多城置.罽陵州以數始城置.碣石州以迦沙紛遮城置.波知州以羯勞支城置.烏丹州以烏捺斯城置.諾色州以速利城置.迷蜜州以順問城置.盻頓州以乍城置.宿利州以頌施谷部落置.賀那州以汗曜部落置.》
➤ 갈석주(碣石州) : 일반적(一般的)으로 보면, 갈석(碣石) 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주변일대(周邊一帶)의 땅의 고을 이름이어야 맞는 말이다.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 기미주(羈縻州) 서역(西域)편에서 이르기를 : 『갈석주(碣石州)는, 가사분차성(迦沙紛遮城)에 두었다』고 하였는데, “읍달(悒噠) 영내(領內)에 두었다” 는 것이다. ‘읍달(悒噠)’이란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아무다리아강 즉 규수(嬀水) 남안(南岸)에 있었던 왕조(王朝)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역(西域) 즉(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당(唐) 시대(時代)에 “갈석주(碣石州)를 설치(設置)했다.”는 것이다.
갈석(渴石)이 있었다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갈석주(渴石州)’가 아닌 「‘갈석주(碣石州)’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갈석(碣石)’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 일대(一帶)를 벗어날 수 없다. 이곳을 벗어나면 ‘중국사(中國史)’는 하루아침에 없어진다. 그만큼 중요(重要)한 지명(地名)이라는 이야기다.
➤➤➤ 이렇게 중요한‘갈석주(碣石州)’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까지 업무(業務) 협의(協議) 차 출장(出場)을 간 것일까?’ 웃기는 말들이다.
중요(重要)한 것은,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北京) 동쪽의 산해관(山海關) 바닷가에 갈석산(碣石山)이란 산(山)은, 존재(存在)하지 않았고, 물론(勿論) 지금(只今)도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 위의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곳, 즉 산해관(山海關) 주위(周圍)에 “갈석주(碣石州)”가 설치(設置)되었다면 백 번, 천 번 이해(理解)할 수 있고, 이해(理解)될 수 있는 역사(歷史) 기록(記錄)으로 인정(認定)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발해(勃海)’ 바닷가 진황도(秦皇島) “산해관(山海關)”은, 가짜다. 즉(卽)「20세기(世紀) 사가(史家)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歷史) 조작(造作)의 흔적(痕迹)으로 모조품(模造品)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유관(渝關)=투관(渝關)=림유관(臨渝關)=림려관(臨閭關)’도 없고, 림유산(臨渝山)과 림유하(臨渝河)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환경(自然環境)적 요소(要素)인 지세(地勢)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높고 높은 산(山)이나 하천(河川)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21세기(世紀) 사가(史家)들이 만들어 놓은, ‘모조품(模造品)’이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역사조작(歷史造作) 논리(論理)’를 파괴(破壞)하고, 제거(除去)해야 하는 것이다.
유관(楡關)은, 투관(渝關)? 산해관(山海關)?
○ 『유관(楡關)=투관(渝關)=림투관(臨渝關)=림여관(臨閭關)=림유관(臨楡關)』은, 명(明) 나라 때의 “산해관(山海關)”【1381年,徐達設山海衛】이라고도 하는데, 이 산해관(山海關)은, 후금(後金)과의 치열(熾熱)한 접전(接戰)으로 유명(有名)했던 곳이며,
당시(當時) 산해관(山海關) 수장(守將) 오삼계(吳三桂)가 조국(祖國)을 배신(背信)하고, 산해관(山海關)의 관문(關門)을 열고 청군(淸軍)에게 빌붙은 곳으로도 유명(有名)한 곳이다. 즉 ‘후금(後金)과 명(明)’의 접경(接境)이었다는 것이다.
《첩(妾) 때문에 조국(祖國)을 배신(背信)하고, 조국(祖國)의 등에 비수(匕首)를 꽂고, 산해관(山海關)의 관문(關門)을 활짝 열고, 후금(後金)의 군대(軍隊)를 맞아들였다는 오삼계(吳三桂)! 매국노(賣國奴), 배신자(背信者)의 최후(最後)는 어땠을까? 결국(結局) 또 배신(背信)한다. 청(淸)의 등에 비수(匕首)를 꽂고 반란(叛亂)을 일으켰다가 병사(病死)했고, 자손(子孫)들은 몇 년 후, 청군(淸軍)에게 포위(包圍)되자 자살(自殺)로 막을 내렸다. 배신자(背信者)는, 영원(永遠)히 배신자(背信者)일 수밖에 없다.》
“배신자(背信者)는 또 배신(背信)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배신자(背信者)를 부르기를, ‘영원(永遠)한 배신자(背信者)’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지금 사회(社會)에서도, 똑같이 적용(適用)되는 진리(眞理)다.
➤ 그런데 ‘유관(楡關)=유관(渝關:투관(渝關)’이 바로 산해관(山海關)이라는 것이다. 즉(卽) 『‘유관(楡關=유관(渝關)=림유관(臨渝關)=림여관(臨閭關)=림유관(臨楡關)’』이다 하였지만,
‘유관(楡關)’은, ‘유관(楡關)=유림(楡林)=유엽(楡葉)’일 뿐, 「유관(渝關)=투관(渝關), 림유관(臨渝關), 림려관(臨閭關)」은 될 수 없다.
또 유관(楡關)은, 유새(楡塞) 또는 유림새(楡林塞)【진(秦)나라의 몽염(蒙恬)이 느릅나무[楡]를 심어 요새(要塞)를 만든 곳을 “유관(楡關) 또는 유관(渝關)”이라고 한다.】이며, 또 유엽(楡葉)【느릅나무 잎[楡葉]으로, 북쪽 변방 지방에 느릅나무가 많아 변방 지방을 뜻한다.】이라고도 한다.
○ 여기서 한 가지 부언(附言)해야 할 것은, 명(明)나라 때의 산해관(山海關)은, 본시(本是) “유관(渝關) 또는 투관(渝關)”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뭔가 이상(異狀)하지 않은가?
➤ 왜 사가(史家)들은, ‘유관(渝關)=투관(渝關)’을 “느릅나무 유(楡)”자로 바꿔치기해 ‘유관(楡關)’이라고 한 것일까?
서(西)쪽에 있었던 ‘시황(始皇)의 진(秦)’나라를 ‘동방(東方)=동역(東域)=진단(震旦)’의 땅에 만들기 위해 ‘유관(渝關)=투관(渝關)’을 “느릅나무 유(楡)”자로 바꿔치기해 ‘유관(楡關)’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유림(楡林)은 곧 유관(楡關)’이라 했고, ‘유림새(楡林塞) 또는 유엽(楡葉)’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신강성(新疆省)의 언기(焉耆) 서(西)쪽에 있었다고 당서(唐書) 기미주(羈縻州)편에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즉(卽) 「시황(始皇) 때의 옛 조선(朝鮮)과의 접경지대(接境地帶)가 언기(焉耆) 서(西)쪽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➊ 그리고는 ‘유관(楡關)’은, 〈시황(始皇)의 명을 받은 몽념(蒙恬)과 40만 대군(大軍)이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요새지(要塞地)였고, 느릅나무(楡)로 요새(要塞)를 만들었고, 사막지대(沙漠地帶) 또는 막막한 초원(草原)지대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길가에 느릅나무(楡)를 심어 이정표(里程標)로 하였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유관(楡關)’은, ‘유림새(楡林塞)’이며, ‘유엽(楡葉)’이라고도 한다고 부언(附言) 설명(說明)까지 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➋ 그렇다면 시황(始皇)의 ‘진(秦)’나라는 어디에 있었길레,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언기(焉耆) 서(西)쪽 270리에 ‘유림(楡林)’』이 있는 것이며, 현(現) 섬서성(陝西省) 북방(北方)에 있는 ‘유림(楡林), 유관(楡關)’은 또 무엇이냐?
➤ 그렇다면 본래(本來)에는, ‘유관(楡關)’과 ‘유관(渝關)=투관(渝關)’은, 전혀 다른 지방에 있는 요새(要塞)였으며, 서로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없다는 것이냐? 하는 문제(問題)다. 원전(原典)의 기록(記錄)대로라면, “유관(楡關)”과 “유관(渝關)=투관(渝關)”은 관계가 없다.
➌ 또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유관(楡關)’은, 발해(渤海) 바다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바닷가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내륙지방(內陸地方)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卽)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外國) 글란(契丹) : 《契丹者,古匈奴之種也.代居遼澤之中,潢水南岸,南距榆關一千一百里,榆關南距幽州七百里,本鮮卑之舊地也.其風土人物,世代君長,前史載之詳矣. : 글란(契丹)은, 옛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으로, 대대로 요택(遼澤)지중(之中)에서 살았다. 황수(潢水)의 남안(南岸)으로, 남(南)쪽으로 유관(楡關)이 1,100리에 떨어져 있으며, 유관(楡關) 남(南)쪽으로 유주(幽州)까지 700리 떨어져 있다. 본시(本是) 선비(鮮卑)의 구지(舊地)이다. 중략(中略).》라고 하였으니,
➍ 외이고(外夷考)에서 말하기를 : 《“유주(幽州) 북쪽 700리에 유관(渝關)이 있고 그 아래에 유수(渝水)가 있는데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였는데, 유수(渝水)가 바로 유하(楡河)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➌+➍’를 보면 : “유관(楡關)은 요택(遼澤)의 남(南)쪽 내륙(內陸)에 있었다”는 뜻이다.
➎ 자치통감(資治通鑑) 楡關 : 《臨渝關,漢遼西郡有臨渝縣.唐志,營州有渝關守捉城.杜佑曰:臨渝關在平州盧龍縣城東百八十里.師古曰:渝,音喻. : 유관(楡關) : 림유관(臨渝關)이다. 한(漢)나라의 요서군(遼西郡) 림유현(臨渝縣)이다. 당지(唐志)에, 영주(營州)에 유관수착성(渝關守捉城)이 있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림유관(臨渝關)은,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성(城) 동(東)쪽 180리에 있다. 사고(師古)는 : ‘유(渝)=투(渝)는, 그 음이 ‘喩’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위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림유관(臨渝關)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유관(楡關), 산해관(山海關)과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는 뜻이다. 또,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등지(等地)에 이러한 지세(地勢)를 가진 곳이 없다.
➏ 遼史 地理志四 南京道 灤州 : 《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 : 란주(灤州)는, 뒤에는 산, 하(河)가 띠를 두른 듯하여, 한(漢)나라의 형승지지(形勝之地)로, 부소천(扶蘇泉)이 있는데, 그 물맛이 좋다. 진(秦)의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북(北)쪽의 장성(長城)을 만드는데 이곳에 머물렀다. : 림유산(臨楡山)은, 산이 쑥쑥 솟아올라 산봉우리가 뾰족뾰족하게 솟아있는데, 높이가 천여(千餘)인이며, 그 아래에 림유하(臨渝河)가 있다.》고 하였다.
위에서 말하는 곳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에 따르면 : 바로 섬서성(陝西省) 북방(北方)의 옛 상군(上郡) 땅이다. 즉(卽) 몽념(蒙恬)과 40만 대군(大軍)이 장성(長城)을 건설(建設)하는데, 감독관(監督官)으로 파견(派遣)되어 상군(上郡) 땅에 머물렀다고 했기 때문이며, 또 그곳에 부소천(扶蘇泉)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렇다면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요(遼)나라의 남경도(南京道) 땅인가? 그렇다면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것이다」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確認), 증명(證明)해주고 있지 않은가!
➤ 그러나 가장 중요(重要)한 ‘지형지리(地形地理)’ 측면(側面)에서 이를 보면 : 「그곳 땅에는 “림유산(臨渝山)이니, 림유하(臨渝河)니 하는 산(山)도 없고, 강(江)도 없다.”」것이다. 즉(卽) 「위에서 설명(說明)한고 있는 곳은, 중원(中原) 땅이 아니다.」는 뜻이다.
➐ 資治通鑑.卷205唐紀21.則天順聖皇后中之上.萬歲,通天元年 : 《夏,五月,壬子,營州契丹松漠都督李盡忠,歸誠州刺史孫萬榮舉兵反,攻陷營州.中略. : 여름 5월에, ‘영주(營州)글란(契丹)’의 송막(松漠)도독(都督)이었던 이진충(李盡忠)과 귀성주(歸誠州)자사(刺史) 손만영(孫萬榮)이 거병(擧兵)하여, 영주(營州)를 공격(攻擊) 함락(陷落)시켰다. 중략(中略). 秋,七月,辛亥,以春官尚書梁王武三思為榆關道安撫大使. : 가을 7월에, 춘관상서 양왕 무삼사가 유관도 안무대사(榆關道安撫大使)가 되었다.
【注釋 : 榆關在勝州界,與突厥接,非所以備契丹也.營州城西四百八十里,有榆關守捉城,所謂臨渝之險也.榆當作渝,史於此以後多以渝作榆 : 주석(注釋) : 유관(楡關)은, 승주(勝州)지경에 있으며, 돌궐(突厥)과 접(接)하였는데, 돌궐(突厥)을 방비하기 위한 곳은 아니다. 영주성(營州城) 서(西) 480리에, 유관(楡關)수착성(守捉城)이 있는데, 소위(所謂) “림유지험(臨楡之險)”이란 곳이다. 유(楡)는, 당작(當作) 유(渝:투)이나, 이후(以後)에 이것 ‘유(渝:투)를 유(楡)’로 많이 기록하였다.】 라고 하였다.
➤ 이걸로 보면 : ‘유관(楡關)’과 ‘유관(渝關)=투관(渝關)’은, 「“서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卽) 서로 다른 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관(楡關)’과 ‘유관(楡關)수착성(守捉城)’은 다른 것인가?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영주성(營州城)이 있는가? 이곳에 림유지험(臨楡之險)이 있는가? ‘림유산(臨渝山)’은? ‘림유하(臨渝河)’는?
이러한 흔적(痕迹)조차 발견(發見)할 수 없는 곳이 섬서성(陝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다. 도대체 뭔가?
➑ 新唐書43下.志第33下.地理7下.羈縻州.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 / 原文本文 [3-2]
《中略.自焉耆西五十里過鐵門關,又二十里至于術守捉城,又二百里至榆林守捉,又五十里至龍泉守捉,又六十里至東夷僻守捉,又七十里至西夷僻守捉,又六十里至赤岸守捉,又百二十里至安西都護府. : 중략(中略), 언기(焉耆) 서(西) 50리에 철문관(鐵門關)을 지나, 또 20리에 닿으면 우술수착성이고, 또 2ᅟᅢᆨ리를 가면 유림(楡林)수착성(守捉城)에 닿는다. 또 50리를 가면 용천(龍泉)수착성(守捉城)이요, 또 60리를 가면 동이벽수착(東夷僻守捉)이요, 또 70리를 가면 서이벽수착(西夷僻守捉)에 닿는다. 또 60리를 가면 적안수착(赤岸守捉)이요, 또 120리를 가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닿는다. 중략(中略).》하였다.
➤ ‘榆林守捉’이란, ‘유림(楡林)은, 유림새(楡林塞)이며, 유엽(楡葉)’과도 같은 말이며, 이가 곧 ‘유관(楡關)’이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기미주(羈縻州)편에서는 〈언기(焉耆)로부터 서(西)쪽으로 270리에 “유림(楡林) 수착성(守捉城)”이 있었다.〉고 하였다. 수착성(守捉城)이란 최전방(最前方)의 보루(堡壘) 즉 성채(城寨)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유림(楡林)은, 유관(楡關)이며, 유림새(楡林塞)”라고 하였는데, 사가(史家)들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명(明) 때의 “산해위(山海衛)”이며, 곧 “산해관(山海關)”이다. 그러나
‘당서(唐書) 기미주(羈縻州)’ 편의 기록(記錄)대로라면 :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말하는 하북성(河北省) 바닷가로부터 : 《무려(無慮) ‘일 만(一萬)리 서(西)쪽 땅’에 「유림(楡林) 즉(卽) 유관(楡關)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본시(本是)의 ‘유관(渝關)=투관(渝關)’은 또 무엇이며, 어디에 있었으며, ‘수천(數千) 미터(m) 에 달했다’는, ‘림유산(臨渝山)’과 그 산(山) 아래를 흘렀다는 ‘림유하(臨渝河)’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일까?
○ 중요(重要)한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시절(時節), 연행사신(燕行使臣)의 일원(一員)으로 선발(選拔)되어, 사행(使行) 길에서, 그 여정(旅程)에 대한 모든 것들을 기록(記錄)해 놓은, 연행기(燕行記) 속에서 말하는 것이다.
여정(旅程)에, 「여러 가지 형편(形便), 지세(地勢), 인종(人種), 부족(部族), 기후(氣候) 풍토(風土)」등등을 눈으로 목격(目擊)하고, 사람들로부터 듣고, 직접(直接) 경험(經驗)했던 사실(事實)보다 더 확실(確實)한 것이 있을까!!!!!!!!
➊ 〈右沙漠兮左碣石.前長城兮後遼水.驅單車兮使萬里 : 오른쪽은 사막(沙漠)이요 왼쪽은 갈석산(碣石山)이며, 앞은 장성(長城)이요 뒤는 요수(遼水)로다. 단거를 몰아 만리(萬里) 사행길을 갔다.〉는 것이며,
➋ 〈滄溟渤灪連窮磧,碣石崢嶸枕大遼,跋涉漸看家國近 : 발해(渤海) 큰 바다 넘실넘실 사막(沙漠)으로 이어져 있는데. 갈석산(碣石山) 높다랗게 요동(遼東) 벌을 베고 있네. 산 넘고 물 건너니 점차 고국이 가까운데〉라고 하였다.
특징(特徵)을 쉽게 이야기하면 : “연경(燕京)에 가려면 발해(渤海)와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지나가야 한다.”는 뜻이고, 또 “사막(沙漠)에 들어가기 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는 뜻이다.
○ 왜 조선사(朝鮮史)는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어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眞實)’이요 어떤 것이 “거짓”일까? 이를 판단(判斷)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모든 것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인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이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조선사(朝鮮史)’를 ‘공교육(公敎育)이라는 미명(美名)하여 세뇌(洗腦) 즉 암기(暗記)시킨 결과(結果)다.’
우리는 언제쯤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리는 언제쯤 자주독립(自主獨立), 자주국방(自主國防)을 할 수 있을까? 더불어,
우리는 언제쯤 서세(西勢)를 향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건 5,500만 국민(國民)들의 문제(問題)다. 지금도 노인(老人)네들은 시도 때도 없이, 국내의 정치적(政治的) 상황(狀況)에 따라, 보수(保守) 우익(右翼)을 위한, “미국(美國)이 없으면 금방 죽을 듯이, 태극기(太極旗)와 성조기(星條旗)를 흔들어대는 일방적(一方的)인 행동(行動)을 서슴치 않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철딱서니없는 노인(老人)네들을, 정치적(政治的)으로 이용(利用)해 먹는 무리(群)들이 있다. 「바로 ‘보수(保守)우익(右翼)’들과 ‘보수(保守)기독교(基督敎)’들과 ‘쓰레기 같은 정치인(政治人)’들이다.」 이 자(者)들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표(票) 몇 장을 구걸(求乞)하려, 국민(國民)들을 갈라치려 하는 것이다.
➤ 「과거(過去)를 돌아보면 : 국기(國旗)를 향한 마음은, 태극기(太極旗)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오죽하면 나라의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를 외면(外面)하고, 게양(揭揚)치 않으려 하고, 태극기(太極旗)를 피하려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건 모두 “보수(保守)우익(右翼)들과 보수 기독교계의 갈라치기 분열(分裂)책에 그 책임(責任)이 있다.”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 사회(社會)는, 우리나라는, 언제쯤 사대주의(事大主義) 망상(妄想)에서 벗어나 자주(自主)를 노래할 수 있을까?
2022년 03월 20일[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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