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건축된 높이 768피트 (234m)의 라인탑(Rheinturm),
K야,
내가 몇년 전부터 독일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너도 가고 싶어했지? 독일에서 기차여행을 하고 싶다고...
언제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나만 다녀와서 미안해!
내가 5월에 떠나기에 앞서 너는 아들과 함께 홍콩과 서울에 다녀왔지.
다녀와서 하는 말...
혜정아, 이제는 서울에도 나가지 못하겠더라,
예전에는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반가워 웃고 떠들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그 친구들 중에 남편이 투병을 하거나, 아니면 먼저 인생 무대를 퇴장했거나
아니면 친구가 아프거나...그래서 만날 수도 없었고 만난 친구들 하고도 깔깔거리며 기뻐할 일이 없더라.
마침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는 초상집 같았고 심한 감기에 걸려서 힘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여행도 건강할 때 해야지 이제 자신이 없어진다.
네 말을 들으면서 우리가 언제 그런 나이가 되어 버렸나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었어.
사실 독일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뒤셀도르프에 가고 싶었던 것은 순전히 슈만 때문이었지.
슈만이 뒤셀도르프의 빌커 스트라세 15번지에 2년 가까이 살 때 그는 이미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클라라, 나는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라인 강에 뛰어 들었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 라인강에 가 보고 싶었던거야.
강은 어디에 있든지 다 아름다운 것같아,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학창시절 즐겨 암송하던 시 한 구절의
그 세느강을 처음 보았을 때는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세느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그 강물이 좋았었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났던 베키오 다리 아래 흐르던,
석양에 바라 본, 이태리 피렌체의 아르노강,
드볼작이 작곡한 <나의 조국>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체코의 젖줄인 몰다우강,
또 기억하는 강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인
이태리 베로나에 흐르던 그림같은 아디제강,
빈센트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남프랑 아를의 론강... 1월에 찾아갔더니
얼마나 추웠는지....그래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스러웠지...
나는 한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
다만 시골에서 서울에 기차를 타고 오고 갈 때
한강을 철로로 지났던 기억은 생생하지.
지난 몇 년동안 유럽을 다니면서 그러한 강들이 너무 좋았어.
그런데 슈만은 왜 라인강에 몸을 던졌을까...
슈만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라인강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지.
사실 인류는 강을 중심으로 도시를 형성하며 살아왔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엘에이는 사막과 같아서 강이 없지. 강이 없는 도시,
아니 있기는 하지만 다 말라 버려서...어쩌다 비가 좀 많이 올 때나 물이 제법 흐르고
다른 때는 거의 메마른 모습이어서 시원한 강물을 보지 못하고 지낸 세월동안
우리의 마음도 메말라 버리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웠지.
본을 출발하여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이른 오후...
현대 미술관에 들려 동생에게 현대미술이 왜 흥미로운지를 들으니
문외한인 나도 이해가 되더구나...현대음악도 같은 맥락인 것같았지..
미술관을 나오니 이미 너무 피곤해져 버려서 괴테박물관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더 이상 걸어 다닐 수가 없어서 호텔에 들어와서 동생은 그대로 쉬게 하고
이미 날은 어두워지는데 나는 슈만 하우스를 찾아 나섰어.
Bilker Straße 15
0213 Düsseldorf
1852년 9월 19일 슈만은 클라라와 자녀들과 함께 이 집에 이사와서 1854년 3월 4일까지
살았던 집...뒤셀도르프의 슈만하우스...지금은 그의 기념관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지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좁은 골목길 양쪽에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주차되어서 차를 세울 수가 없는거야.
몇 바퀴나 집 주위를 돌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장을 발견하고 주차하니
슈만 하우스는 이미 문을 닫았고 슈만하우스에 들어가는 표를
길 건너에 있는 Heinrich Heine Institution에서 판다고 하는데 그곳도 이미 문을 닫았고..
결국 내부는 보지도 못하고 밖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서야 했지....
Heinrich Heine Institution
슈만은 낭만파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 1797 - 1856)의 시집 중에서
16편을 골라 "시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16곡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곡을 작곡했지.
하이네와의 그런 인연이 지금까지도 한골목에서 이어지고 있더구나.
물론 다른 가곡들도 많이 작곡했어. 슈만은 너무나 낭만적인 사람인 것같아.
슈만과 클라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음악가, 로베르토 슈만(1810 - 1856)이 9살이나 어린 클라라를 어렸을 때 만났다가
그녀가 16세, 그가 25세 되던 해에 다시 만나 결혼을 결심하였지만
음악교수였던 클라라의 아버지는 이미 슈만의 정신질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털이라는 이유로 완강히 반대하였지,
그러나 그는 5년이나 걸리는 법정 싸움까지 해서 마침내 결혼 승락을 얻어서
21세의 클라라와 30세의 슈만이 결혼을 하였지.
그러고 보면 슈만은 대단히 열정적인 싸나이였던 것같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법정 투쟁을 하면서 까지 쟁취하였으니...
(image from web)
그런데 슈만의 어머니는 슈만을 낳은 후, 이미 우울증이 심해서 정신병원에 있었고
사춘기 때에 누나 에밀리도 강물에 투신 자살을 하였고 그 이듬 해 아버지도 죽었기 때문에
슈만은 18세부터 이미 신경쇠약, 불안 초조 등의 중세를 보이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고 하더구나.
그러기에 클라라의 아버지도 그토록 완강히 딸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고...
장인과 싸우면서 까지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을 했으면 그런 정신질환도 없어졌으면 좋았을텐데
결혼 후 더욱 증상이 심해졌다고 하니 家係에 흐르는 유전적인 것은 어쩔 수 없었나봐,
이 집에 이사와서도 정신질환이 점점 심해졌지만 가끔 정신이 맑아지면
빠른 속도로 작품을 써내려 갔다고 하니 천재는 타고 나는지...
이 시기에 유명한 작품을 많이 작곡했는데 그 중에 첼로협주곡 A minor Op, 129는
그의 유일한 첼로 협주곡이고 내가 참 좋아하는 곡이지...
그는 어려서 첼로도 배운 적이 있어서 첼로의 그 음역에 대해서 잘 알았다고 해,
물론 머리도 무척 좋았던지 어머니가 원하는 법과 대학에 다니기도 했는데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를 법학에 머물게 하지 않았던지 음악공부를 하고
피아노로 성공하려고 했지만 손을 다쳐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었대.
이 집이 음악사적으로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지.
이 집에 살 때 1853년에 브람스는 항가리의 음악가 Joseph Joachim (1831 – 1907)이
슈만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면서 슈만을 찾아 가라고 했다는 구나.
20세의 청년 요하네스 브람스가 1853년 10월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뒤셀도르프에 도착하여
이 집을 방문했을 때 슈만과 클라라는 환대를 했고 브람스의 연주를 듣고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아 본 슈만은
그가 발행하고 있던 음악신보에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리므로 브람스가 음악가로서 발돌움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기에 슈만은 브람스에게는 잊지 못할 은인이고 스승이었지.
(image from web)
그런데 강물에 뛰어든 슈만은 구사일생으로 어부들에게 발견되어 살아났지만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본 가까이에 있는 Endenich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아내도 알아 보지 못하는 슈만... 의사의 지시에 의해 면허가 허락된 사람은 오직 브람스 뿐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나 슈만이 숨을 거두기 나흘 전에 클라라는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남편의 병실에 들어가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거의 의식이 없는 남편과 마지막 포옹을 했다고 하니...ㅋㅋ
너무나 슬픈 이야기지? 정신질환은 참으로 안타까운 질병이지...
클라라의 삶도 생각해 보면 행복한 삶은 아니었던 것같아,
음악교수였던 아버지 덕분에 당대에 이미 피아니스트로 유명해졌고
슈만의 열정적인 사랑을 받아 친정 아버지와 싸우면서 까지 슈만과 결혼을 하고
많은 자녀를 출산했지만 슈만과는 겨우 14년을 살고 사별을 해야 했으니...
그 14년 동안에도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한 것을 보고 있었을테니...
슈만(1810 - 1856)이 그렇게 46세의 안타까운 나이에 죽은 후
클라라(1819 - 1896)는 40년이나 더 살았어. 물론 나이 차이도 많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동안 클라라는 슈만의 작품을 정리하며 출판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하지.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를 평생 보살핀 브람스(1833 - 1897)는
클라라가 죽은 다음 해에 64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니
클라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였을까...
마치 빈센트 반 고흐를 내내 도와주던 동생 테오가 형이 죽자 6개월 만에
별다른 이유없이 죽었던 것처럼 말야...
생각해 보면 브람스가 클라라를 진정으로 사랑했었던 것인지,
아니면 스승에 대한 의리때문에 그렇게 일생 결혼도 하지 않고
클라라를 보살핀 것인지...
여러가지로 추정하고 있지만 진실이야 본인들한테 물어봐야겠지..
슈만 하우스를 그렇게 밖에서만 보고
그 집에서 멀지 않은 라인 강이 흐르는 구시가지로 걸어 가니
마침 주말이라 식당마다 온통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슈만이 이곳에 몸을 던졌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같지 않았지... 하기사 160년 전이니...ㅎㅎ
누구를 붙들고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여느 강이나 다름없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라인 강은
그 세월을 다 품고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그래도 멀리 라인탑과 다리에 불이 켜지니 황혼의 라인강이 멋지게 다가와서
사진을 몇 장 찍었을 뿐...
뒤셀도르프에서의 일정은 그렇게 끝나 버렸지...
(image from web)
우리가 베토벤 생가를 보러 갔던 본에는 그가 입원해 있던 정신병원이
지금은 음악도서관이고 그가 있던 병실은 슈만 기념실이 되어 남아 있다는데,
그리고 슈만과 클라라의 무덤도 본에 있는데
베토벤 생가만 들리고 무덤도, 정신병원도 찾아가지 못했어.
또한 슈만이 18세부터 34세까지 라이프치히에 살 때 단골로 다녔다는 카페랑
그가 클라라와 결혼하여 첫 신혼 살림을 차렸던 집이 라이프치히에 있는데
우리가 라이프치히에 갔을 때는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가 보지 못했으니.
우리의 음악기행이 얼마나 주마간산 격이었는지...ㅋㅋ
그래도 라인강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여행이었지.
Robert Schumann (1810 - 1856) 의 Cello Concerto in A minor, Op. 129
재클린 뒤 프레가 연주합니다.
K야,
슈만이 이 집에 살 때 작곡한, 내가 좋아하는 첼로 협주곡이야.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in D major와 드볼작의 첼로 협주곡 in B minor와 함께
3대 첼로 협주곡으로 불리우는 명곡이지.
그는 어쩌자고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곡을 작곡해서 시대를 뛰어 넘어 만인을 울리는지...
아무리 家係로 부터 이어지는 정신 질환이라고 해도 그토록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을 했으면
아들 딸 낳고 잘 살았어야지, 왜 그렇게 정신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기도 했다니까
클라라도 슈만도 마음에 슬픔이 얼마나 컷을까....
어느 시인이 말했어.
예술가들의 슬픔의 맨 밑 바닥은
가장 순수하고 슬프지 않은 또 다른 강이 흐르고 있다고,
그곳에서 승화되고 정화된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고,
그래서 시대를 뛰어 넘어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이 어디 예술가들한테만 해당되는 말일까?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도 강물이 흐르는 것같아,
비록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지는 못해도
그 강물이 우리를 사랑하게도, 그리워하게도, 슬퍼하게도 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강물을 따라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K야,
네가 아직도 소녀적 감성이 풍부해서 만년 소녀인 것도
네 마음 속에 있는 강물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일거야,
마종기 시인의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네 마음 속에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이유는 이제까지 메마른 엘에이에서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도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탓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긴 글을 썻네,
이제 그만 펜을 멈출께.
어쩐지 이 이야기는 너한테 하고 싶었어.
긴 글 읽어주어 고맙고,
건강하기 바라면서
Cello, 혜정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