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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시의 공간 : 충남 대전
여기, 문학이 있다
손 미
나는 태어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 대전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고향은 엄마의 치맛폭에서 나던 그 냄새를 가져다주고, 짝사랑하던 그 남학생의 운동화에 한없이 머물던 시선이 남아있는 곳이다. 도랑에 빠져 휩쓸려 내려가는 동생의 손을 피가 나도록 잡아끌던 어린 내가 있고, 곳곳에 묻어있는 나의 피부가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아 말을 건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정산부인과. 대전시 중구 정동에 있다. 지금까지 하얀 건물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대전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로 당시 대전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첫째를 낳는다고 대전에서 제일 좋은 병원을 찾아간 엄마는 그 산부인과에서 한평생 할 욕을 다 퍼부었다고 한다.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사정했을 때 ‘애기 낳고 드세요.’라고 차갑게 등을 돌리던 미혼의 간호사들이 그렇게 미웠단다. 찢어지는 고통을 간호사들에게 다 풀었다고 했다. 할 욕 못할 욕 다 퍼부었다고 했다. 간호사들은 엄마에게 ‘아줌마. 그러다 욕쟁이 애기 나와요.’라며 신경을 더 긁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처음 나올 때 욕을 들으며 나온 아이다.
형광등이 노래질 때쯤 내가 응애응애 태어났는데 그 밤엔 눈이 하얗게 쌓였었노라 했다. 다음 날 그 하얀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병원 밖으로 걸어나왔을 때 엄마의 나이는 갓 스물 다섯. 그렇게 걸어나와 처음으로 만난 곳은 목척교였다. 아마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봤던 풍경은 폭설과 목척교였을 것이다. 목척교는 대전역에서 몇 백 미터만 직진하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지금은 대전의 랜드마크다.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가 있던 자리에 건물을 헐고 새롭게 증축한 디자인을 자랑하며 플리마켓과 공연, 분수쇼 등이 펼쳐지는데, 대전의 첫 인상이 된다.
목척교는 그 역사가 100년이나 된다. 젓갈이 많이 나던 강경과 논산에서 중앙시장으로 젓갈 장수들이 거래를 하러 왔었는데 중앙시장에 당도하기 전, 눈앞에 흐르던 대전천에서 지게를 놓고 쉬는 모습이 척尺과 같다고 해서 목척교라 이름 붙었다. 엄마가 강보에 나를 싸안고 바라봤던 목척교는 언젠가 시인 박용래와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술집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나는 어스름에 밀려 온종일 삶던 더위가 그음하려 하자 목척교 옆의 허름한 탁배기 집으로 박시인을 불러 모셨다. 내가 초면인 유씨, 이씨를 인사시키자 박시인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옥천 같이 빼어난 고장을 다 둘러보게 되었더냐고 여간 기특해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힘입었는지 이씨는 시키지도 않은 옥천 지방의 산수를 자랑삼아 덧거리하였다. 그러자 박시인은 대번에 이씨를 겨누어 보며
“산 좋고 물 좋은 것은 어느 두메나 일반인데 시인이 고향을 쳐들면서 어떻게 물경풍치物景風致만을 떠들 수 있는가. 그런 것은 관광객에게 맡기고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고을이 배출한 시인부터 기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바로잡아 준 다음
“내가 옥천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시인 정지용을 낳은 땅이기 때문이오.”
하며 찻잔을 들어 서운한 마음을 가시려고 하였다. 나와 유씨가 숙연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물정모르는 이씨가 “그런가요? 나는 정지용이 우리게 사람인 줄도 몰랐네……” 하며 새퉁스런 소리로 두런거렸다. 박시인의 결곡한 성미를 알고 있던 내가 이제는 큰일 났구나 싶어 민망한 낯을 둘 데 없어 하던 순간이었다. 바람벽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터지면서 박시인의 성난 음성이 귓전을 갈겼다.
“야, 이문구.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너는 이런 것밖에 친구 읍네? 정지용이 제 고향 선배인 줄도 모르는 이런 무녀리두 시인 명색이라고 하냥 댄기는 겨? 이런 것두 사람이라고 마주 앉어 술 마시네?”
박시인은 술잔을 벽에 던져 박살내고도 성이 안 풀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이문구, 「박용래 약전」 부분
박용래 시인의 고향은 강경이지만 계룡학숙鷄龍學熟에서 상업과 국어 담당 교사 일자리를 얻으면서 대전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박용래 선생의 문학이 시작된다. 선생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으며 타계할 때까지 이곳 대전에서 살았다. 대전에서 선생은 계룡학숙鷄龍學熟의 교사인 박희선, 백양, 원영한 등과 함께 <동백시인회>라는 시동인을 결성해 동인지 『동백』을 출간했다. 이 『동백』에 실린 박용래 선생의 시가 청록파 박목월 시인의 눈에 띄었다. 이어 박두진 시인이 『현대문학』에 박용래를 추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선생은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게 된다. 그러니까 대전은 박용래 시인의 문학적 고향이 되며 선생의 문학이 태동된 곳이다.
이후 선생은 일자리를 찾아 공주, 대전, 당진 등을 떠돌다가 1965년 대전시 오류동 17번지 15호에 가족들과 함께 둥지를 튼다. 선생은 이 집을 ‘청시사’라 이름붙이며 특별히 아꼈는데 처음으로 자기 집을 장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청시사에는 많은 문인들이 오갔으며 1980년 타계할 때까지 시인은 이곳에 머물렀다. 실제로 선생의 작품 전체의 84%인 134편을 이 청시사에서 발표했다.1)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이었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이었다가
중국집 처마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젠 돌아와
오류동 동전
──박용래, 「오류동 동전」 전문
박용래 선생은 실제로 자신이 머물던 오류동을 배경으로 위와 같은 시를 썼다. 오류동은 지금의 서대전 네거리로 알려진 부근을 일컫는다. 인근에 백화점이 밀집해 있고 서대전역이 있어 지금도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오류동 집터는 헐리고 현재는 공영주차장이 된 자리에 박용래 시인의 집터라는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나는 그곳에서 20대를 보냈다. 오류동 친구의 자취방에서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왜 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한탄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는 그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인 시 안 쓰는 친구들에게 시를 쓰고 싶다고, 문학을 하고 싶다고 울분을 토했다. 어떤 친구는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었고 어떤 친구는 시집을 잘 가는 게 꿈이었는데 그 앞에서 나는 시를 쓰고 싶다고 울먹였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별로 공감을 하지 못했지만 자취방 바로 옆이 선생의 생가였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자꾸만 그 방으로 끌어들였다. 만약 나의 울음을 선생이 들었다면 이문구 선생에게 역정을 내던 모습처럼 내게도 역정을 내실지 모를 일이다. 그 생각을 하면 몹시 부끄럽다. 지금은 친구의 자취방이 사라져 이 일대를 쏘다닐 일이 거의 없지만 어쩌다 대전에 시인들이 찾아오면 근처의 닭볶음탕 집에 데려가 여기가 박용래 선생이 살던 터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렇게라도 선생의 자리가 여기였음을 알리는 것이 나의 의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재 대전에는 2년 전 세워진 대전문학관이 하나, 그 외엔 문학과 관련된 공간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대전에서 배출한 문인이 적지 않음에도 타 지역에 비해 문학관과 문학공간이 미비하다. 선생께 죄송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오류동에서 대전역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 도마동이라는 곳이 나온다. 언젠가 중학교 때 딱 한 번 가출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도마동 어딘가를 헤매고 다녔다. 한겨울이었다. 발가락이 시려웠고 친구들과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 겨울, 공중전화 박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집에 가지 않겠다는 오기로 우리는 두근대며 밤을 보냈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친구는 ‘우리 담배 펴볼래?’라고 말했고, 수퍼에 담배를 사러갔다가 주인에게 거절당했을 때는 더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추위에 못이겨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 엉엉 울었다. 충혈된 눈으로 나를 매섭게 때리는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꽁꽁 언 나를 이불 속에 밀어 넣고 따뜻한 밥을 짓는 엄마의 등을 보면서, 한 없이 울었던 기억. 중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그날, 나는 그렇게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알지 못할 그리움 때문에 자꾸만 집을 나가고 싶었다. 집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도마동은 알지 못할 열기로 심장이 뜨거울 때, 춥고 슬픈 온도로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던 동네로 남아있다. 고향을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다른 기억이 덧칠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지켜보는 일이다.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났던 그 지명.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닥치던 그 좁은 골목의 공중전화 박스. 어쩌면 거기서 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달래며 시인이 되리라 다짐했는지 모르겠다.
새벽 안개에 빠진 아파트는 여객선처럼 쿨럭인다
점점이 살아있는 가로등 불빛이 습기를 빨아들이고
첫 시내버스는 왔다 빈 차로 갔다
아침 입맛을 잃은 사람들 위해서
크라운 베이커리 사내는 앞치마 가득 빵을 굽는다
밀가루 반죽이 안개처럼 부풀어도
그 빵의 아침은 피어나지 않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찢겨진 벽보는 젖어
축축한 안개의 늪으로 밀리는데
언제부터였을까, 계곡물 소리 사라진 것은
우거진 잡풀 밑으로 찔찔거리며 밭은 신음 소리 끌고 간다
끈끈한 새벽잠에 쳐박힌 은행나무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위로 길게 눕는다
다시, 치마 가득 빵을 토해내는 빵집 주인
그는 아파트 주민의 식탁을 위해 살아간다
입맛 없는 이들의 아침으로 빵을 부풀릴 뿐,
새벽이 오는 골목으로는 눈길 주지 않는다
올해 들어 이 아파트엔 하루 건너 안개가 찬다
── 김완하, 「도마동·3-크라운베이커리」 전문
새벽이 밝아오는 도마동 어디선가 솔솔 풍겨오는 빵냄새를 맡았던 것도 같다. 공복으로 허기가 졌으나 입맛은 없었다. 빵냄새와 밥짓는 냄새가 풍겨나오던 낯선 골목길에서 이상하게 더 멀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4살의 나는 그때부터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이라는 생각을 굳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굳은살이 이제는 뚝뚝, 문장이 되어 시가 되고 있다.
도마동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정림동이라는 곳이다. 정림동엔 거대한 천이 하나 흐른다. 갑천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독 살찐 나무가 많이 잠겨있다. 가수원교를 건너기 전 옆길로 빠져 천을 따라 들어가면 대전에서 유일한 화장터가 있다. 지금은 뼛가루를 천에 뿌리지 않지만 오래 전엔 화장터에서 하얗게 빻아 나온 가루를 이 천에 뿌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천의 물고기와 나무는 유독 살이 올랐다고 가수원교를 지날 때마다 어른들이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 화장터에 얼마 전 다녀왔다. 친구가 화장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서른다섯의 키가 작았던 친구는 그곳에서 누런 뼈가 되어 나왔다. 두 손으로 모아들면 전부 들릴 것 같은 얼마 안 되던 뼈는 분쇄기에 갈려 가루가 되었다. 나는 친구가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철공소 앞에서 들었던 쇠 갈리는 소리 같았다. 그곳에서 가루가 되는 친구를 보았고, 정림동에서 그 아이는 사라졌다.
그곳은 항상 튜울립나무 꽃이 피어 있다
노란 새처럼 앉아 피는 꽃,
붉은 벽돌로 지은 사각 굴뚝에선
흰 연기 하늘로 가는 길 묻고
파란 하늘 거기 한 사내가 웃고 있다
가슴속 뜨거운 피를 어쩌지 못해 그는 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술잔을 기울인다
살아서 없던 욕심 죽음에 더욱 몰라
땅 한 평 차지 않고 떠난 사내.
정림동 파란 하늘 끝자리
서른 살의 그 사내가 웃고 있다
──주용일, 「정림동」 전문
대전 사람들에게 정림동은 “땅 한 평 차지 않고 떠난” 그 누군가를 보내는 허무한 공간이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동일한 기억이 정림동을 떠올리게 하고 서늘한 공통분모를 갖게 만든다. 이 시를 쓴 주용일 시인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 떠나보냈을 “서른 살의 사내”가 사라진 것처럼 50을 넘긴 시인 역시 그렇게 사라졌다. 생전에 주용일 시인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습작생들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주용일 시인이 내 생애 처음으로 사인을 받은 시인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자필 사인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벅차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이제는 선생이 아프지 않은 곳에서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한 시를 쓰고 계실 거라 생각한다. 더 많은 소재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편 한 편 시를 쓰고 행복하실 거라 믿고 싶다. 선생의 시집 제목처럼 그곳에서의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듯하’길 마음 깊이 바래본다.
한 고장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을 소환해 시를 쓰지만 그 지명이 기억하는 공통 감각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그렇게 한 때 공통으로 존재하는 혹은 했던 시인일 수 있어 오늘 밤 나는 따뜻하다. 알 수 없는 의무감이 생긴다. 사랑하는 나의 대전에게, 부끄럽지 않게 진짜 시를 써야 한다.
손 미 / 1982년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양파 공동체』가 있고 2013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