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도 올린 적이 있지만, 백제 다루왕의 재위기간은 15년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소장자료목록 중에 백제기라는 사서에 다루왕의 재위기간이 15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라디오님이 그것은 51년의 착오일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힙니다.
백제 온조왕은 서기28년을 끝으로 죽고, 백제계의 온조왕의 아들 다루가 즉위합니다.
그리고 재위15년인 서기42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의 사촌인 재사공주의 아들 다루와 작태자의 연합군이 남침합니다.
이 과정 중에 승리를 쟁취한 것은 백제계의 온조왕이고, 대무신왕의 아들 다루왕은 작태자와 남쪽에 둥지를 틉니다.
그 때에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변한국입니다. 다루왕은 수로왕으로 둔갑합니다.
그리고 수로왕은 작태자와 함께 가야국을 건설하죠. 그러나 의견 차이로 둘은 갈라섭니다.
작태자는 왜국으로 망명합니다. 왜국에는 다파라국의 협보대왕이 있고, 협보대왕과 작태자는 숙질관계 정도 되므로
의탁한 것입니다. 이에 협보대왕은 호공(협보대왕의 아들 정도로 추정)이 있던 신라로 보냅니다.
그리하여 작태자는 그곳에서 아들 토해를 낳습니다. 탈해는 작태자의 개명이름이고, 토해는 작태자의 아들입니다.
토해를 낳은 때가 62세입니다. 토해는 그곳에서 성장하고 후에 토해이사금이 됩니다.
그렇다면 가야를 건설한 수로왕은 어찌되었을까요?
그야말로 가야를 건국해서 왕위를 이어나갑니다. 그 후손들이 금관국, 월내국 등을 건국하고요.
그리하여 새로운 변한8국을 만들어갑니다.
백제는 다루왕의 서거후에 중간에 공백기가 있습니다.
이를 멸망한 백제국의 기간으로 보아야하는지, 아니면 사라진 왕계로 봐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후에 요동에서 공손씨의 세력을 통해서 성장한 것이 바로 구지왕의 백제입니다.
정확한 시점은 기루왕이 집권하는 137년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한에 대해 설명하자면, 마한은 54국이란 것은 허상입니다.
마한사람, 변한사람 등등 통칭해서 설명되어집니다.
추모경에서도 물론 나오는 사실이고요.
후에 사람들이 그것을 여러나라로 분립했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마한은 허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마한1개의 나라일 가능성이 많다는거죠..)
첫댓글 -6월25일에 김성겸역주의 추모경이 발간되는군요.
청예 수로왕은 155년~ 162년 사이에 금관국을 창업하지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거등왕의 기년은 믿어도 됩니다.
님은 재고를 해야 해요.
삼국유사를 토대로 유추하면 정확한 년도는 158년입니다. 그리고 전 수로왕과 청예왕은 다른 인물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왕 19년 기사에 변한이 나라를 바쳤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신라사초에 금관국이 변한국의 왕터라는 노래 비슷한 것이 나오며, 신라사초 어디에도 수로왕과 청예왕이 같다는 기사 혹은 다르다는 기사가 등장하지 아니하므로 해석이 애매합니다.
탈해와 수로왕, 탈해와 호공이 짝이 됩니다. 탈해와 호공은 왜에서 왔다는 공통점 외에도 탈해가 호공의 집터를 빼앗았으니 석씨와 김씨의 거주영역이 겹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탈해와 호공과 수로가 모두 혁거세 재위년간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저의 생각엔 혁거세의 재위기간이 생각보다 길고, 남해와 유리의 기년 중에서 줄어들어야 할 듯...
수로왕과 청예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은 적지요. 수로왕은 금관가야의 중시조설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수로왕과 청예왕은 달라요. 청예왕이 금관국을 통치시작한게 158년이고요, 금관가야는 158년으로부터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예왕을 수로왕으로 받들고 금관가야=금관국이라 생각한거에요.
탈해와 호공은 같은 왜국출신으로 보이는데, 탈해가 숯으로 호공의 집터를 빼앗았다는 것을보면, 신라사초의 삼군은 차차웅,유리니금,호공으로 보입니다. 삼군의 지위를 강탈당한 호공이 물러나고, 그 아들 알지를 탈해에게 맡기죠..
그리고 정확히 다시 말해보자면, 왜인 호공의 영토를 왜인 협보(신무왕)가 파괴하여 가진 것이고, 그 땅을 다시 이어받은 작태자의 아들 토해가 호공과 결탁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호공은 이 뜻으로 아들 알지를 토해의 누이 혹은 딸과 결혼시킵니다.
지금까지 제 개인적인 견해나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았을때, 수로(首露)와 청예(靑裔)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라모리스님의 말씀을 토대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가 있겠네요. 그래도 158년 금관국성립설을 볼때 청예=수로는 거의 확증해도 좋지 않나 생각됩니다.
수로왕 즉위=임인년=42년.을 믿으면... 수로왕의 나이가 100살이 넘죠. 그러므로, 건국연대가 올라갔다고 생각해야 되요. 삼국유사 가락국기니까 그나마 덜 조작되서 남아 잇는거죠. 삼국사기에 맞추지 않으면 삼국유사가 탄압을 받으니까요..
네페르님// 신라사초AD.137년경에 금관가야가 등장합니다. 이는 정견모주의 등장시기인155년보다 이전이 됩니다. 즉, 청예가 금관가야를 통치하기 이전에 이미 금관가야가 있었다는 말이됩니다.
가라모리스님/신라사초를 다시 한번 꼼꼼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말씀해주신 문제의 서기 137년조 5월조에 (金官加耶與月奈等 七國作亂 命吉門爲征虜大將軍 討平之) 금관국이 등장하네요. 지금까지 전 수로와 청예를 거의 동일인물로 봐왔던지라... 그렇다면 수로는 금관국의 중시조쯤으로 비정되는 것 같은데... 상당히 애매하네요. 정보 감사합니다.
그래도 상장돈장의 청예부분을 보면, 수로와 청예의 동일성은 분명하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금관국의 설립자와 통치자의 교체가 아닐런지요.
수로왕은 금관가야의 중시조설이 타당.
상장돈장 몇 페이지입니까?
라디오님// 네페르님이 말씀하신 상장돈장은 아마도 라디오님이 저번에 올리셨던 그것과 같다고 봅니다.
라디오님/상장돈장 207페이지입니다. 저번에 라디오님께서도 언급해 주셨지요. 정견(正見) 비가(比可) - 靑裔(청예) 황옥(黃玉) ... 으로 이어지는 순으로 볼때에 수로=청예설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보았지요. 확고한 증거라서 말이지요.
수로와 청예를 동일인물로 보았을 때는 수로와 탈해가 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사가 허위가 됩니다. 청예가 등장하는 것은 파사이사금의 중반부인데, 탈해는 파사이사금 전반부에서 사망했기 때문이죠. 청예를 중시조로 보고 수로를 건국시조로 보고, 중간의 약 120년의 세월이 사라지고 없는 것은 혁거세때 신라로 복속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수로와 탈해는 만나지 못해요. 파사이사금 기사에 수로왕이 나오니.. 수로왕은 파사이사금때의 사람입니다.
천관우 교수가 예전에 임인년을 중시하여 42+ 120년= 162년을 금관국 창업한 해로 보았다더군요.
수로는 파사이사금 시기생존, 탈해는 이미 사망했으니 정성일님/라디오님 말씀대로 수로=청예설을 취하면,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위가 되지요. 굳이 이 기사를 본(本) 수로-탈해와의 대결로 봐야할 것인지... 후대에 가감된 이야기 이거나, 그 후손들간의 이야기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천관우 선생의 식견은 아주 존중할만하지요. 지금 사학계에 그만한 분이 계실지... 최근 제가 본 책에 의하면 매장된 불우의 천재라는 의견도 있더군요.
수로의 42년(임인)의 기년이 흔들리면 탈해의 기년도 함께 흔들립니다. 그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닌가 합니다.
라디오님// 다파신은 탈해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랑 아들이 싸울 이유가 없어요.
고구려의 제3왕자 다루가 곧 가야시조 수로왕입니다. 즉 백제, 가야는 모두 고구려와 혈연적 관계이죠..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백제에게 패한 고구려원정군 다루와 작태자는 남하하여 진한에 의탁하죠.. 그리고 재독립을 위해 다루와 작태자(다파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둘이 싸웁니다. 거기서 다루가 승리하고 다루가 가야를 건국합니다. 그리고 작태자는 신라에 머물다가 작태자의 아들인 다파라신이 신라왕녀와 결혼하고, 아들 탈해를 낳습니다.
맞아요 다파신이 탈해의 아버지이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맞출려고.. 기사가 정정되었죠. 틀리면 뭐 어떻습니까?
마한 54국의 이름과 지명과의 관계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을 오히려 저에게 알려 줘야 해요. 공부를 해야죠. 지금 님이 시급한 것은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한에 대해 설명하자면, 마한은 54국이란 것은 허상입니다. 마한사람, 변한사람 등등 통칭해서 설명되어집니다. 추모경에서도 물론 나오는 사실이고요." 추모경 몇 페이지에 나오는지 근거를 제시해 봐요.
추모경에 7년조에 보면 추모왕이 계후를 욕한 섬니여주를 정벌할 때 섬니여주의 남편이 마한인이라고 명시됩니다. 다른 기록에서 보면 그 사람의 출신을 이야기할 때, 꼭 부여사람이면, 부여인이라고 명시하는 등으로 볼때 마한을 한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아서 마한54국은 허상이라는 점을 이야기한 것이고, 마한 54국 중에 비리국이 엄청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비리왕 소노 이후 추모왕에 복속되었고, 원비리국은 마리가 통치하였으므로, 이는 허상이 됩니다.
국로추사 마한왕에 대해 연구해 봐요.
마한54국설을 생각하면, 어쩌면 54국이 모두 난립해 있다기 보다는 중앙에 있는 마한왕이 위성국이나 자치국쯤으로 인정해서 다스렸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중앙과 충돌도 있었을 수 있겠지만요. 그저 추측에 불과하긴 해도 한번 쯤 생각해 볼 수는 있다고 봐요. 라디오님 말씀대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많은 분들과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