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릉 참배기
한국 고대사에서 기원 전후 시기는 민족들의 대이동과 부족들의 정착기였다. 기후변화의 영향도 컸지만, 기원전 194년 기자조선이 위만에게 찬탈당하고,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침공으로 패망한 정변으로 인하여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까지 약 300년 동안 만주-한반도 서북부에 주로 살고 있던 부계 Y염색체 O1b02-M176(30% 고조선계 한국인 본류), O2-M122(40% 중국남부계), C2-M217(15% 중앙아시아 시베리아계), N1c(8% 우랄 극북 유라시아계), Q(중국북부계) 등 크게 다섯 갈래의 민족이 대거 남하하여 한반도 곳곳에 10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국가를 세웠다. 이 다섯 개의 민족은 각각 수많은 씨족과 부족들을 포함했고, 주로 부족 단위로 이동했다. 남해안 지역까지 이동한 고조선 유민들은 선주민 (D-M174, 3%)인 죠몬인들을 일본열도로 쫓아버리고 살기 좋은 곳곳에 작은 국가들을 세웠다. 그중의 하나가 낙동강 하류 김해 지역의 가락국(駕洛國)이다. 늦게 도착한 집단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로 가서 선주민인 죠몬인들을 동북쪽으로 밀어내고 곳곳에 작은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권 탈해이사금 조에 “다파나국 왕비가 독(櫝 큰 나무 궤짝) 속에 탈해가 든 알을 넣고 바다에 뜨워 마음대로 가게 했는데,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니 금관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가져가지 않았고, 또 진한(辰韓) 아진 포구에 이르니, 해변의 노모가 줄로 끌어당기어 독을 열고 아이를 꺼내어서 길렀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의 재위 39년(B.C. 19년)이었다.”
삼국사기는 서기 42년 기사로 “신라 유리왕 10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백제 다루왕 15년인 서기 42년 3월 김해 지방의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 건국”과 함께 “신라 이서국(伊西國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과 화양읍 일대) 멸함”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기 48년 기사로 “유리왕 25년 7월 가락국수로의 비로 허씨(許氏)를 삼음”과 “7월 가락, 구간(九干의 명칭을 고침”이 있다.
이어서 서기 77년 기사로 “탈해왕 21년 8월에 아찬 길문이 가야의 군사와 더불어 황산진(黃山津 동쪽은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황산역터 근처) 입구에서 싸워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가 있다.
나무위키는 기원전~기원후 1세기경의 낙동강 하류 유역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낙동강 유역은 지석묘와 민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농경문화가 발달했지만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금속기 제조 능력이나 사회 조직 수준은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의 통일 제국인 전한의 무제가 보낸 대군이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기원전 108년에 멸망(왕검성 전투)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많은 고조선 유민이 발생했는데, 김해를 비롯한 낙동강 유역에도 유민 집단의 규모를 알 수는 없지만 기존의 지석묘 및 석관묘와 다른 목관묘가 여기저기 조성되고 부장품도 기존의 민무늬 토기 등과 함께 고조선 계열의 철기류, 세형 동검, 철제 무기 등이 나타나기 시작해 선주민과 남하한 고조선 유민이 상호 협력하여 발전하는 정황이 보이며, 구지봉 수로 신화의 줄거리는 이런 상황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훗날 금관국의 왕릉급 고분군이 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이전에, 서기 3세기까지는 김해 주촌면에 있는 양동리 고분군이 더 우세했던 시절이 존재한다. 수장묘로 추정되는 양동리 162호 고분, 235호 고분은 이전의 다른 고분과 차원이 다른, 중국제 구리거울과 유리구슬 목걸이 등 질 높은 위세품과 대량의 철제 무기 등을 부장하고 있다. 전성기 금관가야의 고분군인 대성동과 거리가 가깝고, 쇠퇴와 성장이 맞물리는 양동리가 구야국(=금관국)의 전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모용선비가 중국에 세운 '삼연'(전연 337년, 후연, 북연) 계통의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삼연 - 금관국 - 왜를 잇는 해상 루트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석탈해 이야기를 보면 서기 42년 가락국 건국 61년 전에 김해 지역에 ‘금관 사람들“이라 불리는 무리들이 서기 48년 기사에서 보듯 구간(九干)의 지배하에 아홉 개 부족으로 나뉘어서 살고 있었다. 기원전후에 진한과 변한 지역에는 42년의 ’이서국 멸망‘에서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작은 부족국가들이 100리 정도의 경계로 존재하고 있었다.
김해 지역 사람들은 구야국(狗倻國)이란 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석탈해 세력을 물리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이때 사람들이 신석기 말기와 청동기시대를 살고있는 미개한 족속이라고 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은 서기 42년경에 낙동강 수계를 따라 내려온 김수로 세력과 대결하게 됐다. 그러나 김수로 세력은 중국 신나라에서 망명해온 흉노족 후예로서 약 2만여 무리를 이룬 강력한 철기문명 집단이었다. 김수로를 추장으로 한 신래집단은 고조선 유민들인 선주민들의 복종을 받아 백성으로 삼고 서기 42년 가락국을 건국했다. 기마민족 흉노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가락국의 군사력은 35년 후인 서기 77년에 남진하는 신라와 대결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후에도 서기 400년경까지 신라, 백제와 남부지방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거듭했다.
가야연맹 국가들의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 북방계 유목민족의 물품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현대 분자인류학에서 검증되는 부계 Y 염색체 하플로 그룹 분포도를 보면 몽고족, 여진족, 거란족 등 북방 유목민족 C 계통이 경상도 남부 지역으로 갈수록 많이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서는 매우 낮게 나타난다. 즉 신라 문무왕비문의 ”우리 조상은 흉노왕자 휴도왕 김일제이다“란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이종사촌들인 흉노계가 산동성에서 살다가 신나라가 망하자 한반도로 이동했다. 기자조선 준왕의 후예들이 장악한 서남쪽 마한으로는 가지 못하고, 추풍령을 넘었다. 일부는 경주 쪽으로 가고 주류는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면서 부족 별로 군데군데 정착하여 작은 나라를 세웠다. 맏이인 김수로는 김해 지역에 도착하여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구야국을 승계한 가락국을 건국했다. 경주로 간 김알지계는 결국 김미추왕을 시작으로 신라의 왕권을 독점하였다.
지금까지 가락국 고분에서 발굴된 금관은 없다. 그러나 이웃 부산 복천동에서 금관이 발굴되었다. 복천동 금관은 5세기 초 400년대의 유물로서 의성 탑리 금동관, 황남대총 금관, 경주 교동 금관, 대구 비산동 금관과 같은 시대이다. 그러므로 복천동 금관의 국가가 가락국이라고 할 수 없다. 울산 지역에 거칠산국이 있었으므로 부산-동래 지역에도 가락국과 동급의 국가가 존재했다. 이 국가가 신라 초기에 자주 침범한 왜(倭)일 것이다. 이 왜는 일본의 왜와 같은 무리로 열도왜(列島倭)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가야인들이 동남부에 도착하면서 주류는 정착하고 일부 부족은 대마도를 건너 구주까지 진출했다. 그러므로 낙동강 유역 가야연맹과 구주 가야 세력은 같은 뿌리였다. 400년경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 때 패하여 일본 열도로 도망갔다. 이 왜를 일본서기에서 과장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었다. 이후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고 세력을 떨치면서 열도왜가 신라와 단절되고 백제와 친밀해졌다. .
가야연맹이 인구와 군사력, 문화와 경제력이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개별 국가로 행세하다가 신라에 의해 차례차례 정복된 것은 그들이 같은 흉노족이지만 부족이 여러 갈래였기 때문이다. 몽골초원이나 산동성 북부 같은 평지에서는 강력한 부곡이 중심이 되어 통합을 이루기 쉽지만, 산지가 많은 한반도 지형은 강과 분지를 중심으로 작은 부족국가들이 병립하기에 유리했다. 신화대로 같은 형제라 하더라도 이 넓은 주인 없는 땅 중에 한 곳을 차지하고 각자 왕이 되고 싶었지, 큰형 밑의 신하로 살아가기 싫었을 것이다. 사로국은 유리왕부터 파사,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까지 박씨왕조 동안 주변의 우호산국(于戶山國), 거칠산국, 음즙벌국, 실직국, 압독국,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병합하고, 138년 일성왕 태백산 북순 친사, 156년 아달라왕 3년 계립령(조령) 개통, 158년 아달라왕 5년 죽령로 개통 등의 기사에서 보듯이 경상북도 지역 대부분과 경남 동부지역을 통합하여 사로국을 완전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야연맹은 각 부족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개별로 소국가 형태에 만족하였다. 강력한 군사동맹을 맺고 그 힘을 발휘했다면 신라를 능가했을 것이다. 신라가 가야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 등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어서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기 400년 전후 신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가 남진하여 굴복한 이후부터 국력이 쇠약해지고,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잡았다. 서기 532년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구형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가락국-금관가야가 망하였다. 신라군이 침략해오기 전에 평화적으로 항복하였기 때문에 금관가야 왕족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구형왕의 자손인 김해김씨가 남한에서 약 445만 명으로 성씨 본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 형제국인 대가야는 신라와 끝까지 치열하게 싸우다가 562년 멸망하고 말았다. 오늘날 대가야의 후손이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다. 가야연맹이 붕괴하고 망하면서 그 나라의 왕족, 귀족, 백성들이 모두 김해김씨로 수렴됐을 것이다.
이어서 나무위키는 금관국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금관국은《삼국지》<위지> - 동이전 –의 변진구야국 또는 구야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사서에 처음 등장한다. 한편 한국 측 사료인《삼국사기》에는 금관국(金官國)으로, 일본측 사료인《일본서기》와 이 책에서 인용한《백제기》에서는 수나라(須那羅), 남가라(南伽羅) 등으로 등장한다.
특히《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 남가라, 남만(南蠻), 수내라(須奈羅), 소내라(素奈羅) 등의 여러 가지 이칭으로 등장한다. 이 중 '수내라'(須奈羅)나 '소내라'(素奈羅)와 같은 이름은 '금관'(金官)이라는 국명과도 연관되는데, 즉 '쇠나라'라는 뜻이며, 이것은 김해 구야국이 당시 철의 주산지였음에 기인한다.
한편 임나(任那)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큰데,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나빠졌지만 일본쪽 기록에만 나오는 명칭은 아니다.《삼국사기》<강수 열전>에서도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 했고, 최치원이 지은 진경대사탑비(924년)에도 '임나왕족'(任那王族)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나온다. 《일본서기》에서는 대체적으로 '임나'가 변한의 여러 국가들을 통칭하는 표현이었는데, 임나일본부설로 인해 이 표현에 대해서는 현대 한국인들의 거부감이 심해졌다. '南'은 '任'이라는 중국측 사서들의 기록들을 근거로 임나를 남가라(금관국)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책자마다 다르지만 전기 가야 시대의 금관국의 국명을 가락국으로, 후기 가야 시대에는 금관국으로 통일해서 표기하는 책도 있다.
현재 학계에서 구야국이라는 표현은 보통 초기 금관국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 고대 사학계의 주요 논거인《삼국사기》의 '금관국'을 문서 이름으로 한다.」
이어서 나무위키는 가락국의 건국신화에 대한 두 가지 설을 소개한다.
「서에는 크게 두 가지의 건국신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로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서기 42년 당시 김해는 9명의 '간'(干)이 추장으로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구지봉에 사람들이 모여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다. 그 알들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수로왕이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각자 5개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출생 신화는 최치원이 쓴《석이정전》을 인용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천신인 이비가지와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 사이에서 반파국(대가야)의 초대 국왕인 이진아시(뇌질주일)와 금관국의 수로왕(뇌질청예) 형제가 태어났다고 서술했다.
전자는 철저히 김해 금관국 중심적인 서사로, 김해 가야계 후손 측의 전승으로 보이며, 기존 세력(9간)을 바탕으로 이주민 세력(수로왕)이 추대를 받고, 6가야 연맹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보여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원형을 일부 잃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자는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로 표현된 고령의 토착 재지 세력이 중시되고 있으며, 옛 강국인 김해의 역사성은 형제라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고령 반파국(대가야)을 형으로 설정하는 등 반파국이 강국으로 떠오른 후기 가야 제국(諸國)의 판도를 반영한 신화의 전승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나무위키는 《삼국유사》가 인용한 《가락국기》를 소개한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6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 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은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
雞林先定, 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兹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刑. 内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羣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風吹雲卷, 空碧天青. 下六圎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兹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徳, 爲世作程. 寳位初陟, 寰區欲清. 華構徴古, 土階尚平.
万機始勉, 庻政施行.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譲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㱓. 乾坤変氣, 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苖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䂓儀不傾.」
직계로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맏이 거등왕계 김해김씨가 약 445만 명이고, 수로왕의 둘째, 셋째 아들 후손인 김해허씨, 양천허씨, 태인허씨가 약 21만 6천 명이다. 외예(外裔)도 수백만 명은 될 것이다. 나도 외예(外裔)다. 아내가 김해김씨다.
이번 김해여행에서 김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참배하면서 감회가 깊었다. 예전 사진을 보면 김수로왕릉이 돌로 쌓인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단정하게 정비, 우리 전통 말로는 가토가 돼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조선시대에는 직계인 허엽이 김해부사로 있을 때 중수를 했고, 현대에는 대한민국이 잘 정비하여 사적지로 보존하고 있다. 앞에 우뚝 선 비문에 보니 직계들과 함께 여러 분 외예들이 비문을 짓고 세웠다. 친가든 외가든 조상을 생각하며 잘 모시려는 정성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이다. 이 전통이 있어 우리 대한민국이 유구하게 발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