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강(국문과 4학년)
그동안 아픈 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 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어째서… 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됭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1992년 연세춘추 당선작, 한강, 편지(국문과 4학년)
1992년 연세문화상 당선자 공고
1992년 연세문화상 문학상 심사평 및 당선 소감
● 다음 시를 음미해 보자. 시대는 다르지만 이 시인도 울고 있다.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만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만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 '왕십리'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 강이 다녔던 학교와 같은 학교인 연세대(일제강점기 때 교명은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던 윤동주가 쓴 시다. 슬픔을 노래하는 두 시인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지 않은가.
● 한강은 시를 쓰는 사람이기에 인간의 깊은 슬픔과 비애와 화해와 사랑을 탐색하는 소설을 시적인 언어로 능수승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
첫댓글 이제보니 한강과 윤동주 시인이 닮은 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