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퍼왔어요!!)
밤이라 불리던 시대, 별처럼 빛났던 한 사람이 있었다.
한 시대의 구원을 믿었던 사람.
세상 가장 낮은 자리의 나환자들을 사랑했던 사람.
아들을 죽인 원수마저 사랑했던 사람.
그의 생이 끝나는 곳에서
사랑은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다.
■ 기획의도
손양원. 그 이름은 사랑의 상징이다.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린 손양원의 삶은 세 개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나환자의 상처에서 피고름을 빨아내는 첫 번째 그림.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청년을 양자로 삼은 두 번째 그림.
그리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인간이 만든 지옥과도 같았던
전쟁 중에 신앙인으로 순명(順命)하며 순교자의 길을 간 세 번째 그림이 그것이다.
그의 삶은 마치 진정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스스로 ‘사랑’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
여전히 풍요의 한 편으로 그림자처럼 짙어지는 가난과 소외…
더 이상 구원을 꿈꾸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한 사람을, 한 시대를 구원할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이 프로그램은 사랑과 구원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성탄절을 맞아
온 생애를 ‘사랑’으로 밀어간 순교자 손양원의 삶과 죽음을 조명한다.
또한 그가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기까지 극한의 비통을 겪으며 보여준
인간적인 고뇌와 성찰의 흔적들을 통해 우리 시대를 구원할 참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1948년 애양원 당회원들과 손양원
손양원의 옥중 편지
■ 주요 내용
■■ 신화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죽음
손양원은 1902년에 태어나 1950년까지 짧은 생을 살았다. 자신과 함께 한 나환자들을 두고 피난할 수 없다며 애양원을 지키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아깝다고 입을 모은 마흔여덟 살의 나이였다. 하지만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양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행적에 대해 ‘예수의 심장을 가진 성자’라고 칭송하며, 저 높은 곳에 올려둔 채 신화화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정작 손양원이 있었던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그늘지고, 불편한 곳이었다.
■■ 구원은 무엇으로 오는가?
순교자. 나환자의 아버지. 원수를 사랑한 사람. 손양원을 설명하는 이 단어들은 숭고하되 무게가 너무 커서 그와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민족주의자라 하는 것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그를 반공주의자로 보는 것도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손양원이 살았던 삶의 폭과 깊이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벗고 인간 손양원의 행적과 내면을 응시할 때 비로소 그가 보여준 사랑의 의미들이 제 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좌우가 아니라 단지 신의 편에 있었던 사람. 손양원이 꿈꾸었던 한 시대의 구원은 이념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 ‘사랑’ 그 자체였다.
■■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 – “너는 십자가를 지기를 꺼리지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나’는 죽는 거란 말이야. 완전히 날 버리는 겁니다. 그런 것이 신앙의 기본인데,
우리 손양원은 그대로 산 사람 아니오?” — 방지일(103세) 원로 목사 (손양원의 평양신학교 1년 선배)
“자식도 하지 못하고, 형제도 하지 못하는 나환자 상처에 입 대고 빨아낸다는 것은, 못해요.
다른 사람은 못해요. 내 부모라도 자식이라도 못한다니까요.” — 김판임 (87세) 할머니
“지금도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다가도 우리 목사님이 저희 나환자들한테 사랑 베푼 것을 생각하면,
목사님 언제 만나볼까요? 그 말이 저절로 나와요.” — 권00 (91세) 할머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일본 동경의 스가모 중학교로 유학을 간 조선의 청년. 그가 지배자의 나라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학공부를 이어가는 한편,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함께 마치 순례자와 같은 목회를 시작했다. 1926년 부산 감만동교회에서 나환자들을 대하며 그들을 위한 삶을 꿈꾸었던 손양원은 평양신학교 졸업 후 여수 애양원에 부임한다. 그곳 또한 나환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통스럽게 살았던 사람들. 손양원의 사랑은 어둠에 젖지 않는 불빛처럼 그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일본의 감옥에 갇혔던 몇 년의 시간을 제외하고 순교할 때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한 손양원의 삶. 그는 스스로의 믿음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모습은 그대로 용서와 사랑, 구원에 대한 살아있는 대답이었다.
생전의 손양원을 기억하는 김판임 할머니 (87세)
손동희 여사와 이철환 작가
■■ 한 순교자가 남긴 빛나는 유산 ‘사랑’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에서 손양원은 두 아들을 잃었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 아비규환의 살상과 보복 속에서 손양원은 자신의 아들들을 총으로 쏜 원수 청년을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고, 마침내 그 청년의 목숨을 구해 양자로 삼았다.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손양원의 행동은 당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조차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2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손양원은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두고는 피난을 갈 수 없다며 교회에 남아 있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온 생애를 ‘사랑’으로 밀어간 사람. 그리하여 그의 영혼은 마침내 천국에 닿았을까? 그는 삶의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구원하는 영혼, 사랑으로 구원하는 시대를 꿈꾸었다.
손양원, 이제 그의 삶과 죽음이 남긴 ‘사랑’이라는 유산이 우리 속에 되살아나야할 시간이다.
■ 프로그램 제작방향과 특이사항
■■ 손양원의 삶에서 건진 따뜻한 성탄 동화
불과 6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인물이지만 손양원에 대한 영상 자료는 몇 컷의 사진이 전부다. 이에 제작진은 손양원의 삶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맏딸인 손동희 여사의 회고록과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참고해 손양원의 일화를 TV동화와 같은 삽화로 재구성했다. 특히 손양원과 나환자들 사이에 있었던 감동적인 실화들은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따뜻한 성탄 동화가 될 것이다.
■■ 손양원의 삶을 생생히 기억하는 마지막 증언자들
기획단계에서 제작진의 고민은 손양원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생존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특히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한 손양원의 모습, 마지막 순교 상황에 대한 증언이 절실했지만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고령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그러나 촬영이 시작되고, 프로그램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놀랍게도 소중한 증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수 애양원에는 당시 손양원에게 직접 세례와 학습을 받은 나환자 노인 몇 분이 생존해 있었고, 당시의 학적부와 주소지를 추적한 끝에 손양원의 둘째 아들의 친구이자 손양원의 마지막 순교상황을 목격한 유일한 증언자 역시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 뉴욕에서는 손양원의 두 아들이 여순사건으로 희생된 상황을 목격한 인물의 인터뷰를 담을 수 있었다. 증언자들이 모두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손양원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이 좀 더 앞서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손양원과 나환자들의 생활 증언 : 김판임 (87), 권00 (91), 이동훈(83)
-손양원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증언 : 김성수 (73)
-여순사건 당시 손양원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순교상황 증언 : 나제민 (83) (미국 뉴욕 거주)
■■ 상처 입은 소녀를 찾아서 –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안내하는 프리젠터, <연탄길>의 이철환 작가
세상에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칭송받았던 손양원.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삶으로 인해 딸의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사춘기 시절에 두 오빠를 잃은 맏딸은 원수를 용서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아버지마저 순교하자 신을 원망하기에 이른다. 그 상처는 오래도록 치유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손양원의 맏딸인 손동희 여사의 회고록을 줄기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며, 특히 상처 입은 소녀의 고통과 그 치유의 과정을 시청자들에게 안내하는 프리젠터 역할은 베스트셀러 <연탄길>의 저자로 우리시대의 사랑에 대한 탐구와 사색을 보여준 이철환 작가가 맡았다.
■■ 일본에서 찾은 손양원의 발자취
일제강점기 부친 손종일의 만세운동으로 서울 중동중학교에서 퇴학당한 손양원은 막다른 길목에서 일본 유학을 선택한다. 그가 다닌 도쿄의 스가모 중학교를 찾은 제작진. 비록 전쟁으로 인해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진 않았지만, 손양원의 삶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를 통해 그가 다녔던 동양선교회 자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손양원이 일본 유학시절에 감명 받은 나카다 주지의 영향에 대해 인터뷰했다.
■■ 연출자의 말
우리는 손양원을 어떻게 기억해왔을까요?
일본에 저항해 신사참배를 거부한 독립운동가, 나환자들의 친구,
혹은 억울하게 순교한 두 아들의 주검 앞에 감사기도를 올린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것도 아니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성자…..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지나간 시대의 성자나 위인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속에, 살아있는 대답으로서, 손양원의 사랑을 다시 보셨으면 합니다.
인물
- 생몰
- 1902년 6월 3일(경남 함안군) ~ 1950년 9월 28일 (향년 48세) | 호랑이띠, 쌍둥이자리
첫댓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실천한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의삶
천국에서 편안함을 삶을 영위하소서!
"아버지의 사랑은 무덤까지 이어지고,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수행자의 사랑은 그 영원까지 뛰어 넘는다" 고 하드니...
손양원 목사님의 삶이 그러하십니다. 이 나라에도 예수님이 재림 하셨군요!
벽송님!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