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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세출예산 |
군사비 |
1900 |
6,161,871 元 |
1,630,000 |
1901 |
9,078,682 元 |
3,590,000 |
1902 |
7,765,491 元 |
2,780,000 |
1903 |
10,765,491 元 |
4,120,000 |
1904 |
14,214,298 元 |
5,180,000 |
1905 |
19,113,665 元 |
4,850,000 |
출처 이윤상 “1894~1910년 제정제도 운영의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청구논문
1901년에 이르면서 대한제국의 예산규모는 확실한 증가세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그 중 군사비에 대한 지출이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며 증가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만주에 대한 러시아에 대한 점유를 인정하며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인 받는 외교적 타협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반대급부인 한반도에서의 대한제국이 지속적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또한 그것을 빌미로 러시아와 교섭을 확대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유일한 배타적 식민지 영역인 한반도의 상실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안이였다 이에 대하여 다방면에 걸친 대한제국에 대한 견제를 구사하게 되는데 제국의 상당수의 고급관료를 매수 대상으로 하여 그 공작을 통해 내각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황제권을 견제하여 그 근대화의 방향을 일본의 정책적인 이익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방침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국에서의 황제권을 보전하고 역정보의 탐지를 통해 일본의 공작을 확인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국 익문사라는 정보기관이 설립되게 된다. 이는 흡사 체카와 KGB의 기원이라 평가받는 러시아의 황제원 제 3부와 비슷한 기관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황제원 제 3부가 전제정을 위협하는 인민주의자를 비롯한 일부 혁명가 집단에 그 초점이 집중된 것과 달리 대한제국의 제국 익민사는 전제정의 보전 이외에 일본에 대한 정보 수집과 견제가 중요한 사업이라는 점이 그 특징이다.
기관의 구조
제국익문사는 황제 직속의 제실기관의 형태로 총책인 독리는 “특별히 帝室의 親臣 1인으로 “임명 되었으며 (제 22조) 독리 아레는 3개 분과의 직책을 두고 활동원으로 상임 통신원 15인 보통 통신원 15인 특별 통신원 21인 외국 통신원 9인 임시 통신원 61인 이상을 두었다.
활동지역
1. 국내의 13도 관찰부 목, 부군, 2. 8개의 개항장 3. 외국공관과 외국인 거류지 4. 외국 일본: 東京, 大阪, 長崎 중국 : 北京, 上海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 여순
수집된 정보는 제국 익문사 본사에서 정리하여 화학 비사법을 통한 밀서의 형태로 황제에게 보고가 되었으며 봉투에 황실 문장인 오얏꽃과 성총보좌라는 문장을 넣은 인장으로 봉인을 하였다.
정보활동에 대한 주요 대상은 다음과 같다.
일본 수비대장관과 경과, 일본 정당과 낭객, 일본 상인배로 폭약 등 각종 금물을 몰래 거래하는 자, 일본인 조선협회 지회, 일본 정토종 교당, 인천과 부산의 일본 철도회사, 일본인 경영의 한성신보사, 일본 전신 수비대와 헌병, 일본인 창립학교와 그 학생, 일본인으로 뚜렷한 이유없이 돌아다니는 자. 일본인으로 인삼을 몰래케고 증삼(인삼을 찌는것)하는 자 일본인으로 내지에 함부로 거주하는자.
제국익문사 관련 조문--전문 24개조(생략)
첫댓글 아 ! 안타깝도다. 1897년 시작한 고종황제의 광무개혁이 30년만 빨랐어도
청천백일하에 극악무도한 왜놈들에게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되고 마침내는 국권까지 피탈당하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은 겪지 않았을 터인데...
현재 일본의 하는 짓거리를 보면 조선 말과 별 다를 것이 멊는데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일본 놈들에게 약점
잡히지 말아야지. . . 그놈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악독한 종자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