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교당 봄철 성지순례
일시 : 원기 95, 5, 21-22
장소 : 성주와 만덕산 성지
<주요 진행자>
박경선 회장 : 전체 총괄
김정상 부회장 : 재무 및 방배치, 기타 준비
조인영 부회장 : 차내 의식진행 및 원장님 강의 사회
여자단 : 식사공양
<주요 일정>
5월 21일 : 부처님오신날 봉축식(10:30) --> 버스 승차하여 성주로 출발(12시)
-->(차내에서 점심공양) --> 성주도착(오후3:30) ~ 성주성지순례(기도식포함),
성주 출발(오후6시) -->만덕산 도착(오후8:30 : 휴게소에서 저녁공양)
--> 숙소 배정후 회화(오후9:30~10:30) --> 취침
5월 22일 : 아침 기상(06:00), 초선터로 출발 --> 초선터에서 기도식 거행(06:20-50)
--> 아침 공양 및 휴식(07:00-09:00) --> 원장님 강의(09:00-10:00)
--> 만덕산 출발(10:10) --> 마이산 관광 후 점심공양 --> 운일암 반일암
용담댐 관광후 금산거쳐서 서울로 출발(오후 4시) -->휴게소에서 저녁공양
--> 교당에 도착 해산(오후 7시)
<성주성지>
정산종사 탄생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소재, 정산종사가 부친 송벽조 정사와 모친 이운외 정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집이며, 주산 송도성 종사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정산종사는 9세까지 이 집에서 자랐다. 마을 뒷산은 달마산으로 장삼을 걸친 달마대사가 앉아있는 것 같은 큰 바위가 정상에 솟아 있어 바위 이름도 달마바위며 산 이름도 이에 연유되어 붙여진 불연(佛緣)의 고장이다.
본채는 5간 흩집으로 지붕은 볏짚 이엉을 얹었며 사랑채는 기와집으로 아직 원형대로 남아 있는데 사랑채에서 정산종사가 조부 송훈동선생으로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8세시부터 본격적인 한학공부를 했다. 바로 옆에는 동리 당산제를 지내는 느티나무가 있고 동리사람들 모임터가 있다. 마을 옆으로 큰 내가 흐르고 있으며 정산종사가 이사하여 성장하신 소야 성장지와 도를 얻으신 [소성구도지]비가 세워져 있는 박실마을은 1km쯤 떨어져 있다.
정산종사의 부친 송벽조의 집안은 대대로 선조들이 살아오던 고산정에서 생활하다 첫 아이를 낳기 전, 고개 둘을 넘어 소성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당시 소송동에는 송벽조의 외가인 전주 이씨들이 한약방을 하며 살고 있었다. 또한 소성동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고산정 마을의 선비를 모시려는 까닭으로 인해 고산정에서 소성동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뒷날 정산종사는 소성동의 풍경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천하를 서로 사양하고, 제후들은 서로 아홉 고을을 사양하매, 그 화가 지극하면 천하에 충만한지라. 그 전경을 풍류에 올린즉 봉황이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인화는 양보로써 이루어지고,화가 지극하면 천하의 기운이 따라서 통해지는 것이다.
소성동은 이처럼 화로써 천하를 평화롭게 할 성지가 탄생할 곳이었다. 정산조아는 1900년 8월 28일 (음 8월 4일) 경북 성주곤 초전면 소성리 464번지에서 부친 구산 송벽조 와 모친 준타원 이운외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탄생했다. 소성동에서 조금 밖으로 나와 박실마을이 있고, 조금 더 나와 연봉, 봉무 마을이 있다. 이는 고대 중국 순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시절, 사양의 덕을 노래하니, "봉황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라는 옛이야기에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라 전해 오고 있다. 소성동 마을 뒤에는 달뫼가 변음되어 불리워지는 달마산, 형제봉, 연봉, 허봉 등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봉황이 춤추는 땅이라고 한다.
정산종사는 탄생가 사랑채(동네 아이들의 서당이기도 했다)에서 조부 송훈동 선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8세시부터는 본격적인 한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정산종사 9세경 <통감>을 배웠는데 스스로 문득 생각하였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나라를 바로 세우는 큰 인물이 되지 못한다면 어찌 후세에 대장부라 이름할 것인가. 혼란한 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경륜을 쌓아야겠다. 이 때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기 2년전 이었다. 이 때 이미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산종사 탄생가는 지난 원기 79년 10월 20일에 정산종사가 탄생한 본채와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 사랑채는 해체복원하고 헛간은 개축하여 복원준공식을 가졌다. 정산종사가 탄생한 방에는 정산,주산종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어 순례객들이 참배를 올리고 있다. 돌담, 우물, 느티나무들이 그대로 있어 정산종사 어려서 뛰어 놀았으리라 생각되는 그날의 정취가 그대로 배어 있는 것 같다. 정문 입구에 삼동윤리비가 서있어 정산종사 사상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이 탄생가에서 정산종사의 친동생인 주산 송도성종사가 정산종사 8세시 태어났다. 정산종사는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기뻐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며 마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한다. " 동네 사람들, 우리집에 장수가 났어요. 어서 와서 봐요. 우리집에 큰 장군이 났단 말이요. "정산, 주산종사 형제분이 탄생한 구성은 탄생지, 소야는 성장지, 박실은 구도시에 거주하던 곳이다.
송규 (宋奎)
1900~1962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 본명 도군(道君), 법호 정산(鼎山).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부친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와 모친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호대하며 기상이 화청하여 선동(仙童)이라 불리웠다. 8세경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세계를 바로잡고 모든 인류를 구제하는 큰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 각처를 헤매다녔다. 16세경에 당시 신흥종교의 본거지이던 전라도로 와서 보천교의 교조인 차경석을 만나 보았으나 그가 정법도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법의 스승을 찾지못해 우울한 심경으로 모악산 대원사에서 혼자 수행에 전념하던 중, 마침 이 절에 불공하러 온 김해운(金海運)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김해운의 간청에 따라 정읍시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집으로 가서 몇달동안 혼자서 기도하며 수행 적공했다. 1917년(원기 2)에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화해리를 찾아와 처음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에 송규는 영광으로 가서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師第之誼)를 맺었다. 이 때부터 송규는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서 다른 구인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에 적극 노력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부안 봉래정사에서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제정할 때에 크게 보필하였다. 교리 제정에 기여한 공로로 인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그를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라고 까지 칭찬하였다. 이후로 송규는 익산총부와 영산성지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1943년(원기 28)에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종통을 이어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만덕산 (萬德山) 성지>
만덕산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 위치하고 있는 8백여m 높이의 산. 진안군 완주군 임실군 등 3개군의 경계로서 곰티재·마재 등의 크고 험한 고개가 있다. 영산·변산·익산 등과 함께 원불교 성지의 하나로 되어 있다. 정산 종사가 이곳에서 최도화(崔道華)를 만났고, 이어 소태산 대종사도 봉래정사에서 이곳을 찾아 3개월 가량 머물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4년(원기 9) 5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직후 이곳 만덕암(萬德庵·김씨 소유의 산제당)에서 원불교 최초의 하선(夏禪·비공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만덕산 초선회라 한다. 이 때 같이 참석했던 사람들은 소태산 대종사·송규·오창건·김광선·전음광·박사시화·이청춘·노덕송옥·전삼삼·이동진화·김삼매화·김대거 등이었다.
이 때 가장 나이가 어린 11세의 소년 김대거는 뒷날 출가하여 송규의 뒤를 이어 법통을 이었다. 만덕산에는 뒤에 농원과 훈련원을 세워, 영육쌍전·이사병행의 정신을 생활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마이산(馬耳山)
높이 673m, 마이산(馬耳山)은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에 있는 산이다. 1979년 10월 1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산은 신라시대에는 서다산으로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 조선 태종때부터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이라 불리어 왔다.
중생대 후기 약 1억년전까지 담수호였으나 대홍수시 모래, 자갈 등이 물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으로 약 7천만년전 지각 변동으로 융기되어 지금의 마이산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간혹 발견된다.[1]
높이는 서봉(암마이산) 685m, 동봉(수마이산) 678m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경계에 있으며, 동봉과 서봉의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하여 마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질은 백악기의 역암(礫岩)이다. 남쪽 비탈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시작되고 북쪽 비탈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 불렸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동봉과 서봉 사이에 448개의 층계가 있고, 동봉 중턱의 화암굴에서는 약수가 솟는다.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인 탓에 나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데군데 관목과 침엽수활엽수가 자란다. 4월에는 공원 입구에서 3㎞에 걸쳐 벚꽃이 만발해 진안군에서 주최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 동봉은 오를 수 없다.또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마이산탑(전북기념물 35), 마이산줄사철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380)를 비롯하여 은수사(銀水寺)금당사(金塘寺) 등의 고찰이 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掛佛幀:보물 1266), 목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18), 석탑(전북문화재자료 122) 등의 문화재가 있다.1979년 10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3년 10월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 12호로 지정되었다.
운일암반일암계곡 [雲日巖半日巖溪谷]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고도 한다. 운장산(雲長山:1,126m)을 기점으로 동북쪽의 명덕봉(846m)과 명도봉(863m)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큰 협곡을 이루면서 생긴 계곡으로 주자천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주위는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있다. 주자천은 운장산 북쪽 골짜기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굽어 주천면과 용담면을 거쳐 용담면 월계리에서 금강 상류에 합류한다. 고려 때 송나라 주자의 종손 주찬(朱瓚)이 다녀갔다 하여 주자천 또는 주천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주천사에서는 주찬 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린다.
예전에는 이곳 용담현에서 전주로 가는 길이 이 계곡뿐이었는데, 골짜기가 워낙 깊어서 반나절도 못 가 해가 떨어지거나 구름에 가린 해밖에 볼 수 없다 하여 골짜기의 이름을 운일암반일암이라고 했다.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푸른 물, 우거진 숲, 4월의 진달래, 5월의 철쭉, 여름 계곡, 가을 단풍, 겨울 설경이 절경을 이룬다.
용담댐
용담댐 이라고 하는 용담다목적댐은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금강 상류에 있으며 1990년 착공해 2001년 10월 13일 완성되었다 최근에 완공되었다. 높이 70m, 길이 498m, 총저수량 8억 1500만t 의 콘크리트 차수벽형 석괴댐으로 총 공사비는 1조 5889억 원이 소요되었다.
주요시설로는 21.9㎞의 도수터널와 도수터널 끝에있는 수력발전소가 있다. 용담댐으로 생겨난 용담호는 저수량기준으로 소양호, 충주호, 대청호, 안동호에 이여 5위이다.
용담댐은 호남평아지역인 익산, 김제, 군산, 정읍, 전주와 군산, 장항 산업단지에 생활, 공업, 농업용수을 공급하고있고 여수로(餘水路) 5개가 댐 왼쪽에 설치되어 있어 상습 침수지역인 금강 중류·하류 지역의 홍수를 대비할 수 있게 건설되었고, 수력발전소에서는 연간 1억 9800만㎾의 전력을 생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