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3·1운동과 문화
1장 난민 / 코스모폴리탄 -국경을 넘는 사람들
1.3·1 운동을 기점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
-이의경(이미륵): 경성의대 학생, 탑골공원 독립선언식 참여→상하이→1920년 4월 중국인 신분의 여권을 얻어 유럽으로(안중근 동생 안봉근 동행)→독일 의과대학 입학 및 포기→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전공, 박사학위→문학으로 전향. 1931년부터 단편 발표→ <압록강은 흐른다>,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출판. 1950년 사망
-강용흘: YMCA에서 영어학습 및 선교사 번역 작업 보조, 3·1운동 참여→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의학 학습 및 포기→하버드대에서 문학 전공→뉴욕대에서 영작문 강의→<초당>, <동양인 서양에 가다> 출간→해방기에 잠시 미군정청 출판부장 →1972년 사망
=>이미륵과 강용흘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
-이밖에도 현순, 유치진, 박헌영, 심훈, 장지락, 주세죽, 이상화 등이 국외행. 이즈음 중국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도 프랑스로
2.3·1 운동 전 떠난 사람들
-이위종: 13세인 1896년 주미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도미→프랑스 육사 졸업 뒤 프랑스 소위로 임관→러시아 공사관에서 일할 때 헤이그 밀사로 파견. 그 뒤 러시아인으로 살다 러시아 내전 중 사망
-이밖에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이광수, 이극로, 이태준, 김필순, 이회영, 박은식 등이 유학, 망명, 이민 등 또는 복합적 요인으로 국경을 넘음
Q)
-당시 젊은이(지식인)들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건, 한반도 바깥에서의 삶은 어떤 의미였을까?
-3·1 운동이 젊은이(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그들은 조국을 어떻게 기억하고 또 등져야 했을까?
2장. 이중어 -제국의 언어와 민족의 언어
1.1910년대...
-이광수, 주요한, 김동인, 염상섭, 김우진, 심훈 등 작가들 일본어 습작. 일본 문학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 문학에의 참여 의지 자극. 그 뒤 이광수는 『매일신보』와 『청춘』을 무대로 ‘조선어로 쓰는 조선 문학’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등 문인들 한글 글쓰기에 매진
-1910년대 언어 상황은 식민 권력의 유학 정책과 한문 정책으로 한글과 일본어 외에 보다 복잡. 다중언어 사회
-조선인 사이 일본어 해독률은 1913년 0.61퍼센트, 1930년대 10퍼센트, 그 뒤에도 20퍼센트 안팎에 머뭄. 반면에 타이완은 1940년 50퍼센트 돌파, 1943년 말에는 80퍼센트. 타이완은 지역별 종족별로 방언이 다양했기 때문에 일본어가 공통어 역할...
2.3·1운동 전후, 1920년대...
-한글운동, 문학운동, 동인지 등으로 한글의 문화적 역량 강화. 한글 글쓰기 및 문학 작품 풍성해짐. 이는 3·1운동 뒤 ‘문화통치’적 전환 속에서 민족어 글쓰기의 공간이 크게 확대되면서 가능
-최남선, 이광수는 신문관과 『매일신보』 등을 통해, 박은식, 주시경, 김두봉, 이규영 등은 조선광문회를 통해 한글 운동
-1900년대 김기진 등 『시의 구락부』, 박종화 등 『피는 꽃』, 유치진 등 『토성』 초보적인 언론 실천 경험... 그 뒤 한글운동과 문학운동은 인적 관계를 통해 밀접하게 결합.. 동인지 시대를 염. 1919년 1월 창간된 『창조』는 매호 1000∼1500부, 『폐허』는 1000부, 『청춘』은 평균 2000부 판매...
-“한국 근대문학사는 그 출발부터 이중언어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3·1운동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은 한글-민족문학을 정상태로 여길 수 있었고...
Q)
-우리말과 글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시대별로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3·1운동이 우리말과 글에 끼친 영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