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천주교 성지 (16) 왜관 가실성당
어떻게 알았을까? 칠곡 왜관읍 낙산리 가실성당 종탑에 모셔져 있는 ‘안나의 종’은 도저히 생명이 발붙일 곳이 없는 사막과도 같은 ‘조선땅’에 아름다운 꽃(선교)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기와집 가실성당이 세워진 지 112년, 유럽풍 신로마네스크식 가실성당에 종탑이 들어선 지 83년이 지났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실성당의 종소리는 낙동강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정겹게 울려퍼진다.
“빛으로 태어난 아기 예수처럼 새로운 삶, 새로운 탄생을 원하면 오세요. 피곤해도 오세요. 세상풍파에 지친 모든 영혼을 환영합니다.” 누구나 품에 안을 듯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가실성당이지만, 너무 오래되어 아무나 쉽게 올라갈 수 없는 종탑에 모셔져 있는 가실성당 ‘안나의 종’은 아침저녁마다 소리로 사람을 만나며 이렇게 속삭인다.
“사막의 아름다움은 꽃처럼 퍼질 것입니다.”
천주교회의 불모지 한국을 사막에 비유했던 그 말처럼,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가톨릭 못자리로 변했다. 400만에 달하는 교세에 걸맞게 한 사람의 추기경이 더 나와야 한다는 바람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선교사의 힘에 의하지 않고 이승훈이 북경까지 가서 자발적으로 영세를 받음으로써 세계 가톨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드는 자생교회의 역사를 이룬 곳이 바로 한국이다. 수많은 순교자의 피는 초창기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은총이 되어 되돌아왔고, 그 은총의 시기에 한국교회를 이끈 사적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왜관 가실성당이다.
낙동강변에 들어선 대구대교구 두 번째 본당
왜관 가실성당은 우리나라에서 11번째, 천주교대구대교구에서 계산성당에 이은 두 번째라는 오랜 연륜을 지녔다. 대구 첫 본당인 계산성당의 전신인 칠곡 신나무골 연화학당처럼, 가실성당에도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치던 학당이 있었고, 한국천주교회사의 영광과 아픔을 한몸에 품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가 들어서면 왜관 가실성당의 위상도 달라질까? 가실성당은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들어서 있다. 왜 이곳에 들어섰을까? 당시 낙동강은 빠르고 편한 수상교통수단으로, 경상도 곳곳을 순회 사목하러 가려면 경상도 전체를 관통하는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 따른 것일 것이다.
가실성당이 설립된 것은 1895년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산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614번지인 가실성당은 원래 1784년 한국천주교 설립 당시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가 살던 집터 일대이다. 성순교는 추사 김정희와 막역한 친구 사이이다. 젊은 시절,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간 성순교는 홀로 남아서 세계일주를 하였는데, 이스라엘까지 다녀왔다는 행장이 남아있다. 이런 것이 영향을 미쳤을까? 성순교는 우리나라 마지막 박해인 경신박해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난갔다가, 그 이름처럼 1861년 상주에서 순교하였다. 상주로 옮겨가기 전에 성순교는 가실 집을 외가에 맡기고 갔는데, 주인이 순교하자 집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가실성당은 경상도 서북부 선교의 거점
당시 경상도 지방 선교책임자로 부임한 김보록 신부는 칠곡 지천 신나무골(현 연화리)에 대구본당을 설립하고, 선교에 박차를 가하며 경상도 북부지역 선교의 전초기지를 마련하려고 하였는데, 가실에 살던 성순교의 얘기를 들었으리라. 순교한 성순교의 정신도 살릴 겸, 선교를 할 본당으로 삼을 만한 집도 필요하던 터라, 천주교에서 사들였다.
당시 집을 사들이고, 신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 사람은 김희두(천주교대구대교구 김경식 몬시뇰의 할아버지)였다. 이렇게 성순교가 살던 기와집은 첫 가실성당 본당이 되었다. 그래서 성순교 가문의 유적비가 성당 정면에 들어서있다. 가실본당은 이렇게 생기게 되었다. 가실본당의 첫 모습은 요즘 보는 뾰쪽첨탑의 로마네스크 건물이 아니라 성순교가 살던 5칸 기와집이었다. 초대 가실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가밀로 파이아스(한국명 하경조) 신부는 가실본당을 중심으로 성주, 선산, 문경, 상주, 함창, 군위, 안동, 예천, 의성, 김천, 거창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를 아우르는 선교를 하였으며, 한때 관할 공소만 31개였다.
본당 신부들은 말이나 배를 타고, 수십 수백리 길을 걸어 각 공소를 매년 적어도 두 번 이상 순회 사목하였다. 그 덕분에 가실본당은 발전을 거듭하여 본당 설립 6년 만인 1901년 김천(현 김천 황금)본당을 분가시켰고, 점촌 퇴강 왜관 등 영남 서북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많은 본당을 출범시켰다.
대구 천주교회의 초창기 담을 ''가실 100년사''
가실본당은 여름이면 무성한 숲이 좋지만, 겨울이면 숲에 가리지 않은 성당의 원형을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특히 눈 오는 날이면, 은백색 눈과 대조를 이루는 주황색 지붕 그리고 붉은 벽돌집이 절묘한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현재 건물은 1922~1924년 사이에 지어졌다. 길고 동그란 창문이 10개나 나있는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건물로, 설계는 명동성당과 대구 계산본당을 지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박도행 신부가 담당했다.
박도행 신부는 중국 기술자들에게 벽돌을 한 장씩 굽도록 시켰고, 잘 구워진 벽돌은 성당을 짓는 데 썼고,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 데, 품질이 나쁜 것은 버렸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옛 사제관 내 유물관에 보존되어있다. 대구를 제외한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시작해 선교의 요람이 된 가실본당이지만, 현재 가실본당은 신자 수가 350명으로 줄어들고, 공소가 하나이다. 비록 교세는 줄어들었지만, 112년 전통을 지닌 성당답게, 또 수많은 천주교회의 모태로서 가실성당을 아끼는 마음은 본당공동체 구성원들뿐 아니다.
주일이면 나라 곳곳에서 가실성당을 찾아온다. 이런 가실성당의 역사를 담은 가칭 ''가실성당 100년사''가 내년 봄쯤 나올 예정이다. 사실 2011년 100주년을 맞을 천주교대구대교구의 사료 가운데는 가실본당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적지 않다. 1895년 창설 당시 교인의 첫 교적까지 보관되어 있다. 그만큼 역사와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 바로 가실성당이다.
지금도 성체등의 기름을 직접 넣어 쓴다
가실성당은 시원한 낙동강을 앞에 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외관만큼이나 성당 전체가 성서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실성당의 주보성인은 예수님의 외할머니인 성 안나로, 제대 오른쪽에 성 안나상이 서있다. 1923~1924년 가실성당 신축 때 프랑스에서 수입되어 들어왔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안나가 어린 마리아에게 책을 읽히는 모습인데, 종탑에 봉헌된 안나의 종에도 이와 흡사한 모습이 새겨져있다.
지금도 성 베네딕토수도원 소속인 독일인 사제 현익현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성체등에 기름을 넣어서 불을 꺼지지 않게 한다. 과거 교인들이 성체등 기름후원회를 조직해서 그 불씨를 꺼지지 않도록 하려던 정열과 성의를 주임사제가 잇고 있는 것이다. 가실성당은 6·25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낙동강 낙산을 둘러싼 전투는 치열했지만, 양측 군인들이 병원으로 쓰던 가실성당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의 상흔조차 비껴선 가실성당 및 사제관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348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에는 영화 ‘신부수업’이 촬영되기도 하였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서, 가실성당의 감실 및 색유리화는 가실성당을 깊이 느끼기에 제격이다.
성당 곳곳은 성서 말씀 그대로 느낄 수 있어
가실성당은 깊이 들여다보면 성당 곳곳에서 40가지 성서말씀을 체험할 수 있다. 성당 내 10개의 큰 창문에 있는 색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이다. 창문마다 4개의 주제가 있는데,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보면 된다.(일곱 번째 창문은 위에서 아래로 되어있다) 오르간 뒤에 있는 첫 번째 창문에는 성모영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예수탄생, 삼왕경배가 그려져있고, 여덟 번째 창문은 최후의 만찬, 게세마니에서의 기도, 빌라도의 사형언도, 십자가의 죽음이 담겨있다.
사형언도를 받은 예수의 표정이 비굴하거나 처참하지 않고 참으로 당당하고 담담하다. 눈표정도 그분의 지혜를 담듯이 깊이가 있어서 참 좋다. 성 안나상 옆에 있는 마지막 열 번째 창문에는 호숫가에 나타난 예수, 아버지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 승천, 성령강림을 전하고 있다. 3개의 출입문 쪽 위쪽에 있는 반달형 창문 색유리화는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착한 목자의 비유’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종탑의 3개 원형창문에는 하느님의 신비를 뜻하는 은총의 옥좌, 재림예수, 삼위일체를 보여준다. 지금은 전시실로 쓰이는 단층 건물(구 사제관)은 한국천주교회사로 봐서나 대구천주교회사로 봐서나 보물창고이다.
선교사들이 직접 미사주를 채즙하던 포도착즙기, 밍크본이란 화가가 1930년대에 그린 43장의 성서그림, 성체를 만들던 숯제빵기, 100년도 더 된 교적, 요리문답서, 역대 본당신부 사진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미 다른 곳에서는 다 사라져버린 교회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가실성당에 오면 왠지 사람이 예수님처럼 귀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종교성지란 바로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신문, 2007년 12월 27일, 글 최미화 기자, 사진 정우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