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융이 황건적의 침입을 받아 출병하여 도창에 주둔했는데 황건적 관해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태사자는 사흘을 머문 후 홀로 걸어서 도창에 이르렀다. 당시는 포위가 삼엄하지 않아 밤에 기회를 틈타 성안으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성밖으로 출병하여 도적을 격파할 것을 청했으나 공융은 들어주지 않았고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구원하러 오는 자는 없고 포위는 날이 갈수록 좁혀졌다. 공융은 평원상 유비에게 위급함을 알리고자 했으나 성 안의 사람들은 나가려는 자가 없었는데 태사자가 스스로 임무를 맡을 것을 청했다.
태사자는 빈틈없이 여장을 꾸리고 밥을 배불리 먹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건(鞬: 동개, 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에 메는 물건)을 두르고 활을 쥐고 말에 올라탔는데, 두 명의 기병에게 각각 과녁을 하나씩 가지게 한 채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도록 한 채 성문을 열고 곧바로 나갔다. 밖에서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놀라 병마를 출동시켰다. 태사자는 말을 성 밑의 해자(성 밖으로 둘러서 판 참호)로 끌고 가 기병이 갖고 있던 과녁을 세우고 거기에 활을 쏘았는데 활을 다 쏘자 성문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또 이와 같이 했는데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어떤 이는 몸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누워 있었고, 태사자는 과녁을 세우고 활을 다 쏘고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성밖으로 나와서 이처럼 했는데 포위하던 병사 중에 일어나는 자가 없었고, 그래서 태사자는 채찍질을 하여 직접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도적들이 이를 깨달았을 때는 태사자는 이미 빠져나간 후였고, 또 활을 쏘아 여러 명을 죽였으므로 활시위 소리에 맞춰 모두 엎어지기 바빠 감히 뒤쫓는 자가 없었다.
...(중략)...
태사자는 키가 7척 7촌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원숭이같이 긴 팔에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둔영 안의 어떤 도적이 망루 위에서 욕을 했는데 손으로 망루의 기둥을 잡고 있었다. 태사자가 활을 끌러 그를 쏘았는데 화살이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훌륭한 활솜씨가 이와 같았다.』
-오서 태사자전-
뭐 기록대로라면 삼국지11에서 태사자의 특기는 극신이 아닌 궁신이어야 맞을거 같은데, 황충에게 궁신을 주어버려 어쩔 수 없이 태사자에게는 극신을 준 모양인듯. 참고로 황충은 활과 관련된 기록은 전무-_-
그리고 태사자가 장료에게 속아 활에 맞아 죽은 것은 허구임. 태사자는 적벽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병사했음.
첫댓글 해박하시군요 짝짝짝~~~
ㅇㅇ 맞음 일본인이 쓴 책을 보면 적벽전 전에 손권이 주유의 해상권을 부러워해서 태사자랑 같이 서주 지방 동해로 진격해볼까 찌랄 하다가 거기에서 습격맞아 죽는걸로 나옴 태사자가 죽는거지만
장료가 아닌 그냥 서주병사한테??
ㄴㄴ 그 조조가 사주한 해적들
손책도 조조가 사주한 녀석들한테 당한걸로 나오고요
아...연의에서 설례가 욕했을 때 활을 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