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그러나 너희는 - 여기서 이야기가 전환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율법 학자들을 향한 비판을 일단락 짓고 '너희는'이란 말을 강조하시어 청중과 제자들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설교가 단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 이는 겸손에의 요청인 동시에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한 하나님, 한 주님을 모신 교회구성원 안에서 단지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허영심이나 계급 의식을 버리고 오직 섬김의 자세를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특별히 '받지 말라 란 부정 과거형으로서 어느 때라도 칭함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이 금지 조치가 바리새인의 교만을 지적하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당시 특권 의식을 지니고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던 특수 교권주의자들의 권위를 철저히 분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금지 조치는 제한적이며 정신적인 교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 내의 지도자들이나 교사들에 대한 존경 의식마저 금지시키신 것이 아니었다. 교직에 대한 합당한 칭호는 지나친 공명심나 사사로운 명예욕에 근거하지 않는 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 시내산 사본이나 베자사본 등에는 본문의 '선생'(디다스칼로스)
대신에 '지도자'(카데게테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의 흐름상 '지도자'란 말은 10절 이하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본절에서는 바티칸사본이 제시한 바대로 '선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편 본문의 '너희 선생'이 과연 누구냐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즉 (1)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2) 하늘에 계신 모든 존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3) 각 개인의 내면에 내주하셔서 가르치시는 성령이시다. 이 가운데 (1) 의 견해는 비록 후대에 수정된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본문의 표현이 추구하는 바가 예수로 보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많다.
이에 비해 뒤이어지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에 근거해 성도들은 모두가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자연스럽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 유언적 메시지로 성도들의 영원한 안내자요 교사이신 성령을 약속하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뒤이어지는 성부와 성자에 대한 각각의 권위에 대한 삼위 일체 )하나님의 탁월함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3)의 견해도 무시는 할 수 없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단 한 분, 영원한 랍비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라는 이 선언은 (1) 인간중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능가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2) 지금껏 누려왔던 종교상의 독재나 특권을 모두 폐지하시는 것이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므로 어떤 직책이나 전통(傳統)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갈 수는 없음을 명시하신 것이다.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 여기서 '땅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가 대비 되고 있다. 먼저 '아비'란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는 용어로서, 특히 '땅의 아버지'라 함은 그 시대 이전의 율법선생, 또는 위대한 스승, 원로 교사. 어떤 학파의 태두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위와 같은 자들을 절대적으로 숭상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 예수께서는 '땅의 아비'를 '하늘의 아버지'와 대비시켜 종교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사람의 영광과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에 미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사람으로부터 찬양받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암시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종교적 특별 대우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실로 초대고회 성도들은 오직 종교상의 아버지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이 교훈은 광의적,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즉 이 '아비'란 육친적으로도 능히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로, 디모데의 아버지로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지도자 -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서 헬라어로 `카데게타이'라고 하는데, 이말은 `앞서간다', `안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카데게테스'의 복수형태이다. 따라서.이말은 '교사', '스승'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특히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며 그 각각의 제자들을 책임지는 전인적인 스승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감히 자신들에게 이 용어를 붙이곤 했다실로 자기를 추켜 세워 선생이요, 지도자라 하여 사람들은 끌어 모아 이끌어가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 혼란의 시대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 참된 스승이요, 참된 지도자라고 못박는다. 실로 예수께서 앞서(2-7절)
자칭 '지도자'라는 자들의 모순됨을 파헤쳐 비판한 바와같이 그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들이었다. 진정 전인격적인 면에서 모든 이를 바르게 인도하실 분은 예수 한 분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전인격을 그분께 맡기고 오직 그분의 가르침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앞서 가시는 그 분만을 바라며 좇아가야 할 것이다(11:28).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 큰 자는 - 이는 예수께서 질서상 인간 사회(교회 포함)에는 계급이 형성될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큰' 것이 한 개인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겸손과 신뢰와 헌신으로
아래 사람을 섬기는데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 - 타인의 유익만을 위해 성심껏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자를 가리킨다. 실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며 사람들이 존경하는 '큰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정녕 이들의 권위와 능력은 오직 섬김과 봉사와 헌신과 겸손을 통해 드러난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 본문의 역설적 교훈은 자연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법을 반영한다. 즉 종말의 심판에서는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고, 낮아진자를 높일 것이다(겔 21:26). 그리고 본문이 전하는 것은 겸손과 봉사이지 겸손과 혼성된 노예적 봉사 행위나 바보스러움은 아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구절은 복음서에서 여러 군데 발견된다. 빌립보서 2:8, 9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시고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20:26-28에서는 예수 자신이 섬기러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 실로 그가 보여준 겸손이나 타인에의 봉사는 굴욕적이고 노예적인 봉사 행위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그가 행사하는 최고의 권위와 완벽히 조화되었다. 예수는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의 최고의 겸손과 최상의 희생을 완수하신 후, 그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으셨다 한편 이 역설적인 의미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섬김의 자세이다.
다시말해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 섬김과 겸손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이다. (2) 참된 지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3) 이러한 진리는 명령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명령문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자발적 양심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다.
[마 23: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 헬라어 '우아이',는 '오, 슬프다', `아이고'하는 탄식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내리는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2중적 심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즉 현재적이며 또한 종말적(미래적)이다
여기서부터는 계속하여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되는 저주문이 7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주 선언문을 흔히 7화 선언이라 한다. 이 7화 선언은 예수의 신적 인격이 총동원될 만큼 중엄하며,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조용하고도 진실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과 회개를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7화의 대상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임을 말한다.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헬라어 '휘포크리타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위선자'로 번역 되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호칭은 '위선자'라는 아주 모욕적인 언어이다. 이같은 과격한 말은6:2, 5,16;7:5에 그리고 22:18에도 나온다.이렇게 위선자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앞부분절)에서 열거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이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여기서는 위선자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천국 문 - 천국에 들어가는 표현을 '천국 문'으로 표현한 것은 7:7,8,13,14;25:10도 나타난다.
평행구절인 눅 11:52에서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서술한다. 이 말은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의 만용을 부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면서 실천을 하지않아, 자신 마저도 천국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열쇠를 독점하여 들어 가고자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
(3)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적극적으로 천국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곧 그들의 천국 문까지 닫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로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 문을 막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