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1930년에서 32년전이면 1908년 그 당시 30km 완성된 철도네요. 대륙에서는 고종황제는 1908년에 남대문에서 의주까지 철도여행을 하고요.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4월 3일 陽曆 2번째기사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경의선 철도를 완전히 개통하다
국역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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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철도(京義鐵道)가 완전히 개통되었다. 【광무(光武) 8년 3월에 일본국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에서 공사를 착수하여 9년 4월에 용산(龍山)에서 시발하여 신의주(新義州) 간의 열차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그 후에 선로를 보수하고 다리를 놓아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준공되었다.】
순종 2년 무신(1908) 12월 29일(경진, 양력 1월 20일 수요일) 맑음
02-12-29[02] 대황제가 평양ㆍ신의주ㆍ의주 및 개성을 순시할 때의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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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황제 폐하가 평양ㆍ신의주ㆍ의주 및 개성을 순시하는데, 궁정열차의 발착(發着) 일자와 시각은 다음과 같다. 1월 27일 오전 8시 남대문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오후 3시 45분 평양 정거장에 도착, 28일 오전 9시 평양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오후 3시 45분에 신의주 정거장 도착, 29일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같은 날 의주에 도착, 30일 의주에서 출발하여 같은 날 신의주에 도착하는데, 순시 시각은 임시로 마련한다. 31일 오전 9시 신의주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오후 0시 20분에 정주 정거장에 도착, 1시 20분 정주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4시 45분 평양 정거장에 도착한다. 2월 1일은 평양에서 머무르고 2일 오전 9시 30분 평양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10시 35분 황주 정거장에 도착, 11시 35분 황주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오후 3시 55분 개성 정거장에 도착, 3일 오후 1시 개성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3시 10분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1 91권 독립신문 > 重 慶 版 > 제3호 (대한민국 26년 8월 29일)
제3호 (대한민국 26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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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 후 일본 통치하의 한국 형세
王通
1,경제적으로 어떻게 한국 국민을 착취했는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시킨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 총독부와 일본 재벌 및 일본 이민은 한국의 대지주가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먼저 대규모적인 토지 약탈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왜적들은 전반적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한국의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재편성하였다. 그 결과 농민들은 비록 토지소유의 자유를 얻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부담은 봉건시대에 비해 가혹할 정도로 배가되었으며, 토지 개혁자인 총독부에 예속되어 버렸다.
총독부는 농민들을 농노 이상으로 속박하고 있을뿐더러, 토지 소유에 관한 제반사를 재편성하여, 농업 자본주의적인 경영을 알지 못하고 있는 농민들은 사실상 봉건사회적인 생산방식을 답습하여 반봉건적 약탈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총독부는 국유지라는 이름 밑에 1천만 정보에 달하는 토지를 탈취하였고, 연고자가 없다는 이류를 내세워 8만 정보에 달하는 전답을 탈취하였다. 이렇게 한국 토지 전면적의 100분지 49와 삼림의 100분지 59를 침탈하여 조선총독부는 어느새 한국 최대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뿐인가. 농업경영에 투자한 일본 대재벌 예하 회사들은 60여곳에(이는 소규모의 회사는 계산에 넣지 않은 숫자이다) 달하였는데,이들 중 굵직한 것만 열거해 본다면, 朝鮮殖産銀行·東洋拓殖會社 등이 그 대표적 존재로, 이들은 정부의 비호 아래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갖가지 방식으로 한국 경작면적(토지 총면적이 아닌)의 100분지 70 이상을 점거하고 말았다. 이로써 이들 회사는 한국 제2의 대지주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왜적들의 야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수차 일본인들을 한국내로 이주시켜, 수년 안에 농촌으로 파고들은 그들은 총면적의 상당량을 점거, 한국 제3의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지주의 숫자를 보건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농업 형편≫에 따르면, 매년 그 숫자가 격감하고 있으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면적은 총면적의 100분지 10에 불과할 뿐이다.
나라를 잃고 땅까지 잃은 한인의 빈궁화 현상은 9·18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모든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1년간 총 수입을 보건대 192원이라는 숫자가 산출되기는 하지만, 매호당 부채 액수는 평균 200원 이상(총독부 농무과 조사)으로 결국 먹고 살 수가 없어 매년 離農家가 속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럼 땅을 등지고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날품팔이나 공장 노동자란 고달픈 생활을 하지 않으면, 男負女戴하여 만주 땅으로 유랑생활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 유랑민은 벌써 200만 명 이상에 달하고 있다.
한국의 금융자본 또한 완전히 일본인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일본인의 금융기관인 朝鮮銀行·朝鮮殖産銀行·東洋拓殖會社 등 20여 개의 대은행과, 각지에 산재한 금융조합이 한국의 금융자본들을 완전히 독점하고 모든 사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 금융자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반면에 한국인 금융자본은 잔학할 정도로 제재와 압박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바로 한국 민족자본을 말살하려는 악독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일본인 상업자본이 투자하고 있는 액수와, 한국인 투자액의 비율은 100대 1이라는 엄청난 차이(이하 모두 1939년 통계)가 나고 있는 바, 공업 부분이 70대 1, 농업 부분이 93대 1, 수산업 부분이 561대 1, 임업 부분이 350대 1, 운수업 부분이 110대 1,전기가스업 130대 1, 광업 부분이 560대 1이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총괄적으로 본다면, 한국 민족 금융자본이 점유하고 있는 비율은 100분지 5에 불과한 것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한 후, 일본의 근대적 기계생산 방식은 한국 고유의 가내수공업적생산방식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자본에 의한 대공업이 한국내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으며, 모든 경공업과 중공업이 완전히 三井 재벌이나 三菱 재벌의 손에 집중되었다. 특히 9·18사변 이후부터 중공업 건설 강화와 병참기지의 구호 아래 한국 민족공업은 거의 소멸되어 가고 말았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일본인 대공업(군수공업)이 한국내 총공업의 93.7%를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민족공업은 불과 6.3%라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철도 건설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그리하여 이것 또한 그들의 완전 獨占企業으로 되고 말았다. “漢江 위로 鐵馬가 달리다”라는 말이 있은 지 32년, 그 당시 철도의 총길이는 불과 30킬로미터(18마일)이었으나, 1930년 12월에 이르러서는 그 100배에 가까운 2,790.9킬로미터(1,762마일)가 되었고, 다시 1940년 이르러서는 5,000킬로미터 이상으로 불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인들의 철도 건설은 거의 군사적 목적에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철도 건설에 투자된 총자본의 10분지 7이 일본 정부의 소유이며, 나머지 10분지 3은 半官半民의 것으로 총액수는 무려 20억여 원에 달하고 있다. 물론 한국인의 투자는 하나도 없었으며 있을 수도 없었다.
한국인 조세는 크게 국세와 지방세로 나뉜다.
국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총독부의 수입이다. 지방세는 지방통치단체인 道·府·面의 수입이 되고 있다. 국세는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데 직접세가 6종류, 간접세가 10종류 있다.
지방세를 볼 것 같으면 39종이 있는 외에, 학교비 부과금·학교조합비 부과금 등 잡다한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들이는 그들의 세정이야말로 외국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중복된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무상 강제노동·賦役·애국저축·헌금운동·노동 복무·위로품 등등 갖가지 명목을 한국 국민들의 몸을 짜고 또 짜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조세제도가 이렇게 날로 혹독해 가는 것만이 아니라. 세금부과율 또한 1년이 멀다하고 놀라운 속도로 격증하고 있다. 1911년에서부터 1930년까지의 지방세 증가율은 23배에 달하였고, 다시 1940년에 이르러서는 50배로 증가되었다. 학교비 증가율만 보아도 같은 기간에 259배나 증가되었으니, 그 여타의 것들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한국에서 전매제도(담배·소금·인삼·술·아편)를 실시,전매품의 가격을 고가로 책정하여 한국인을 착취하고 있다. 총독부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專賣取締令」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그들의 전매 이익을 합법적으로 비호하고 있는 것이다.
총독부의 특별회計 세입 중, 전매 수입이 약 35%를 차지하고 있다. 1930년 「煙草取締令」 위반자는 무려 3만 명을 초과하고 있었다(이들은 거의 농촌의 빈농들이다). 이 숫자는 1925년보다 4배나 증가된 것이며, 1940년에 이르러서는 30년의 그것보다 3배가 다시 증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당시 급행기차 속도가 40km/h라고 하니 추정 계산으로
남대문정거장에서 평양까지 약 310km, 평양에서 의주까지 약 270km 도합 580km로 나옵니다.
그럼 한반도 서울에서 현 북한 신의주까지 직선거리로 400km 쯤이니
곡선 코스를 생각하면 얼핏 기차 여행 시간과 속도에 따른 거리 계산상으로 비슷한 듯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의 서안과 감숙 의주까지의 직선거리도 약 511km입니다.
그리고 남양에서 서안까지 직선거리로 360km이니
당시의 기차 이동 시간 상으로는 따질 수 없을 듯합니다.
1945年東北地區鐵路網
https://img2.vitomag.com/d5/ec/d5ec37a5b03016f4364a42fa703db4343c2b2d0a.jpg
다음 백과사전 : 서울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철도. 서울(京)과 의주(義州)를 연결한다고 하여 '경의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의주는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의주의 일부에 새로 조성된 도시이다. 총연장 499km. 1904년 용산-개성 구간 공사를 시작하여 1906년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911년 압록강철교의 개통으로 만주까지 연결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철도의 일부가 되었다.
문제는 1906년에 이미 용산 개성구간이 뚫렸다는 것. 그렇다면 1908년 당시에는 32km 는 나올 수가없죠. 물론 승정원일기의 시간등은 당연 교열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