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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
말씀: 막8:35-38
제목; 세상에서 승리
세상의 원리에 대해서 세상의 질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이 세상을 이처럼 무섭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내면과 외면의 동질성이 큰데, 곁으로는 유행을 따르며 외모지상주의 문화를 동경하며 세상에서 칭찬받고 높임 받고 인정받은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과 안으로는 비열함과 시기와 질투와 더럽고 추악한 악취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고발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정치도 신념도, 정당도, 과학도 문화로도 안 된다는 사실을 현실의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삶을 통해 적나하게 보여주고 확인하는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직 이 땅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일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바울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고 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십자가만을 자랑할 가치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것은 저번 주 마지막에 언급했던 말씀입니다마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이것이 세상에 대해 언급한 십자가에 못 박아야하는 최상의 말씀입니다.
막8:35-38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여기서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하는 질문은 이 세상에서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당연한 요구처럼 들리지만, 여기서의 말씀은 오히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대답은 바로 즉,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복음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와 복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삶을 위해서 참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결단을 촉구 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하는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8절에 보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이렇게 규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세상과 짝하는 우상숭배입니다. 결국 ‘음란과 죄’는 예수님과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예수를 모독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의 의도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요구와 그 영역 안에서 통치와 다스림에 복종하며 나가는 삶에 대한 상급과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한 부분을 심판으로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하므로 인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기와 믿음으로써 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와 복음’에 생명을 거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하는 부분은 세상의 물질적인 복이나, 세상의 편리와 삶을 개선하고 세상의 아름다운 문화를 세우기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 죽으셨고 이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영원히 사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려 오셨고 그 점에 대해 세상은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압니다. 아니까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어서, 세상 것이 다 배설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눅16:19-31절까지에서 부자와 나사로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전형적인 세상의 원리와 그 세상적 원리에서 벗어난 사람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호화로운 집에서 호화로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두루마리를 걸치며 만족하면서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음식을 마음껏 먹습니다. 이것이 정형적인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불쌍한 거지는 문 앞에 앉아 개들이 그 상처를 핥는 아픔을 겪으면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두 부류를 비유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요지는 이 현실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부자는 지옥의 고통을, 나사로는 천국의 영광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과 사고방식,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세상과는 원수가 되고,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로 여깁니다. 그리고 세상과 원수 되어 영적인 전투에서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그 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헛됨, 허위, 위선, 과장 등을 뽑아내고 무가치가게 여길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함과 동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우리의 운명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우리는 본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번 주에 요일2:15-17절 말씀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이 자랑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쫓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상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부패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지막을 위한 준비된 일부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튀르키예 지진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현실과 아픔을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마음아파하고 고통을 나누기위해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를 든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런 고통은 종말의 고통에 비교가 안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심판의 때라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2:31절‘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그러니까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어떻게 끝나느냐하면 심판으로 끝난다는 말인데요, 결국 인간은 부패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이 끝이 있으며 끝은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절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그럴 믿으면 멸망치 않을 것이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단순한 원리입니다. 세상은 심판 아래 있습니다. 세상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은 심판받을 것이며 멸망당할 것입니다. 주님 재림 시에 그에게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영원히 멸망할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바벨론이 멸망할 때 ‘바벨론이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울부짖게 될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세상, 그리스도의 통치가 없는 세상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없는 곳은 세상이며 이 세상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되어 있는 곳이고, 이곳이 바벨론인데 이런 바벨론은 그 당시 웅장하고 적들이 전혀 침입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며, 세계가 모여드는 상업도시고, 모든 왕들이 왕래하는 곳이며 땅의 귀인들이 팔 것을 가지고 왕성하게 거래했던 곳, 이곳을 사람들은 자랑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자랑하고 바벨론을 높였지만 이곳은 그리스도가 없는 곳입니다. 이곳이 무너졌다는 것은 오늘날 바벨론과 같은 이 시대는 그리스도가 통치하지 않은 영역의 사람들이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처럼 무너질 것이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모든 것이 파쇄 되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그 분이 오심을 말씀하셨고, 심판장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전17:31절에 바울이 아덴사람에게 한 말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요한계시록 20:12-13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책이 펼쳐지고 그 앞에 선다는 것은, 이 땅에서 죄악 된 삶의 내용대로 다 받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런 심판을 받지 않은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를 통해 죄가 다 사해졌고 하나님마저도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한 이유를 아셔야합니다.
물론 우리는 태어날 때 다 세상에 속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한 모두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향해 십자가에 못 박고 나또한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하느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미리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면할 길은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받으셨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나온 자들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악한 운명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심판받으신 것은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증거입니다. 심판대에서 나를 위해 죄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자는, 그 심판이 내게 임하지 않은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별된 삶이요, 임재의 삶이요,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하면,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옮겼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스도의 나라, 빛의 나라, 영광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사실상은 우리가 세상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옮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나라에 있고 운명적으로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것을 우리가 누릴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상속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 놀라운 그 나라는 목숨과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진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보다 더 큰 힘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요1서4:4,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1서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입니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모두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세상을 이기느니라’입니다.
‘세상’은 저번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말씀드렸고, 또한 세상의 원리와 세상의 질서와 세상 문화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요16:33 ‘이것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 분께 의탁할 때, ‘이김’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롬8:37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이기느냐? 이 이김은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보혈을 통과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더 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세상보다 커며,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판하려 오실 때 세상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리스도는 새 세계를 건설하실 것입니다.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그렇습니다. 갈보리 언덕 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바로 그 분이 영광의 주라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세상에서 구별하여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고 계신 것을 믿는 자들을 통해 영원히 영광중에 거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자랑하는 삶에서 벗어나 이제 드디어 하나님사랑가운데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태원참사를 100일 동안 기역하고 조문을 해야 합니까?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해 우리의 정서와도 맞지 않고, 기독교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러면 왜 2000년 전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까?’ 이 말이 맞는 말 같지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도 아셔야합니다. 주님을 우리의 생명이시고 그 십자가위에서 세상의 원리를 폭로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그 분이 대신 심판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죽음 앞에 추모하는 것을 시비 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렇게 세상과 진리와 비교해서 나온다는 것은 우리라 얼마나 세상에 억매여 있고 세상 문화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말씀에서 떠나있는지를 확인하셔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