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추석 대목 이발소 이야기 기억에 남는 최초 이발소는 아주아주 오래전 내 나이 대여섯 살 때쯤 추석 무렵에 아버지 손을 잡고 익산 금마(金馬) 읍내에 있는 이발소로 생각된다. 서양식 집 마당에서 나무 의자에 앉히더니 허연 보자기를 목까지 두르면서 이발소 아저씨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니 눈을 꼭 감으란다. 그리고는 양손잡이 바리캉으로 구레나룻 부근에서 장배기 까지 쇠똥구리 주둥이 같은 이발 기계로 쎄깍쎄깍 밀어 올려 깎는다. 이따금 싹둑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 한 두어 개가 뽑히어서 몹시 아프다. 그때마다 나는 아야 하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린다. 뜨지 말라는 눈을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니 아프다는 나의 소리를 듣고 아저씨는 바리캉 톱니 사이에 끼어 있는 머리카락을 힘차게 훅훅 불더니 무슨 물방울(석유)을 지푸라기 끝에 적시어서 바리캉 톱니에 떨어트리고 한 두어 번 움직여 보고 다시 깎는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하여 이발을 겨우 맞혔는데 얼굴에는 눈물 자국 위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이 뒤범벅되었던 어린 시절의 추석 이발소 풍경이었다. 그 시절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은 추석 때 돼지고기가 으뜸이었다. 장터 푸줏간에서 돼지고기를 서너 근(斤) 사다가 집에서 요리할 때 돼지고기 터럭이 제대로 깔끔하게 처리되지 못하여 듬성듬성 남은 돼지 터럭을 보고 사람들은 추석 대목 이발했다고 일상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그 당시는 집안의 어떤 대소사나 아니면 명절 때만 집중적으로 이발소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이발소 아저씨는 그 많은 이발 손님을 대충대충 할 수밖에 없어서 간혹 안 잘린 머리카락이 있어 그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한 그 옛날의 명절 대목 때 이발소 이야깃거리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골의 이발료는 보리 수확 계절 여름에는 보리 한 말(斗), 쌀 계절 가을에는 벼 한 말을 후불로 주면 일 년 내내 필요시에 읍내 해당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할 수 있는 풍습이 있었다. 어머니는 더부룩하게 자란 나의 밤송이 같은 머리를 이발소에 갈 시간과 이발료를 아끼기 위하여 가끔 옷감 자르는 큰 가위로 깎아주셨는데 아무리 잘 다듬고 곱게 깎아주셔도 가위 자국이 나타나기 때문에 개구쟁이 친구들이 쥐 뜯어먹었다고 놀려댔던 머리카락이 적당히 자라기까지는 고통을 주는 흔적이었다. 나는 성격이 소심하고 외모를 남한테 보여주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은 이발이어서 헤어스타일과 이발소의 선택에는 남다른 고집이 있다. 좋아하는 머리형은 뒷머리 옆머리를 높이 치겨 올려 깎는 상고머리를 80년대(장발 유행시절) 초 1~2년 빼고는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보통 남자들의 머리형은 더부룩한 형태이기 때문에 조금 잘못 잘랐어도 눈에 띄게 표시 나지 않고 헤어드라이어로 자기 취향대로 고쳐서 바로 잡을 수 있으나, 상고머리는 한번 잘못 자르면 다시 이발할 때까지 언짢은 느낌이 계속되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이발소의 선택은 발품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렇게 찾아 정한 이발소는 지금도 꼭 달력에 다음 이발 날짜를 표시하고 다니는 그 이발소의 마니아이다.
내가 군산에 살았을 때부터 30여 년간 다녔던 단골 이발소 “S 이용원”이 있다. 이발소 미닫이식 문을 열면 롤러가 닳아서인지 찌이찍 찌이찍 소리를 내면서 롤러는 움직이지 않고 사람의 손힘으로 열고 닫히는 문이다. 천장은 빗물이 새어서 여기저기 얼룩얼룩한 자욱이 있고 또 검은 곰팡이도 서려 있다. 칙칙한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 모두 다 낡고 오래되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색깔과 냄새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시골집 안방 같은 분위기여서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 금방 친숙해진다. 이발소 아저씨는 전남 신안이 고향인 것 같다. 이발소 간판도 고향 이름인 것 같고 자주 쓰는 남도 사투리 등에서 짐작이 간다. 이발소 아저씨는 나의 머리통의 좌우대칭 및 요철 부분을 정확히 꿰뚫고 계셔서 어디를 살리고 어디를 좀 더 깎아야 할 부분의 머리 전체가 입력되셨기에 이발 주문할 내용도 없이 그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발이 끝나면 일어나면서 “~수고하셨어요!”하는 말 한마디 외에는 주문도 다시 끝손질해야 할 부분도 없다는 의미의 말이다. 그런데 현재는 군산에서 전주로 이사한 지 5년째이다. 익산에서는 퇴직 후 조그마한 봉사활동과 취미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주중에는 잠은 전주에서, 활동은 주로 익산에서 보내고 있다. 달력에 표시된 이발 날짜에 될 수 있는 대로 맞춰서 익산에 갔을 때 군산으로 가서 지금도 S 이용원에서 이발하고 전주로 오는 꼴이 되어 이발을 할 때는 전라북도 꼭 3시(전주→익산→군산→전주)를 경유하고 있는 유별난 이발 고집이다. 그렇게 군산에 있는 S 이용원에 가야 이발소 아저씨한테 이발 주문의 구체적 주문 없이도 깔끔하고 개운한 이발을 할 수 있다는 선입감인 것 같다. 이발소 아저씨는 그냥 전주에서 깎으란다. 아마 고맙고 미안해서 하는 소리인가 보다. 오늘은 명절 끝이어서 익산 본가에서 차례와 성묘를 마치고 처갓집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데 공교롭게 그 옛날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갔던 첫 이발 경험의 금마 이발소 건물터 앞을 지나서 갈려니 별의별 생각들이 교차하여 떠오른다. 그냥 평범하게 깎아도 될 이발을 남들이 생각하면 별별 쓸데없는 이발 습관이라고 웃음거리 라도 될 것 같다. 불현듯 그 추석 명절 때 부모님들도 보고 싶고, 대목 때 돼지고기를 숭겅숭겅 잘라서 묶은 김치에 볶아주셨던 어머니의 추석 영양식도 입맛 다셔진다. 별난 이발 습성을 돌이켜 보면서 덧없이 흘러간 세월은 간데없고 이발 고집만 남아 잘못된 자아(自我)일까 되새겨 보기도 한다. |
첫댓글 재미난 이발 추억이 있으시네요...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