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을 잡아먹는 법이다.(Devil take the hindmost)"
"재주껏 도망쳐라.(Sauve qui peut)"
"맨 뒷사람이 개에 물린다.(Die Letzen beissen die Runde)"
불길한 조짐은 가장 안전하다던 금에서 시작됐다.
지난 4월13일 하루 동안 금값은 9% 추락했다. 지난 가을만 해도 온스당 1900달러 선을 육박하던 금값은 불과 반년 만에 23% 이상 급락하면서 1300달러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이후 돈은 안전자산으로만 쏠리면서 두 배 이상 급등했던 금 시장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포함해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무제한 유동성 방출을 선언하면서 금 투자 열기가 확 번졌다. 중앙은행들이 공격적인 대차대조표 확장(중앙은행이 부채인 현금을 방출하고 국채 등 채권을 사들여 자산을 늘리는 것을 의미)에 나서자 미래에 닥쳐올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미국 달러 중심의 세계 금융질서가 붕괴하고 장차 금본위제로 돌아가게 되면 금값이 온스당 3000달러까지 오른다는 전망이 득세했다. 인플레이션세를 뜯어내려는 국가로부터 자산을 지키려면 인적이 드문 사막지대에 요새를 지어 금괴를 보관하고 이를 지킬 총을 사야 한다는 식의 선동적인 표현들이 헤지펀드 매니저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어제 금 가격이 올랐기 때문에 내일 또 오를 것이란 기대가 가격을 밀어 올리는, 누군가가 더 비싼 가격에 내 금을 사줄 것이란 기대, 이른바 폭탄 돌리기가 계속되었다. 금은 보유하고 있는다고 해서 수익을 내지 않는다. 오로지 더 비싼 가격에 금을 되 사줄 바보가 어딘가에 있겠지 라는 투기 심리가 버블을 만들었다. 되먹임 현상이 계속되면서 700달러 선에 머물던 금 가격은 불과 4년 여 만에 2000달러 직전까지 폭등했다.
찰스 킨들버거는 그의 저서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거품 형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투기적인 매입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꾹꾹 참다가 결국은 자신도 동참할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선행자 따라하기(follow-the-leader)의 과정이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친구 이외의 다른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속 편한 일일 것이다. 투기판에 투기꾼들이 득실거릴 때는 문제가 없다. 눈 먼 돈에 대한 욕망은 사람들을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에서 일탈시켜 광기나 거품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묘사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이끈다. 버블은 투기적 모험과 거리가 멀었던 기업이나 개인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얻기 위한 게임에 뛰어들면서 발생한다. 돈을 버는 일이 이보다 더 수월했던 적은 없었다는 느낌과 함께 버블은 부풀어오른다.
중앙은행이 돈을 암만 풀어도 기다리던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자 투자자들은 거꾸로 조급해졌다. 미국 국채 금리가 반등하고 달러가격이 강세로 돌아서면서 더 이상 높은 수준의 금값이 지탱될 수 없을 것이란 우려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 5월 키프로스가 보유중인 금괴 가운데 일부를 팔 것이라는 루머가 기름을 불을 붙인 꼴이 됐다.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상황에서 금값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15%나 급락했다. 금값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당분간은 반등의 실마리를 찾기가 힘들어 보인다.
문제는 금값 폭락이 글로벌 버블 붕괴의 전주곡일 수 있다는 점이다.
1920년 후반 대공황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미국 중앙은행은 엄청나게 돈을 풀었다. 기준금리를 0%대까지 내려서 금융기관들이 중앙은행에서 사실상 공짜로 돈을 빌려갈 수 있게 했다. 이른바 1차, 2차, 3차 양적 완화(Quantative Easing)을 통해 거의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냈다. 한 달에 약 85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의 돈이다. 이 돈은 미국 국내 부동산과 일자리 창출에만 사용된 게 아니라 개방된 자본시장의 돈 길을 따라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수 차례에 거쳐 핫머니들은 이머징 마켓에 투자했다가 금융위기라는 된서리를 맞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미국 국채 금리가 1%대 중반까지 하락하면서 선진국에서 돈 벌 기회가 신통치 않자 계속 조금씩 이머징 마켓 쪽으로 돈을 옮겼다. 이번은 다르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대체투자다, 이머징마켓투자다, 하이일드 회사채 투자다, 하면서 계속 위험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지난 2009년 이후에 이머징 마켓으로 흘러 들어간 돈만 1조 달러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030조원에 달하는 돈이 한국을 포함해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지로 흘러 들어 갔다. 경제 규모가 세계 15위인 우리나라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1조1635억 달러라는 점을 감안해 보라.
미국 중앙은행 금고를 빠져 나온 유동성 덕택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홍콩 아파트 가격이 평당 1억 원이 훨씬 넘고 거리마다 비싼 외제 승용차가 넘쳐 흘러 다니는 현실이다. 인도네시아,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른 이머징 마켓으로도 많은 돈이 흘러 들어갔다. 은행 빚을 끌어다 초장기 성장세를 구가해온 중국 경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으면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페달 밟기를 멈춘다면? 대내외 경기침체에다 부동산이나 증시 모두 오랜 조정 국면에 처해 있는 한국은 그 동안 버블이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사태를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있나. 신중한 어조로 유명했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도 이런 얘기를 했다. "목재 가옥에서 발생한 불이 다른 집들로 계속 번져가다 보면, 화재 방지시설을 철저히 한 건물까지 대화재의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버리게 된다고." 삼성전자의 급락은 미래에 대한 불길한 징조일지도 모른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의 고민은 더 이상 돈을 안 풀겠다는 게 아니라 돈을 푸는 속도를 좀 줄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데 있다. 돈을 쏟아부어 대출 금리를 내리고 부동산, 주식 등 자산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려 일자리 창출 등 경기 회복을 위한 군불을 그 동안 때 왔다. 이제 장작에 불길이 옮겨 붙고 있다면 서서히 잔불은 거둬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수도꼭지를 조금씩 잠그면 물줄기를 점차 가늘어지듯이 돈 푸는 속도를 줄여나가는 테이퍼링(tapering)이다. 문제는 버블이 일단 커진 상태에서 버블을 `뻥`하고 터트리지 않고 조금씩 줄여나가는 작업이 말 만큼이나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파티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제 끝날 시간이 됐다, 그럼 출입구가 붐비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야지라고 서두르면서 문제가 생긴다. 때로는 이 같은 생각이 무리를 짓게 되면 대재앙이 찾아온다. 이해하기 가장 쉬운 예가 나이트클럽이나 초고층 빌딩에서 벌어지는 화재 사건이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합리적이라면 민방위 훈련 때 익힌 대로 중앙통제실의 지휘에 따라 침착하게 빠져 나가면 큰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을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놀란 군중은 한가지 목표만을 가진다. 가능하면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천천히 걷던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한 군데로 몰리면 엄청난 집단적인 힘을 발휘한다. 철제로 만든 장벽을 휘게 하고 벽돌담을 무너뜨린다.
1999년 물리학자 헬빙과 타마스 비첵은 이른바 컴퓨터를 이용한 보행자 모델을 통해 한 개의 출구가 마련된 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이른바 보행자 동력학이다. 그 결과 보행자들이 두려움을 억누르고 초속 1.5미터 이하의 차분한 속도로 움직이면 질서정연하게 방을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보행자들이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려고 하면 결과는 놀랍게 달라진다. 문으로 몰려드는 군중들이 서로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마찰이 늘어난다. 군중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히고 꽉 끼이게 되면서 바로 문 앞에 서있는 사람조차 쉽게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사람들이 힘껏 달리는 초속 5미터의 순간이 되면 출구 지역에서의 압력이 너무 커져서 압사하는 사람까지 속출하게 된다. 먼저 빨리 도망치려 하는 출구전략이 모두를 가둬놓는 모순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물리학으로 보는 사회(필립 볼 2008년) 중에서)
<초고층 빌딩 화재를 다룬 설경구 손예진 주연 영화 타워(2012)>
금융시장에서 벌어지는 투매와 급락은 쏠림 현상의 전형이다. 설경구 손예진 김상경 주연의 재난영화 `타워(2012)`에서 보듯 화재 시 출구를 찾아 미친 듯이 달리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연기가 가득 차 시야가 분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한쪽 방향으로 뛰면 따라서 뛰기 시작한다. 모두가 한 개의 출구로 몰리는 순간 대재앙이 닥친다. 천 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할 그런 우연에 또 다른 우연이 겹치면서 화재라는 큰 불운이 닥칠 때 본능에만 의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야말로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렇다면 예견된 블랙스완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지난해 불거졌던 그리스발 위기 우려, 이른바 그렉시트(Grexit)는 일단 모두가 질서 있는 퇴각(orderly retreat)을 외치면서 수면 아래로 잠복해 들었다. 그렇다면 미국 실물경제가 회복을 하는 사이 금융부분에서 또 다른 질서 있는 퇴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대 경제학은 물리학에서 많은 것을 차용해 왔다. 현대 경제학의 토대를 닦은 폴 사무엘슨이 내놓은 시장 가격 균형의 개념 역시 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체가 액체로, 또 기체로 변하는 상전이 과정을 탐구하는 양자 물리학의 시각에서 대공황과 버블 붕괴의 실마리를 찾은 경제학자들은 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아 나서고 있다.
화재 참사를 막기 위해 커다란 한 개의 출구가 아니라 물리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여러 개의 작은 출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구한 경제학자들을 쓴 피터 다우어티는 이런 말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리는 마술에서 나온 게 아니며 정부의 개입이라는 보이는 손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바로 새로운 숙제들이 던져질 때마다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는 아담 스미스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나온다고.
자료 : 매일경제 [이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