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신앙을 가집시다
출 12: 7-14
구약성서의 중심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든지 출애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모세오경(토라)의 중심에도 출애굽이 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자랑이며, 뿌리이고, 균형입니다.
애굽은 영적으로 세상을 상징합니다. 바로는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을 상징하며, 유월절은 예수님의 구속을 상징하고, 홍해 사건은 세례를, 광야생활은 교회생활을, 요단강은 죽음을, 약속의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구약의 중심일 뿐 아니라 신약의 중심이고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애굽탈출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출애굽에서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떠났습니다. 룻은 모압을 떠났고, 베드로는 그물과 배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였고,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났습니다. 선교사들은 미국을 떠나 우리 나라까지 왔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라고 하실까요?
첫째 - 자신의 백성,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 맹모삼천지교 』라는 말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세상 속에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죄악이 넘실대는 그곳에 두었다가는 죄악으로 오염되어 사탄의 종이 되겠기에 그곳을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불러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장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팔고사는데 그곳에 복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둘째 - 떠나라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될찌라 창12:2 』.
대책 없이 나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축복을 약속하고 불러내는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이 보다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도 떠나는 결단을 통해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떠나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떠날만한 힘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불신자들까지도 십일조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물며 세례 받은 사람이 가장 기본적인 십일조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알기는 하는데 지킬만한 믿음과 힘이 없습니다. 전도해야 하는 것 누가 모릅니까? 그러나 아무나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유언으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행 1: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권능이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힘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떠남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를 상고해 보려 합니다.
첫째 - 기도가 능력입니다. 기도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끌고 오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고 했습니다. 군사는 자기의 사생활에 얽매이면 안됩니다. 자기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 대표자가 놋의 처일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천사의 간곡한 명령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밀수에 눈을 뜬 어떤 아주머니가 김포세관에서 발각되었는데 내의 밑을 묶고 워낙 많은 밀수품을 넣고 나오다가 걸음을 옮기지 못해서 발각되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그녀를 망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가져오는 보증 수표와 같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얻기를 바랍니다.
둘째 - 믿음이 능력입니다. 사람이 불신을 당할 때만큼 비참해지고 불쾌한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을 주제로 쓰여진 『예수의 제2복음서』라는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무릎을 다쳐서 외딴집 막달라 마리아의 집을 찾게됩니다.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그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창녀집인줄 알고 오셨나요』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 막달라 마리아의 지극한 간호를 받고 쉼을 얻은 후 이튿날 아침 떠나와서 며칠 후 그 곳을 지나면서 우연히 그 집을 들리게 되어 다시 예수님이 묻기를 『요즈음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녀의 대답이 『여자는 존경하는 남자를 만나고 나면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없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고 믿음의 신뢰를 주었더니 그녀의 일생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믿어주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어 주는 자에게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마음껏 보여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 성령이 능력입니다.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권능이 바로 능력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 하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죽음을 능가하는 힘이 생겨난 것입니다. 성령은 생명입니다. 생명이기에 힘이 있습니다. 저는 낙동강에서 생명이 있는 것이 얼마나 힘이 있는 가를 보았습니다. 다사 취수장 부근에는 둑을 막아 놓은 곳이 있는데 물살이 급하고 상류로 올라가기에는 힘이 든 곳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고기들은 그곳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생명이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힘이 없습니다. 현대도 휘청거리고 기아 대우 같은 큰 기업도 무너집니다. 시민운동도 무너지고 386세대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출애굽의 결단을 감행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 말씀이 능력입니다. 말씀은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렵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신 데 말로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놓고 실제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신앙에 실패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계급 사회이기 때문에 계급이 낮으면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현 군 체계로서 가장 낮은 계급은 방위입니다. 방위제대 하신 분은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방위들끼리 모이면 자신들의 계급을 소위 중위 대위 방위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역들은 병장 상병 일병 이병 방위가 아니라 이병 다음에 군견 다음에 방위라고 한답니다. 어쨌든 우리가 방위정신만 가지면 신앙에 모두 승리할 줄 믿습니다. 방위는 군견 밑이기 때문에 절대로 아니오가 없습니다. 오직 "예"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방위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다섯째 - 교회가 능력입니다. 교회는 놀라운 통합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죄인이 하나되는 곳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곳이며, 인종과 남녀와 노소와 유식과 무식이 하나되는 유일한 곳입니다. 우리 나라의 통일도 교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결론 - 출애굽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로케트가 발사되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듯이 출애굽을 단행하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을 얻으려면 기도와 믿음과 성령과 말씀과 교회를 통한 능력을 확보해야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능력을 힘입어서 출애굽을 통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 아멘
맛없는 음식도 먹어라
출 12: 8-10
서론
출애굽의 급박한 상황 아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희생을 요리하고 먹기 간편하도록 불에 구우라고 명하셨습니다. 무교병과 쓴 나물은 맛이 없는 음식입니다. 그래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1. 쓴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본문 8 "쓴 나물과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입에 달련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교병은 아무런 맛이 없고 거기다가 쓴 나물과 같이 먹는 것은 더욱 맛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쓴 나물도 약으로 먹고 있습니다. 쓰면 약이 된다는 말 때문입니다.
쓴 소리도 들을 줄 아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부하는 말은 달콤하지만 사실 충고나 책망은 쓴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쓴 소리를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나단 선지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고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도 소화시키는 다윗은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날 그 저주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하였습니다(삼하 16:10-12)
2.쓴 결단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 3:15-18 "느브갓네살의 우상숭배의 압력을 받으면서 거절하면 죽고 굴복하면 사는 생사의 기로에서 죽을 각오로 우상숭배를 거절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이는 매우 맛없는 음식과 같고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때로는 손해보지만 알고도 결단을 내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일 지키는 결단 쉽지 않고 도박을 끊어버리는 결단이 쉽지 않으며 주초문제를 끊는 결단도 쉽지가 않습니다.
바울은 고기를 먹는 것이 원칙적으로 죄가 아니지만 신앙이 약한 자가 자기를 보고 실족한다면 죽을 때까지 먹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3.쓴 교제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롬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그와 진정한 친구관계로 교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어려운 것입니다.
친한 사람끼리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친하지 아니하여도 교제를 할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야곱이 형에서의 칼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형님을 위하여 많은 선물과 형을 보고하는 말이 형을 만나니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화친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결론"
맛없는 음식을 먹기 힘들지만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듣기 싫은 말도 듣고 힘든 결단도 하며 힘든 교제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