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사랑을 아는 놈이 있냐?" 활짝 열려 있는 심검당 문으로 붉은 가사를 두르신 채 훤칠하신 키에 입을 두 귀에 거신 큰 스님께서 들어오셨다 심검당은 관음전의 이칭異稱이다 그때가 오후 1시 무렵이라 학인들은 점심 공양을 끝내고 다들 공 차러 운동장에 나갔거나 또는 경학원 뜰에서 탁구를 치거나 일부 학인들은 가야산 등산 중이었다
운동보다는 항상 책 읽기를 좋아하여 방콕을 즐기는 학인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큰스님께서 들어오시니 몇 명 안 되지만 일어설 수밖에 큰스님이 휘리릭 주위를 둘러보시며 "평소 존경 받는 학인이 누구더냐?" 앞서 사랑에 관해 물으셨는데 아무도 어떤 답이 없자 이번에는 존경에 대해 물으셨다 "이 친구들 사랑도 존경도 잘 모르냐?"
키가 크셔서 천정에 닿지 않으실까? 나름대로 한참 걱정하고 있는데 카랑카랑한 큰 스님의 목청이 열린 문밖으로 슬금슬금 기어나가더니 마당에서 뜰에서 담소하는 학인들을 순간에 심검당으로 빨아들였다 심검당 맞은편에 있는 궁현당에서 쉬고 있던 아랫반 학인들까지 블랙홀이 되어 한꺼번에 빨아들였다 해인사 주지로 새로 부임하신 지 며칠 안 된 도성 큰스님께서 강당을 둘러보고자 오셨을 것이다
밖의 학인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자 도성 큰스님께서도 은근 신이 나셨다 "자,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하나는 부정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긍정하는 마음이다 우리말로 풀면 '아닌非 마음心'과 '이玆 마음心'이라고나 할까? 자비慈悲 두 글자를 들여다 보라 자의 마음은 곧 긍정하는 마음이고 비의 마음은 곧 부정하는 마음이니라"
큰스님 강의(?)는 10분 넘게 이어졌다 "때에 따라 잘잘못을 지적할 때는 잘못을 분명하게 심어 고치게 하고 잘한 점 권장할 만한 게 있다면 장려하여 키우도록 해야 한다 사랑과 자비는 이처럼 많이 다르다 관세음보살보문품 중송분에 '비관급자관悲觀及慈觀'이라 했지 비관悲觀이면 그게 과연 뭐겠어? 그래, 따가운 부정의 사랑이야 자관慈觀이 뭔지 좀 짐작이 가지? 그래그래, 포근한 긍정의 사랑이야!"
그날 도성 큰스님의 '자비慈悲 강좌'는 당시 내 마음에 아주 깊숙이 박혔다 도성 큰스님은 해인총림 유나이셨던 도견 큰스님의 사제師弟이셨고 오늘날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총림 해인사 주지 혜일 종사의 사숙師叔이 되시는 어른 스님이시다 도성 큰스님은 1919년생이시다 평남 양덕군 쌍용면 관봉리에서 출생 1953년 부산에 있는 선암사에서 지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태 뒤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받으셨다
큰스님께서는 1978년 해인사 주지를 1980년 미얀마에서 수행하셨으며 1989년 대흥사 주지를 지내시고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25교구 교구본사주지연합회장을 맡으셨다 그리고 이듬해 1990년에는 부산에 불교의 나라 태국 마하 출라롱콘대학 한국 분교를 여신 뒤 학장으로서 후학 양성에 온갖 정열을 쏟으셨다 큰스님께서는 지난 2003년 스리랑카 국립승가위원회로부터 '삼붇다 사사나 조띠까’에 추대되셨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종정宗正이실까 현재 부산 영도 태종사 조실로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