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4
강 문 석
비록 견학은 못했지만 발전함 레지스턴스호는 6.25 때 피란수도에 전력을 공급했던 임피던스호가 계류되었던 자리에 ‘부산부두발전소’란 간판을 달고 운영했던 사실만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곳 발전함에서 전력이 본격 생산되고 있을 무렵, 감천항엔 부산화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이는 우리나라가 제한송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부산항 부두를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부산에 첫 발을 디딘 20년 뒤였다. 사진가 그룹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만난 산부인과 S원장의 초대였다. 그는 자기 병원 출입에 방해되는 콘크리트 전주를 옆으로 옮기고 싶어 나를 만나면서 서로 친분이 생겼다.
전주가 선 현장은 서면로터리에서 부전시장으로 꺾이는 가각지점으로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전주는 처음부터 지적도상의 경계지점에 세우기 때문에 전주를 옆으로 옮기려면 땅을 매입하지 않곤 불가능했다. 그는 나보다 대여섯 살 위였고 무척 소탈한 성격이었다. 당시 그의 친형이 진영변전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도 그는 나를 잡고 늘어졌다.
부산항 8부두는 군용부두이지만 그 안에 전 세계에 7개밖에 남지 않은 시멘스 클럽이 있었다. S원장은 그 클럽 회원이었고 본인이 무슨 부탁할 일이라도 생기면 청탁할 사람을 그곳에서 만나는 모양이었다. 난 현역 때 미군부대 정문에 근무하면서 면회 온 한국인 여성들이 찾는 미군을 불러 함께 클럽을 드나들었다. 이곳 클럽도 식재료가 같은 미국 산이어서 그런지 소고기 스테이크 맛은 미1군단 클럽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여름엔 부산항 제1부두 창고에서 ‘국제사진제’가 열렸다. 행사명칭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주최 측에선 “삶의 궤적이 그리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으로 향하는 시간으로 그곳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꿈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교차하면서 융합하는 웅장한 서사라 할 수 있다”고 다소 장황하게 뜬구름처럼 늘어놨지만 출품작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제행사지만 외국 작가들의 출품작은 가뭄에 콩 나듯했다.
난 부산이 낳은 세계적인 휴먼 작가 C선생의 유작이라도 들어있나 하고 전시 부스를 모두 훑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건 ‘국제’란 행사 명칭 때문인지 부산의 7개 대교를 영문 Seven Bridge로 전시하고 있었다. 광안대교로부터 부산항대교~영도대교~남항대교~을숙도대교~신호대교~가덕대교까지. 영도대교와 나란히 달리는 부산대교는 교통량이 많은 편인데도 행사 주최 측에 밉보였는지 대열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부산대교는 투박한 철 구조물로만 세워져 볼썽사납긴 했다.
지난날 부산대교는 자신의 이름을 빼앗길 뻔 했던 적도 있다. 부산항 대교가 준공되어 붙일 이름을 공모했지만 마땅한 이름이 나오지 않자 ‘부산대교’란 이름을 거기다 붙이고 기존 부산대교는 제2영도대교로 바꾸려고 했던 것. 하지만 ‘항’이란 글자 하나로 요란했던 작명 소동은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에 40년 가까이 사는 동안 잊지 못할 순간은 사진촬영에도 들어있었다. 흑백사진 시절엔 부산 야경을 찍느라 천마산을 올랐고, 세월이 지나선 비경 태종대와 몰운대를 주로 카메라에 담았다. 몰운대가 군사작전지역으로 묶여있을 때엔 주최 측에서 배를 타고 돌아들어가 누드촬영대회를 그곳에서 펼치기도 했다.
‘휴먼’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떠난 C선생은 출사 때마다 별반 말이 없었다. 당시 비가와도 하루에 필름 15통을 소화한다고 했으니 따로 벌이가 없던 그로선 얼마나 고달팠겠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성당 홍보분과 세미나에서도 자주 선생을 만났지만 그는 자주 자갈치시장과 용두산공원을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집 출판기념회는 부산일보 1층 갤러리를 주로 이용했는데 같은 교우인 부산일보 K사장이 그를 많이 챙겨주어 우린 옆에서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10년 전부턴 중앙동 제1부두에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이 철도 부산역 뒤 제4부두로 옮겨와 편리한 대마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난 태어난 나라 일본 본토는 몇 년에 한 번 꼴로 찾지만 대마도는 가깝기도 하고 번잡하지 않아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90년대 중반부터 수시로 찾아갔다. 그땐 산을 좋아하던 지인이 가까이 있어 이웃 동네 다녀오듯 대마도 산을 찾아갔다. 카페리 운임도 별로 부담을 주지 않는데다 이즈하라 선술집도 한국풍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일제 때 부산상업학교를 다녔다는 노인을 그때 대마도에서 만나기도 했고 우리나라 플라스틱 쓰레기가 대마도로 밀려가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대마도를 찾아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때 제1부두 선착장은 낙후되어 무척 초라했었다. 옛 컨테이너부두가 국제여객터미널로 바뀌면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와 같은 초대형 크루즈선이 이제 부산항을 찾아온다. 밤에 크루즈선이 출항할 때면 정말 장관을 연출한다. 엄청난 크기의 선박이 빛나는 부산항대교 교각 밑을 지나는데 항만구역인지라 그리 큰 빌딩이 없어서 크루즈선의 객실들이 내는 불빛은 마치 큰 빌딩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부산에 첫발을 디딘 그때만 해도 야간에 부산항을 들어서는 외국선박 승객들은 홍콩처럼 고층빌딩이 쏟아내는 불빛에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고층빌딩이 사라진 것에 다시 한 번 놀란다고 했다. 밤을 수놓은 불빛은 고지대 판잣집들이 쏟아낸 30촉짜리 백열등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항은 이제 북항 친수공원으로 바뀌었고 새해맞이 일출사진 명소로 떠올랐다. 종전엔 해운대를 비롯하여 오륙도 이기대 송도 다대포 황령산이 있었다면 부산역 뒤쪽에 친수공원이 들어서면서 이곳이 새로운 일출사진 명소가 된 것이다. 새해 새벽이면 많은 사진가들이 이곳 컨테이너 크레인을 배경으로 색다른 일출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든다. 새해 이른 새벽, 난 부산역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역사 2층 뒤쪽으로 연결된 하늘공원을 들어섰고 태평양으로 열린 북항 친수공원이 미명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과 공사 중인 오페라하우스 사이 정면으로 부산항 대교가 우뚝하게 위용을 보였다. 시간이 되자 해는 부산항대교 뒤편 신선대부두와 한국해양대학 사이로 떠올랐다. 모두들 소문을 듣고 찾았겠지만 렌즈구경이 큰 카메라를 소지한 사오십 명이 신선대부두의 컨테이너 전용 크레인 위로 고개를 내미는 해를 향해 숨을 죽이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부산항에서 자갈치 송도 쪽으로 남항을 오가는 선박까지 프레임 속에 담으려고 욕심을 내어 기다렸지만 이른 새벽이라 오가는 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출을 찍기 위해선 이른 새벽 개인차로 움직여야 하지만 평상시에도 나는 사는 곳에서 전철로 1시간 걸리는 옛 부산항을 추억여행으로 자주 찾는다. 바다를 품고 걸으면 젊은 날 직장 업무를 통해서도 누볐던 곳이라 감회가 남다르고 떠난 사람들 얼굴도 떠오른다.
부두에선 첫사랑 지향의 수정동 집이 있던 고지대도 시야에 들어온다. 그의 집은 한 번도 가보질 못했지만 그 일대가 아파트 숲으로 바뀐 진 오래다. 요즘도 지향이 가끔씩 친구 네댓과 일본이나 동남아를 찾아 그린에 선 골프회동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온다. 골프를 전혀 모르는 옛 남자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혼과 더불어 강남사모님으로 등극하여 개신교 신자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소식을 그동안 바람결에만 들었는데 이젠 카톡 세상이라 직접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부산항이 북항 친수공원으로 바뀐 다음, 7년 후 벌어지는 세계엑스포를 부산이 유치하겠다고 나서면서 도시가 한동안 들썩였다. 엑스포를 유치하게 되면 이곳 북항이 주된 무대가 된다며 언론의 관심이 온통 북항에 쏠렸다. 하지만 엑스포 불발 때문인지 이곳 친수공원은 아직도 황량하여 자주 지역 매스컴의 공격을 받는다. 비록 염원했던 세계엑스포는 무산됐지만 이곳 옛 부산항 제1부두를 비롯해 9곳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노력한 결과 잠정목록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내가 자주 찾는 제1부두는 북항 재개발사업 과정에서 매립될 위기에 처했지만 지자체와 정부부처 및 항만공사 사이에 유산 보존을 위한 오랜 협의를 통해 부두의 원형을 보존하기로 최종 결정하였으니 나처럼 부산항에 젊은 날 추억이 밴 사람에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지만 관할 구청은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하고 나섰다. 지역 상권이 침체된다는 이유였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와 달리 주변 일대의 개발제한이 전혀 없는데도 기초단체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난 세계유산이 된다는 것은 제1부두가 전 세계인들에게도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니 부산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경사가 아닐 수 없겠다 싶은데도 몽니를 부리는 구청의 처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난 소멸위기를 맞은 부산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내가 약관의 나이부터 만난 부산항이 북망산천 갈 때까지 만이라도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 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