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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단지 골라잡는 간택만 피하라.
●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지극한 도(道)가 물흐르듯 자연히 밝고 환해진다.
종교의 같음과 다름을 떠나 한번쯤 읽어 보기
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주옥같은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종교에 대한 편향이나 편견은 없습니다.
다만 종교를 개인의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기꾼 들을 비판할 뿐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믿고 깨닫는다면 종교라는 굴레는 강을 건넌 후 버려야 할 배와 같이 벗어던져야 할 짐일 뿐입니다.
"너희가 내말에 따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자유의 대상에는 당연히 종교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기실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다만 누구나처럼 하느님만 모시라고...
이글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 신심명 소개
* 승찬대사(僧璨大師 ? ~ 606) ; 달마대사의 3대 법손(法孫)
신심명(信心銘)은 삼조 승찬대사가 저술한 146사언절구 584자로 되어있는 글이다.
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40대대(四十對對)로 갖추어 설명한다.
대대(對對)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스름과 따름(逆順), 옳고 그름[是非] 등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상대 개념이다.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의 양변을 여윈 중도법으로 선(禪)이나 교(敎)를 통합한 불교의 근본 사상이다.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1천7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를 포함하는 유일무이한 글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 <신심명>은 삼조(三祖)스님께서 우리가 처음 발심할 때로부터 마지막 구경 성불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신심에 대 해서 남겨 놓으신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詩文)입니다.
이 <신심명>에 있어서 신(信)은 곧 믿음이 보통의 신(信), 믿음이 아니라 신, 해, 오, 증(信解悟證) 전체를 통하는 신 (信), 믿음입니다.
글 전체는 4언절구(四言絶句)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천칠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전체가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모두들 평(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심명의 근본 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글 전체가 모두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신심명 본문
1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니
2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 통연히 : 물흐르듯 자연하게
3 毫釐有差 天地懸隔 호리유차 천지현격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4 欲得現前 莫存順逆 욕득현전 막존순역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두지 말라.
5 違順相爭 是爲心病 위순상쟁 시위심병
어긋남(違)과 다름(順)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6 不識玄旨 徒勞念靜 부식현지 도로염정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7 圓同太虛 無欠無餘 원동태허 무흠무여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8 良由取捨 所以不如 양유취사 소이부여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9 莫逐有緣 勿住空忍 막축유연 물주공인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10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평회 민연자진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11 止動歸止 止更彌動 지동귀지 지갱미동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12 唯滯兩邊 寧知一種 유체양변 영지일종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13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부통 양처실공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14 遣有沒有 從空背空 견유몰유 종공배공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현상이 거짓(假)이라고 하여 버리려하고,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의 세계를 참된 것(空)이라 하여 취하려고 한다면 현상과 본질이 융합하여 일어나고 있는 조화로운 세계(中道)인 실상을 망각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15 多言多慮 轉不相應 다언다려 전부상응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16 絶言絶慮 無處不通 절언절려 무처부통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17 歸根得旨 隨照失宗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나니
18 須臾返照 勝脚前空 수유반조 승각전공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空)했느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前空轉變 皆由妄見 전공전변 개유망견
앞의 공(空)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妄見) 때문이니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
20 不用求眞 唯須息見 부용구진 유수식견
애써서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진여(眞如)의 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妄見)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21 二見不住 愼莫追尋 이견불주 신막추심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22 縡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으리라.
23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24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부생 만법무구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없느니라.
25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부생부심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26 能隨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긴다.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27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28 欲知兩段 元是一空 욕지양단 원시일공
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29 一空同兩 齊含萬象 일공동양 제함만상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둘을 버리고 하나가 되면 그 하나가 바로 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이라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30 不見精錘 寧有偏黨 부견정추 영유편당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31 大道體寬 無易無難 대도체관 무이무난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32 小見狐疑 轉急轉遲 소견호의 전급전지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 지도다.
33 執之失度 必入邪路 집지실도 필입사로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34 放之自然 體無去住 방지자연 체무거주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35 任性合道 逍遙絶惱 임성합도 소요절뇌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36 繫念乖眞 昏沈不好 계념괴진 혼침부호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昏沈)함이 좋지 않느니라.
37 不好勞神 何用疎親 계념괴진 혼침부호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건가.
38 欲趣一乘 勿惡六塵 욕취일승 물오육진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六塵)을 미워하지 말라.
(무상대도를 성취하려거든 객관의 대상인 육진을 버리지 말며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집착심을 가지면 육진이 되고 눈 밝은 사람이 바로 쓰면 육용(六用)으로서 진여의 대용이라는 것입니다.)
39 六塵不惡 還同正覺 육진부오 환동정각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동일함이라
40 智者無爲 愚人自縛 지자무위 우인자박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41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무이법 망자애착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42 將心用心 豈非大錯 장심용심 기비대착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43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생적란 오무호오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44 一切二邊 良由斟酌 일체이변 양유짐작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45 夢幻空華 何勞把捉 몽환공화 하로파착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46 得失是非 一時放却 득실시비 일시방각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47 眼若不睡 諸夢自除 안약부수 제몽자제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48 心若不異 萬法一如 심약부이 만법일여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49 一如體玄 兀爾忘緣 일여체현 올이망연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50 萬法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 귀부자연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51 泯其所以 不可方比 민기소이 부가방비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2 止動無動 動止無止 지동무동 동지무지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53 兩旣不成 一何有爾 양기부성 일하유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54 究竟窮極 不存軌則 구경궁극 불존궤칙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55 契心平等 所作俱息 계심평등 소작구식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56 狐疑淨盡 正信調直 호의정진 정신조직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면
57 一切不留 無可記憶 일체부류 무가기억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58 虛明自照 不勞心力 허명자조 부로심력
허허로이 밝아서 자연스러우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59 非思量處 識情難測 비사량처 식정난측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60 眞如法界 無他無自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61 要急相應 唯言不二 요급상응 유언부이
재빨리 상응하려고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62 不二皆同 無不包容 부이개동 무부포용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63 十方智者 皆入此宗 십방지자 개입차종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지로 들어옴이라
64 宗非促延 一念萬年 종비촉연 일념만년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65 無在不在 十方目前 무재불재 십방목전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앞이로다.
66 極小同大 忘絶境界 극소동대 망절경계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67 極大同小 不見邊表 극대동소 부견변표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68 有卽是無 無卽是有 유즉시무 무즉시유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69 若不如此 不必須守 약부여차 부필수수
만약 이 같지 않을 지라도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
70 一卽一切 一切卽一 일즉일체 일체즉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하나는 작은 하나이며 일체는 커다란 전체입니다. 진여법계에서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바로 하나로서 하나와 많음이 서로서로 통하여,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71 但能如是 何慮不畢 단능여시 하려부필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72 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심부이 부이신심
믿는 마음은 둘 아니오. 둘 아닌 것이 믿는 마음이다.
73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도단 비거래금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마음의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조직이나 인간관계에서 부디 싫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하는 분별심(간택심과 증애심)을 내려놓으시기를…….
남 욕하지 마시고, 본인의 일만 본인의 주관대로 두 배로 더 열심히 하세요. 당신은 반드시 성공하십니다
■ 제3조 승찬(僧璨 : ? ~ 606)
대사는 가계(家系)가 분명하지 않다
혜가 대사에게서 법을 이어받은 후 서주(西周)의 환공산(晥公山)에 은거하였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불교를 탄압할 때는, 일정한 주거지 없이
태호현(太湖縣)의 사공산(司空山)을 왕래하며 사람들 모르게 10여년을 지냈다.
승찬 대사가 많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할 적에 한 사미가 있었다.
나이는 겨우 14세이고 이름은 도신(道信)이라 했다.
도신은 승찬 대사 앞에 나와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이때 승찬 대사가 되물었다.
"그대의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저는 지금 무심(無心)입니다."
"그대가 무심이라면 부처님에게 무슨 마음이 있겠느냐?"
승찬대사의 말이 끝나자 도신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스님, 저에게 해탈의 법을 일러주십시오."
승찬대사는 다시 되물었다.
"누가 그대를 속박하는가?"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해탈한 사람인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은 이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스승 곁에 8,9년 동안 있다가
길주(吉州)로 가서 구족계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승찬 대사가 도신에게 법을 전해줄 것을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花種雖因地 (화종수인지)
從地種花生 (종지종화생)
若無人下種 (약무인하종)
花種盡無生 (화종진무생)
"꽃은 땅을 인연하여 피어난다.
땅에서 꽃이 피기느 하지만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꽃이 피어날 수가 없다."
승찬대사는 수양제(隋煬帝)의 대업(大業) 2년(606)에 입적했다. 그 후 당나라 현종이
감지(鑑智)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그 유명한 "신심명(信심銘)"이라는 명저가 있다.
신심명에는 그의 선 사상이 단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서두에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구적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는 걸림이 없다. 오직 시비를 가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도라는 것은 쫓아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인가? 저 길인가?' 하고 따진다면 이미 도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도는 이상적이 어떤 세계가 아니라, 바로 시장 바닥의 평범한 움직이는 삶속에 있다.
시장바닥이라고 해서 꼭 시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평범하게 일을하고 쉬고 살아가는 이 현장이 도라는 것이다.
단지 신심명에서 말하듯이 간택하는 그 마음으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승찬 대사는 말했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二由一有
一亦莫守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등등으로 나누는 것은
하나라는 어떤 사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없으면 그러한 나눔이 없다. 어떤 사물이든지 있기에 좋다 나쁘다 한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그것의 대상인 사물(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라고 하며
그 하나라는 사물도, 항시 끊이지 않고 변해 흘러가니,
그것을 잡고 머물지 마라는 것이 바로,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의 해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악, 미추, 시비등이 근본으로 돌아가면 하나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
그 하나가 절대 영원 공 등으로 지칭을 한다.
그리고, 그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는 것을
그 절대, 영원, 공에도 집착하여 매이지 말라고 하는 뜻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버리면,
너무나 학문적이고 형이상학적이 되어 버려서,
우리의 삶과는 어쩐지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한다면,
신심명에서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라고 하지 않고,
"둘은 하나에서 비롯됨이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라는 것이 삶을 떠나지 않았는데, 절대이니 영원이니 공이니 하면,
신심명에서 말하는 간택만 하지 않으면 바로 도라고 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 삶이 바로 도라고 하는 취지와 멀어져버린다.
그는 우리에게 다시 말한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혜가는 선대인 달마대사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독약에 의해 생명을 잃게된 일을 한시도 망각할 수 없었다. 동시에 새로움이 아무리 존귀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새로움을 용납받게 되기까지 대단히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혜가는 선대의 죽음을 보고 자기자신의 운명도 결코 평탄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상에 늘 위험이 따른 것처럼 승찬에게 달마의 법을 전승한다면 승찬도 역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예측했다. 승찬에게 법을 전수한 혜가는 자신의 예감에 맞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새로운 불교의 선법(禪法)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선대 선사들은 목숨을 잃는 순간에도 - 초조인 달마선사와 2조인 혜가선사가 모두 법을 위하여 생명을 잃게 되었다 -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는 말을 외쳤다.
혜가선사는 승찬선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앞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몸을 조심하게.
나의 신상에 항상 위험이 따르고 있다면 앞으로 자네의 신변에도 위험이 따를 것일세.
그대는 되도록 나의 일에 말려들지 말고 멀리로 피신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일세."
혜가선사의 부축을 받은 승찬선사는 거리에나가 미치광이 짓을 여러 날 계속하다가
어느날 불현듯 자취를 감추었다. 서주에 있는 사공산(思空山)에 몸을 묻었다.
사공산에서도 오래 있을 수 없어서 다시 완공산으로 피신했다.
주(周)무제(武帝)의 폐불 횡포를 피해 완공산에 몸을 묻고 10년 동안 칩거했다.
완공산은 워낙 산세가 험준하여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인적이 끊긴 악산인지라 맹수들이 들끓었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맹수들에게 살상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승찬선사가 완공산에 온 이후로는 맹수들도 승찬선사를 알아보고 다른 산으로 떠나갔다.
승찬선사는 선대인 혜가선사로부터 법을 물려 받은 후 완공산에서 선수(禪修)에 전력하여 자증성지(自證聖智)를 더욱 공고히 했다. 승찬선사가 혜가선사로부터 선가의 비법을 전수받고 완공산에 묻혀 그의 자증성지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달마의 정법은 이입(理入)과 사행(四行)을 견고하게 지켜나가는 것을 말한다.
사행 중에서도 법대로 사는 삶을 가장 수승하게 여긴다.
법대로 살기 위하여 정법을 사수하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왜 법대로 살려는 사람을 헤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정법이 무섭기 때문이다.
법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은 법대로 사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법대로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헤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세에서는 법대로 살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깊은 산 속에 몸을 묻는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속에 깊이 몸을 묻어도
정법을 지키는 사람은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들어나기 마련이다.
송곳같은 기개와 신념을 가진 몇몇 안되는 정법학자(正法學者)에 의해서
정법의 맥락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간다.
그래서 선가의 혜맥(慧脈)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정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등(傳燈)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어두운 암흑 세계를 밝힐 수 있는 빛의 씨앗을 꺼뜨리지 않고 면면히 이어 나왔다는 뜻이다.
하나의 이념, 하나의 신념, 하나의 정신이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14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든 승찬선사의 높은 도성(道聲)은 제방에 널리 알려졌다. 여러 사람들이 찬선사를 설명했다. "달마조사가 법통을 전승해준 이래로 승찬선사처럼 신비롭고 찬란하게 빛을 일으키는 보주(寶珠)는 없다.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게 작용하는지라 그가 갖는 깊은 생각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이 높다."
승찬선사는 법난이 잠잠해진 다음 여러 선사들과 함께 나부산(광동성 전백현과 박라현 경계에 있는 산인데 예로부터 도교의 영지로 이름이 높다)으로 돌아가 몸을 감추고 3년 동안 다시 칩거했다.
문제(文帝)가 수(隋)를 세우고(581년)난 20년후 인수(仁壽) 초년(601년) 대회제(大會齊)가 열렸다. 문제는 13개 주에 명하여 사리친견법회를 열었다.
승찬선사는 처음으로 산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빛은 형형했으며 기상도 역시 대단했다.
대중 앞에 우뚝 서서 처음으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여기 있는 것은 유일무이한 진실일 뿐 제2도 없고 제3도 없다.
따라서 깨달음의 경지는 거기에 숨겨져 있고, 언어 표현이 미치지 못한다.
진리의 주체는 망망하고 고요하여 듣고 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글자와 말은 소용없는 사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승찬선사는 다시 말했다.
"나는 당장에 먹고 싶다."
제자들이 음식을 바쳤다. 음식을 먹고난 승찬선사는 목청을 가라앉혀 말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좌선에 든채로 죽는 것을 우러러 보고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대들은 앉은 채 죽는 것을 기이하게 여길 것이나 나만은 생사를 자유자재로 한다.
나는 이제 선채로 죽으려 한다. 나는 생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승찬선사는 말을 마친 후 한쪽 손으로 회의장 앞의 나무 가지를 잡고
조용히 선 채로 숨을 그쳤다.
그는 누에고치 속에 갇혀 있던 벌레가 자기를 속박하던 두터운 껍질을 벗고
선탈(蟬脫)을 단행하여 드높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듯,
나무 가지 하나를 손으로 잡은채 조용히 자신의 빈 껍질을 떠나 멀리로 날아올랐다.
승찬선사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승찬선사의 탑묘는 완산사의 옆에 있다. 설도형이 비문을 지었다.
승찬선사는 여러 제자중에서 도신에게 법을 전했다.
승찬선사는 말도 하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지만 그의 법을 이은 도신선사는 그렇지 않았다.
북주(北周)가 망하고 수나라가 세워진 해가 581년이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선 해가 618년이다.
승찬선사는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인물로서
정법안장을 지키고자 극심한 고초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찬선사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정법을 굳굳하게 지켜나갔다.
초조인 달마대사와 2조인 혜가대사가 외부의 힘에 의해 목숨을 잃은 반면에
승찬선사만은 자기의 임의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우뚝 선 채 스스로 선탈을 결행했다는 것은
후일 선종(禪宗)의 앞날을 예측 할 수 있게 한다.
도신과 홍인을 통해 달마의 선맥이 이어져 나가지만
혜능 이후로부터는 그 맥락이 사실상 단절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혜능을 끝으로 하여 달마의 의발이 전승되지 않는다는 것은
혜능의 다음 대에 이르러서는 초기선종의 종지가 굴절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