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250) -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설리번은 자기의 쇼에 일곱 곡이나 부르게 하고, ‘나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국민들에게 이 가수야말로 정말 품위있고, 훌륭한 청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세상이 푸대접한다고 억울하면 출세를 해보세요)
1956년의 인기차트에서 그의 노래가 25주나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가 벌어 들인 돈도 천문학적이었다. 그의 히트 곡 ‘러브 미 텐더’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서 출연도 했다. 이때는 엘비스 프레슬리 뿐 아니라 다른 록 스타들도 많이 나타났다.
(록은 로콘록과 비슷하며, 유파라고도 하고, 록과 로콘록은 같은 뜻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록이 좀 더 일반적인 명칭이라고 한다.)
전기 기타와 엠프가 개발되면서 전국 순회 콘서트가 용이해졌다. 청중은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흑인과 백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무대에도 흑인가수와 백인가수가 뒤섞여서 노래 불렀다. 그래서 흑백의 인종정책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금속성의 사이킥한 음은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들을 수 있어. 인기가 급상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인들의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의 대중 집회’에 비유하면서 불편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