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4
5월13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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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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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79OELveJrE (최기석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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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리 들어오너라. 여기가 내 집이고 곧 네 집이란다!>
헨리 나웬 신부님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비장이 크게 파열되고, 수술 중 출혈이 심해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들도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다행히 헨리 나웬 신부님은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되는데...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헨리 나웬 신부님 역시 요르단강을 건너갔다가 되돌아온 임사 체험을 했고, 그것을 회복 후 뚜렷이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체험의 조각들은 나중에 소책자로 엮어 출간되었는데, ‘거울 너머의 세계’입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죽음 체험의 순간이 너무나 은혜로워 의외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순간 어떤 크신 분, 따뜻한 분,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한 분의 현존이 느껴졌는데, 예수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답니다.
그 순간 그분께서는 세상 자상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헨리, 잘 왔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문을 하나 열어주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셨답니다. “이리 들어오너라. 여기가 내 집이고 곧 네 집이란다.”
그 순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자신이 평생토록 안고 살아왔던 걱정과 근심, 고통과 슬픔, 죄책감과 우울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신비 체험을 할 수 있었답니다. 크신 분의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모든 어둠이 사라지는 느낌, 다시 태어나는 느낌,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고향에 안착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 체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복음 14장 1~3절)
따지고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수명이 다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급 서비스를 베푸십니다. 당신 아버지 집에 우리 거처를 마련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아버지 집으로 안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힘겨워질 때마다, 고통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마다, 언젠가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황공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친히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길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놓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를 그 집으로 친히 안내해주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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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loidZaqp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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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흐르는 본성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질서가 반드시 생긴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것이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막을 짓기 위해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문 것과 같습니다. 모세를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거처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거처가 곧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 모든 신비를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정리해주십니다. ‘길’은 통로입니다. 모세가 곧 하느님께 머무는 통로가 되어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을 흘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은총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자기 봉헌입니다. 항상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내려오십니다. 성령은 생명이시기에 당신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에게만 오십니다. 하느님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는 자신을 죽음으로 인정하는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 때 내려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방법이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생명의 주인임을 자처하려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느님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하는 자기 봉헌이고 제사이고 기도입니다. 미사 때 이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셔도 그분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생명의 주체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먹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 사람이 생명의 주인을 자신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창조자로 두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 덕분으로 자신이 산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살고 있다고 믿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 덕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그 아이는 분명 다른 아이의 돈을 빼앗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와 관계가 좋다면 생명까지 주신 원천이 옆에 있기에 굳이 타인의 것에 손을 뻗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EBS 육아학교’에서 ‘물건 뺏는 첫째, 뺏기고 우는 동생’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민이는 언니이고 지윤이는 동생인 자매입니다. 처음에 지민이는 동생이 생겼을 때 매우 잘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이가 기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지민이는 지윤이의 모든 물건을 다 빼앗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합니다. 엄마는 ‘둘째에게 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첫째가 질투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자연스레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입니다.
유아 전문가 선생은 엄마가 두 자매와 노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민이는 지윤이가 가지고 노는 것을 다 빼앗았고, 엄마는 지윤이에게 욕심 많은 언니에게 지윤이가 양보하도록 합니다. 지금 이것은 엄마가 질서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지민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지윤이를 어른 취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선생은 엄마에게 따끔하게 말해줍니다. 지민이를 언니로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지윤이에게 양보하게 가르치면 언니는 영원히 욕심쟁이로 남습니다. 지민이는 장난감을 빼앗긴 지윤이에게 심지어 엄마가 듣는데도 “너네 엄마 저기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윤이는 이런 지민이에게 다가가면 안 됩니다. 그에게서 흐르는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기도할 줄 모르면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서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를 빨립니다.
만약 지민이를 포기하고 지윤이에게 더 사랑을 주면 지윤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고마워할까요?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지민이가 엄마에게 먼저 다가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윤이를 위한 공간을 언니가 마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모두에게 흐를 수 있습니다.
언니를 그렇게 외면한 엄마가 언젠가 자신도 외면하게 될 것이라 여겨 지윤이도 결국 엄마가 주는 사랑의 부담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있다고 믿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지민이가 아닌 동생 지윤이에게 더 있다고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깨집니다. 먼저 지민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래서 지윤이에게 엄마에게로 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은표 씨 가족 지웅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정은표 씨는 김하얀 씨와 테니스를 칩니다. 그리고 지웅이에게 동생을 마중 나가라고 시킵니다. 지웅이는 아빠 미소로 동생을 돌봅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줍니다.
어떻게 중3 아이가 남동생에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잘한 것입니다. 지웅이를 동생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동생은 형 지웅이를 통해 부모에게 올 수 있고 지웅이는 부모에게 가기 위해 동생을 보살핍니다.
아마 정은표 씨에게는 자녀들보다 아내일 것입니다. 아내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남편에게 먼저 가야 함을 알 것입니다. 이렇게 이 가족은 사랑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잘 아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에덴동산에 사는 것처럼 삽니다.
민수기에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르얌이 모세에게 대든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은 하느님이 동생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하여도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셋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에는 질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건너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인 구름이 물러가자 미르얌의 피부에 나병과 같은 병이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아론은 미르얌을 위해 모세에게 중재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미르얌의 병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 사랑에 질서를 잡아주시는 이유는 모두에게 사랑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제를 무시하고 신자들끼리 주님께 은총을 청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길로 지정해 준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은총보다 오히려 안 좋은 것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셨는데, 그 교회를 무시하고 직접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은 흐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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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혼란스러워하자 그들을 위로하신다. 이 말씀은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하나로 만들며, 그분의 하느님이심을 아버지의 하느님이심과 하나로 만든다. 즉 그분도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이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바칠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하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 34) 하신 그 나라이다. 하느님의 이 집, 하느님의 이 성전, 하느님의 이 나라와 하늘나라는 지금 지어지고 세워지고 준비되고 있다. 거기에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 자리가 마련된다. 사랑을 살며 감사하는 삶으로 마련하는 자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이렇게 살아서 그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되리라 하신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은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므로 우리가 있게 될 거처는 바로 그분이시다. 여기서 생명은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아는 것이다. 이 길은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을, ‘진리’는 거룩한 교회를,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길’은 완덕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복된 목적지,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들을 통하는 길이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므로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라고 하면, 아들이신 하느님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아드님은 참되신 분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태초의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덕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믿음으로써,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올 삶을 소망함으로써이다. 우리의 인도자요 수단이 되는 분이 바로 아들이시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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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이 말씀 앞에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이 있고(요한 13,21), 당신이 떠나신다는 말씀(요한 13,33)과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이(요한 13,38)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제자들은 몹시 불안해졌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입니다. (모르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일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면 용감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수난 당시에는 겁에 질려서 달아났지만, 예수님 부활 후에는 모두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때에는 죽음 자체를 무서워했지만, 이 세상을 지나가면 저 세상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확신하게 된 다음에는 믿음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순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은, 곧 닥칠 일들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불안을 극복하여라.”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든지 간에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는 변함이 없고, 또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눈앞의 일만 보고서 흔들리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크게 방해를 받은 일이 아니라, 구원 사업의 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있다고 해도, 죽음과 이별은 슬프고 아픈 일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도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으로 사별의 슬픔과 아픔을 극복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ㄱ.25)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 함께 모이기를 바라는 희망.>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2-4)
여기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모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세력에게 패배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의 전 단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와서’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재림’이 아니라 ‘부활’을 뜻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8절에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고아처럼 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너희는 나의 수난의 의미와 결과를 알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수난 예고와 부활 예고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들을 완전히 깨닫고 이해하고 믿게 된 때는 예수님 부활 후입니다.(요한 2,22)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그 깨달음과 믿음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 깨달음과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6)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당시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는 말은, 예수님 수난의 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모른다는 말은,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로 해석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많은 가르침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가르쳐 주셨고, 그곳으로 앞장서 가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고, 또 ‘문’입니다.(요한 10,9)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는 ‘진리’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필요도 없고, 또 읽으면 안 되는 책들도 많습니다.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진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을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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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학을 먼저 배울 줄 알았는데 철학을 먼저 배웠습니다. 철학이 바탕이 된 후에 신학을 배우는 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신학이라는 보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철학, 고대철학, 중세철학, 근대철학, 형이상학, 동양철학을 배웠습니다. 자연철학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고,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공기라고 하고,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원자라고 하였습니다. ‘흙, 물, 공기, 빛’이 만물의 근원이라고도 합니다. 철학의 방법론도 배웠습니다. 연역법과 귀납법을 배웠고, 합리론과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으로 만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배웠고, 그것이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에도 종류가 많았습니다. 성서신학, 윤리신학, 교의신학, 실천신학, 교회법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전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한분뿐이시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유의지의 결과는 은총과 죄라고 배웠습니다.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데 사용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자유의지를 욕망과 욕심을 찾고, 남을 해롭게 하는데 사용하면 죄가 드러나고 고통이 따릅니다. 지진, 화산활동, 태풍, 화재와 같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고통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듯이 우리가 있는 지구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구조적인 죄, 세상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잘못 사용하는 인간의 죄입니다. 전쟁과 폭력이 있습니다. 2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인간의 구조적인 죄의 결과를 드러냈습니다. 인종차별, 식민지 지배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었습니다. 신분, 혈연, 성별, 세대, 이념으로 인한 차별 또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산에 오를 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작은 표시는 큰 힘이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땀과 노력입니다. 역사는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더 낳은 미래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이며 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 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군중들의 모욕이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이 있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부활의 길이었고, 희망의 길이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알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 원리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런 가치와 척도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진리는 때로 독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광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독점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항해하는 배를 안내하는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밝은 빛으로 안내할 뿐입니다. 밤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등대가 밝히는 빛을 따라서 암초를 피하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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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7장 33절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 할 길, 당신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다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것을 결코 안다고 하지 않는 자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토마스 사도였습니다.
토마스는 너무도 솔직하고 열성적이어서, 마음에 와닿지 못하는 막연한 신앙의 진리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토마스에게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자기가 미심스럽게 느꼈던 것, 그리고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께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말씀은 바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의심에 대한 답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에 누구도 자신이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될 때,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하는 자는 나중에 가서 언젠가는 찾게된다는 것은 놀랍고도 다행스러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사도가 예수께 "주님,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질문할 때 예수는 위대한 진리를 밝히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온 유다인들은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과 하느님의 길에 대해서 말한 것을 보면, 신명기 5장 32-33절에는 "너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 하였고 이사야 30장 21절에 보면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올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했고 시편작가는 "야훼시여, 주의 길을 늘 가르치소서!"하고 시편 27, 1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을 찾아갈 때에 길에서 물어서, 물어서 찾아가기를 같은 길을 가더라도 어려움이 많지만, 그러나 그 길을 잘 아는 안내자를 따라 갈 때는 가기가 퍽이나 쉬운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할을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확고한 믿음을 가지도록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직결되어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일치된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가 깨지게 되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흔들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계시하기 때문에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현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은 유일무이한데, 그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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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태 바오로 신부님]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자신감에 가득 찬 예수님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만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영웅을 따르면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멋있게 드러나시는 순간입니다. 적어도 신앙이란 말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이 이상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기에 주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다 걸치고 있는 이들. 적당히 필요한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세상을 떠날 수도, 떠날 생각도 없는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잔뜩 힘을 빼 버립니다.
"걱정도 없습니다. 어떤 쪽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우리는 움직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 있는 빈 공간도 이 세상의 좋은 곳과 바꾸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니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고, 또 되도록 이면 그 세상과의 만남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확신 없이 헤매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이 예수님의 간절한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없이도, 참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하필 그 어려운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화번호 몇 번 누르면 좋은 일 하게 되는데, 왜 굳이 손을 걷어붙이고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더 발달된 이 세상에는 나도 좋고 좋은 일도 하는 괜찮은 방법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당신의 삶이 유일한 길이라는 욕심을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길을 바꾸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냥 상상 속에 그려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교회가 이 세상에 맞춰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 세상이 "나를 따라 오시오"라고 외쳐대고, 그 길을 예수님이 숨차게 따라가는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진리가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일 만큼 교회가 거대한 기업처럼 움직이려 애를 쓰고, "예수님 우리만 믿고 따라오시면 좋은 곳에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 외치며 좋은 곳, 멋진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꾸미려 하는 많은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일단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맨발로 벗어나려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뒤집어, 세상의 논리 속에서 그 속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해결점을 찾으려 하니 얼마나 대단한 시도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가난했던 청년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불가능했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기에 가능한 것일까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시한번 이 시대의 모든 신앙인들에게 저를 비롯하여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다른 가치인가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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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주교님]
<침묵>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던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놓았던 업적, 수많은 사람들과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 온갖 정성과 성의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시간 등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날이 바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 침묵할 수 있다면….
어느 날 좀 여유 있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때보다 목적지를 향해 30분 정도 서둘러서 출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눈으로 길이 막히게 되었고,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긴 했지만, 순간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길은 막히는 것이고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진정시키면서 정신적인 짐이라도 덜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급해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양해를 구하고, 느긋하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늦기는 했지만,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지요.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렵고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차피 좀 늦더라도 약속 장소에는 갈 수 있는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늦을 것이라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는데, 괜히 혼자서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가’이겠지요. 침묵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만큼 빨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나갈 수 있겠고, 그렇지 못하면 침묵하는 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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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흔들리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견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마저 배신하는 끔찍한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길이신 그분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을 추구하기에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걸으신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에 믿음을 두는 만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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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어지럽고 어수선한 상태를 ‘산란하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저마다 걱정과 근심을 안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산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예수님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그의 동생들과 지인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또다시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도 다시 한번 산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 산란한 마음을 다잡으시고 다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근심과 걱정을 아버지 하느님께 내어 맡기신 채,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십니다. 그렇게 하시어 그분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되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가 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 곧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하느님을 믿고, 또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며, 흩어지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오늘 하루도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하여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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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아버지께 가는 길!>
믿는 이들의 여정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곳에 가셔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놓겠다고, 그래서 당신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요즘 '말 그릇'(김윤나 지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31-34쪽 참조)
"말은 한 사람의 인격이자 됨됨이라고 한다. 말을 들으면 그 말이 탄생한 곳, 말이 살아온 역사, 말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말은 한 사람이 가꾸어 온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말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이 성장해야 한다."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공간이 충분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들은 말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의 분노에 쉽게 대항하지도 않고, 설령 말에 넘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순간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안다."
"반대로 말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조급하고 틈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차분하게 듣질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만 말 그릇을 채운다.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고, 과장된 말을 사용하고, 두루뭉술한 말 속에 의중을 숨긴다."
저자는 '말 그릇'은 곧 '내 마음'이며, 이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의 창고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분의 영께서 머물러 계시게 하는 것이 내면이 성장하는 것이고, 말 그릇을 키우는 일이 아닐까?
내 마음의 창고에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면, 쉽게 헛생각과 헛말과 헛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말 그릇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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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3월, 사순시기에 들어서면서 외부 강의가 많아졌습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2년간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강의 일정을 잡아놓고도 취소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제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강의 부탁이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를 필요로 한다는 말에 어떻게 안 가겠습니까?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이 사는 신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신부와 함께 차를 타기도 했고, 식사도 같이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약간의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하고 하루 동안 방안에서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걱정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강의는 어쩌지? 성지 미사는 어떻게 하지? 또 안치 예식은 누가 하지? 혹시 직원들도 확진된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때,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제가 코로나 확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미사와 안치 예식을 부탁할 신부도 충분히 있었고, 강의는 몇 주 미루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결과는 음성 판정을 받아서 모든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시점에서도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킬 만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주님은 분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재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인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거처할 자리를 마련하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많은 걱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걱정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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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기쁨, 감사, 행복-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에디트 수녀님!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예수님 부활상 사진에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보낸 감사의 메시지입니다. 어제는 참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평생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아 온 믿음의 수녀님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포천에 거주하고 있는, 또 피정중인 베네딕도회 수녀님들의 미사와 고백성사를 위해 수녀원을 방문했습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닌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신록으로 빛나는 왕방산이 배경을 이루며 품에 안고 있는, 흡사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듯한 참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수녀원이였습니다. 순간 ‘아, 나도 산같은 배경의 품이 되어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종일관 환대의 분위기도 좋았고 연로年老함에도 불구하고 맑고 평화로운 모습의 수녀님들이었습니다.
“오늘 특히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제가 방금 미사때 한 강론 원고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바로 고백성사 보속입니다.”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라’는 보속이니 얼마나 멋진지요! 내심 아주 흡족했습니다. 사실 기쁨과 감사보다 더 좋은 영혼의 명약도 없습니다. 참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살면 영혼의 건강에 육신의 건강도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흡사 고백성사가 찬미와 감사의 성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모든 수녀님들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고백했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정리와 정화를 위한 아주 귀한 시간이 마련되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부지런히 기도하고 일하며 관상적 정주의 삶을 사시는 모습이었습니다. 90세 최고령의 건강한 릿타 수녀님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귀도 눈도 밝고 음성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평생 성경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만 읽습니다. 다른 책은 전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도 매일 성사 필사를 합니다.”
몸소 작은병에 담아 온 향기로운 오미자술을 따라 주어서 한잔 마시니 영혼은 기쁨으로 취하는 듯 했습니다. 위로와 평화를 담뿍 선물로 안고 수녀원을 떠났기에 어제 소풍으로 인한 피곤도 다 풀린 듯 참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믿음이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의 믿음의 여정인지요. 제가 늘 강조하는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품위있는 노년의 삶을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 이 우선순위가 바뀌어선 안된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참 좋은 최고의 유산은 단 하나 하느님 믿음뿐이다.
오늘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격려하시며 위로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 약속인지요! 그러니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전혀 안해도 됩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넓은 내적공간에 내적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천국을 앞당겨 삽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의 집,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느님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우리 또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되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멸망에 이르는 화려하게 포장된 거짓된 길들은, 죽음의 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께 이르는 진리의 이정표, 생명의 이정표가 되는 예수님을 닮은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이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바오로의 감동적인 설교입니다. 이미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앞당겨 사는 진리의 이정표, 생명의 이정표가 된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을 살리시어 우리에게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새롭게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생명을, 찬미와 감사의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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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oESxawR6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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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
오월의 자리
오월의 집에는
아름다운
생명으로
가득하다.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오늘
우리가
다시 만난다.
길도 진리도
생명도
모두 하느님을
향해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에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길도 진리도
생명도 뜨겁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오월이 된다.
잡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생명의 길이다.
인생이라는
길들을 통해
새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알게 된다.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사랑의 진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예수님같이
나누고 또 나누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삶을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을
통해서만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새롭고도
참된 길이다.
거처할 사랑의
집을 위해
사랑의
진리이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해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다.
참된 사랑이란
하느님과 함께
서로를 위해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알게 하는
나눔이다.
나눔을
안겨드리는
믿음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예수님같이
나눔이 길이고
나눔이 진리이며
나눔이 생명이다.
오늘도
나누어지고
쪼개어지고
부서지는
생명의 빵이시다.
나누지 않고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 턱이 없다.
나누지 않고서는
갈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나눔과
산란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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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 4)
사라지는 길이 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 생명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길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당신 먼저
생명을 열어
생명의 길이 되시어
하느님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생명의 길은
산란한 우리 마음을
믿음으로
바꾸어줍니다.
믿음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우리와 함께하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 길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그 길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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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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