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다
쇤베르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 쇤베르크가 전통적인 조성음악을 비판한 것과 마르크스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을 비판한 것은 일맥상통한다. 쇤베르크가 보기에 전통적인 조성음악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조성과 화음의 법칙을 인위적인 것이 아닌 신의 법칙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전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설이 바로 그러하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을 자본주의 사회에 ‘한정된’ 법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초역사적인 법칙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고전경제학자들에게 경제법칙은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법칙인 것이다.
스미스의 ‘로빈슨 크루소 일화’는 이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스미스는 혼자 섬에 표류하게 된 로빈슨 크루소마저도 가계부와 상품의 목록을 기록하고 이를 화폐 단위로 계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모습이 경제관념을 갖춘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스미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이미 인간은 화폐 계산 능력을 지니고 재화를 화폐 단위로 환산하며 교환을 전제한다. 이는 원시시대에도 이미 조개나 곡물이 화폐를 대신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로빈슨 크루소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온 사람이므로 그러한 일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또한 원시시대에 조개나 곡물이 화폐처럼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자본주의적 화폐의 형태를 일반화하여 과거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에도 화폐가 사용되긴 하였지만 그것을 화폐경제였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시장경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재화는 상품의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직접적인 소비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폐경제를 일반화하여 과거의 사회까지 소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중세 음악의 선법이나 바로크 음악의 대위법을 독자적인 음악 형식이라기보다는 근대 조성음악의 맹아적 형태라고 보는 거만한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히고자 한 것은 ‘노동가치설’의 정당성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지닌 허위적 기능이라고 보는 해석이 최근 들어 우세해졌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이른바 ‘실체론’과 ‘형태론’의 대립이 존재하는데, ‘형태론’의 우위가 이를 잘 설명한다. 가치실체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상품의 가치를 실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정량화하려고 하였다는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투여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를 그것에 투여된 평균 노동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 가령 볼펜 한 자루를 만드는 데 소모되는 노동시간을 계산하고자 한다면, 볼펜심, 포장지, 플라스틱 케이스, 잉크 등 무수히 많은 재료들을 만드는 데 투여된 노동시간도 계산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볼펜심만 하더라도 또다시 철을 가공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 운반 노동시간, 볼펜심을 만드는 주조 틀을 짜는 데 투여된 노동시간 등을 계산해야 한다.
실제로 일본 출신의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 1923~2004)는 온갖 계량경제학적 방법을 총동원하여 실체론의 입장에서 마르크스 가치론을 실체화하려 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설혹 상품에 투여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의 계산에 성공하여 상품의 가치가 어떤 값을 갖는지 알았다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가치가 곧바로 가격이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우연적 변수에 의하여 가치는 가격과 일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가치가 가격으로 변화하는 ‘전형(transformation, 변형)’의 문제를 고려하였으며, 가격은 우연적인 변수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실체론’의 입장과 달리 ‘형태론’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이 상품의 가치를 정량화하고 실체화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반대의 목적을 가졌다고 해석한다. 형태론적 해석을 주창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스미스와 리카도의 이론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이론을 송두리째 넘어서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1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라고 할 수 있는 상품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치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 형태 분석을 통해서 얻어진 결론은 자본주의 사회가 과거의 사회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화폐에 의해서 상품의 가치가 일반화된 사회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라는 보편적인 등가물에 의해서 모든 상품의 가치가 측정되는 사회인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모든 경제적 가치가 화폐의 형태로만 현상되는 유일한 사회가 곧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봉건제 사회, 고대 동아시아 사회, 노예제 사회 등 어떤 사회의 형태도 모든 경제 가치가 화폐의 형태로만 규정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모든 가치가 화폐가치로 일반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물화된 사회’로 묘사하였다. 물화된 사회에서는 사람이 주체가 아닌 사물이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가령 재래시장에서 상품을 팔고 사거나 혹은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교환과 거래는 사람들이 아닌 사물들 혹은 숫자의 움직임으로 보일 뿐이다. 실제로 주식시장의 애널리스트나 경제학자들은 이때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숫자이며 사람은 그 숫자의 움직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스미스의 경제학은 정확하게 물화된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스미스의 경제학은 수요와 공급, 자연가치와 시장가격 등의 경제적 지표들이 초역사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가치설은 바로 상품의 교환법칙이 하나의 자연적인 법칙인 것으로 추상화하고 있는 물화된 이론으로 여겨질 수 있다. 형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가치설의 목적이 상품의 가치가 추상적인 노동으로 정량화되는 자본주의의 착취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를 통하여 상품경제의 법칙은 초역사적인 법칙이 아닌 단지 자본주의 사회에 ‘한정된’ 법칙일 뿐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물론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형태론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정치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 경우 엄청난 분량과 지적 노고가 깃든 《자본론》이 그저 부르주아지 경제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정치입문서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이 단순히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넘어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명칭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거대 이론에 의지한 근대사상을 넘어서고자 한 근대 너머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