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평화의 노래를 부르기까지
√ 그날이 오면(https://www.youtube.com/watch?v=MZmbqfjJB-M)
: 통일을 염원하며 2007년 당시 최고의 가수들(이효리, 옥주현, 김종국, 김범수, 휘성, 거미, 박화요비, 이승철, 김건모 등)이 함께 부른 노래
수없이 계절은 바뀌어도 / 변치 않는 단 하나 /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 / 그리워 너무 그리워
우리의 이별은 너무 길다 / 이젠 만나야만 한다 / 서운한 마음은 모두 잊자 / 우리는 하나니까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 / 다시 만나야만 한다 /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 기쁜 노래를 부르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 우리 다시 만날 그 날 / 기쁨과 행복의 눈물로 / 세상 가득할 그 날을
그리운 백두산 산새 소리 / 한라산이 춤을 출 때 / 가슴에 맺혔던 애달픔이 / 이제야 녹는 구나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 / 다시 만나야만 한다 /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 기쁜 노래를 부르자
통일 노래를 부르자
√ 통일과 평화는 결국은 구체적인 만남이다. 하지만 당위적 명제가 아니다. 간절함의 표현이라면 모르겠지만, 만남은 당위로 가능하지 않다. 잘 만날 수 있는 존재로 변해야 한다. 잘 만나려면 중심이 있어야 한다. 중심이 있어야 눈치를 보지 않는다. 통일 정책에 있어 문재인 대통령은 중심이 있다. 어떤 중심일까. 지난 일 년의 행보를 종합해 봤을 때 북한이 적이 아니라 만나야 할 이웃이라는 중심, 분단의 현실(국토 분단, 만남의 장벽, 이산가족, 안보장사, 간첩사건, 경제적 손실 등등) 로 고통당하는 이들의 오늘을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중심이 아닐까 싶다. 이런 중심으로 너를 살피고 주변을 살폈다. 필요한 순간에 움직였다.(2차 남북정상회담)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게, 운전대를 쥐고 평화를 위해 달려왔다. 중심이 있기에 가능했다.
√ 만남은 상시적이어야 한다. 물리적인 시간이 만남의 질을 담보해주진 못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의 축적은 상호 신뢰에 있어 중요하다. 자주 만나야, 그 가운데 함께 웃고 울어야 힘들고 어려운 일도 헤쳐갈 수 있다. 일상의 만남이 부재할 경우, 커다란 사건을 만나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 관계가 깊어지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통일의 문제도 그랬다. 만남과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시적으로 만나진 못했다. 정상회담과 고위급회담 정례화를 결정하고, 개성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하고, 최고 지도자 간 직통 전화를 설치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화가 빈 말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평화를 위한 제도화’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반갑고 고맙다. 5월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 발표문에 상시적 만남에 대한 의지가 엿보인다.
지난 회담에서 우리 두 정상은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든 격식 없이 만나 서로 머리를 맞대고 민족의 중대사를 논의하자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그제 오후, 일체의 형식 없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고, 저는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남북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상 간의 만남과 직접 소통을 강조해왔고, 그 뜻은 4.27 판문점 선언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4월의 역사적인 판문점 회담 못지않게, 친구 간의 평범한 일상처럼 이루어진 이번 회담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남북은 이렇게 만나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현실에는 통일과 평화를 반기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일을 말하지만 통일을 원하지 않고,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다. 그 규정으로 인해 이득을 취한다. 북한만이 아니다. 나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이를 적으로 규정한다. 우리 안에 이러한 문화가 팽배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규정하는 왜곡된 문화 말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나를 힘들게 하면 나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 사람이 왜 그런지, 혹시 내가 그 사람을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은 없다. 자신을 위한 진실한 마음으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다고 해도, 상한 감정을 내세우며 적이란 규정을 철회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행보는 이러한 왜곡된 문화에 저항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올 초 평화가 삶의 화두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의 기운에, 평화를 위협하는 내 안의 폭력과 전쟁의 기운을 몰아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지냈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 쉽게 화를 발하는 오래된 습을 고치고자 노력했다. 그 화가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 안에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화는 너를 위한 그 마음을 앞서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노력의 흔적은 남은 것 같아 감사하다. 하지만 한참 멀었다. 중심 없이 흔들릴 때가 있고, 일상에서 부지런히 만나가는 힘이 부족하고, 나를 힘들게 한다 싶으면 쉽게 적으로 규정하고, 평화를 위해 치열하게 살지도 않는다.
√ 평화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치열하게, 열심히 살 때 맛볼 수 있다. 아니 그래도 맛보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 씨앗은 자라고 누군가는 그 열매를 맛본다. 평화를 위해 존재를 걸었던 이들의 걸음이 오늘의 평화를 가능케 했다. 김낙중, 황태성, 문익환(1989년,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임수경, 이름 없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삶을 내 던졌을 무수한 사람들... 이들의 걸음을 디딤돌 삼아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걸음을 힘 있게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걸음은 우리의 몫이다. 내 안에, 우리 안에 평화의 기운이 자리 잡을 때 평화통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이 되지 않으면 통일은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열심히 평화를 위한 삶을 꾸려가야겠다.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기쁜 평화의 노래를 부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