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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로마인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보통상태, Publius Cornelius
진짜 중요 연표
85년경 하부 게르마니아 와 상부 게르마니아 속주가 설치됨.
150년경 고트족이 스칸디 섬에서, 구토니족이 비수아 강 동쪽에서 확인됨. 그 후 우크라이나로 이동.
208/230년 고트족이 흑해 연안으로 이주.
238년 고트족이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에 침입함.
251년 고트족이 아브리투스 부근에서 로마군에세 승리를 거둠. 데시우스 황제 사망.
286년 갈리아의 북해 연안에 출몰하는 색슨족 해적들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됨.
290/291년 고트족이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최종적으로 분리됨.
380년 그라티아누스가 훈족, 동그트족, 알라니족 집단들을 포이데라티(동맹부족)로 판노니아에 정착시킴.
382년 서고트족이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동맹계약을 체결하고 트라키아 북부에 정착함.
429년 픽트족과 색슨족이 브리타니아에 침입함.
442년 색슨족이 브리타니아를 거세게 침략함.
664년 휫비 종교회의에서 앵글로색슨족이 로마 교회를 따르기로 결정을 내림.
부르군트과 바이에른를 구분할줄 아세요? 전 처음에 헷갈렸는데..
게르만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든가, 민족이동의 과정에서 극히 다양한 민족 출신의 사람들과 집단들이 합류했기 때문에 통일된 민족 같은 것은 없었다.
게르만족은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고트족, 프랑크족, 앵글로색슨족, 반달족 등 북유럽 출신의 수많은 민족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이동을 한 것은 그 자체로 완결된 민족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들, 그 전통들이었다. 많은 민족들이 승승장구하는 부족의 이름을 취했다. 기원전 101년에 포 평원에서 치러진 겨런에서 로마인들에게 패한 '보헤미아 보이족의 족장', 보이오릭스가 유틀란드 반도에서 출발했을 때는 그 이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킴브리족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마주쳤고, 자신의 용맹성과 성공을 바탕으로 그들의 왕이 된 것이다.
1.
킴브리족의 고향은 유틀란드 반도이다.
테우토네스족 외에도 암브로니족과 티구리니족을 비롯한 몇몇 켈트 부족들이 킴브리족과 함께 고향을 등지고 이동을 나선 설 보면 당시 북유럽의 기후 조건이 나빠졌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기원전 120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덴마크에서 남쪽의 광야를 향해 이동한다.
킴브리족은 위생을 위해 이쑤시개와 면봉을 사용했다.
게르만인들은 뇌우가 닥치면 전투를 중단한다.
기원전 113년에는 노레이아 전투에서 로마의 두 개 군단을 무너뜨렸다.
기원전 109년 킴브리아족등에 대해 로마의 실라누스가 공격을 했지만 로마군은 네 개 군단의 약 2만 4천 명이 섬명 당했다.
기원전 107년 티구리니족은 로마군의 사령관이 전사한 집정관의 군대를 전멸시킨다.
기원전 105년에는 킴브리-테우토네스족 주력부대가 론 강 유역에 있던 막강한 로마의 3개 부대를 무찔렀다.
기원전 105년 10월 6일에는 집정관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부대가 아라우시오(지금의 오랑주) 부근에서 패했다.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8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
기원전 103년 다시 붙은 로마군의 대 전투에서 바바리안은 10만 명이 전사하는 대패배를 당한다. 테우토네스족은 전멸했다.킴브리족만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다.
킴브리족의 왕인 보이오릭스Boiorix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전투의 장소와 날짜를 정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101년 7월 30일 베르켈라이(베르첼리) 부근으로 정해졌다.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의 10개 군단과 10만 명 이상의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5킬로미터 제곱에 이르는 킴브리족 부대가 마주 섰다.
킴브리족은공황 상태에 빠졌다. 6만 명이 죽고(이 수치에 대한 의견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같은 수가 포로로 잡혔다. 수레를 이용한 원형 방어진을 치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300명의 여성들과 많은 전사들이 패배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킴브리족 대부분은 다시 북쪽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가 된 전사들이나 그 후예들 가운데 많은 수가 30년 뒤에 검투사로서 테우토네스족 동지들과 함께 카푸아의 검투사 학교에서 탈출한 저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섬멸당하고 30년이 지난 후 또 다른 야만인들의 무리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에 정착하려 했다. 대부분이 수에비족이고 그바밖에 마르코만이족과 스칸디나비아의 하루디족으로 이루어진 이 무리는 남자만 약 1만 5천 명을 헤아렸다. 이들을 이끈 아리오비스투스는 전사들의 우두머리로서, 인정받는 군사 전략가이자 게르만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왕 가운데 한 명이었다.
2.
당시 갈리아의 부족들은 서로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켈트족인 세콰니족은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이웃 부족인 아이두이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기원전 62년에 아리오비스투스는 아이두이족을 치고 그 대가로 라인 강의 남서쪽의 바젤 부근에 있는 그들의 영토 3분의 1일 획득했다.
카이사르는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운 게르마니아와 군사적 대결을 하면 아무 수확 없는 원정으로 말려들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는 최소한 이런 위험은 피하고 싶었다.그는『갈리아 전기』 에서 게르마니아 정벌의 무용성과 그 주민들의 전향 불가능성에 대해 숨김없이 쓰고 있다. 게르만족이 갈리아인들과는 달리 문명화될 수 없는 민족이라고 분류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라인 강이 로마 국경으로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반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경계를 도나우 강을 넘어 엘베 강까지 확장시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북쪽을 완전히 안정시키기 위해 자유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파국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로마인들은 북해는 잘알고 있었지만 동쪽으로 뻗은 해안성 방향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제부터 추진되는 원정을 오직 게르만족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로서만 이해했다는 것, 게르마니아의 완전한 정복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기 4년에 티베리웃는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시 그들을(게르만족)을 공격해야 했다. 그 후 게르마니아를 잠정적으로 로마의 속주로 선언하고 조세를 부고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게르만족에게는 금과 으으로 로마에 공납을 바치는 것이 특히 힘든 일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귀금속은 부족장들의 빠듯한 재산이었으며 그들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3.
케루스키족 왕자인 아르미니우스는 부족 봉기에 관한 소식을 꾸며 냈는데 로마 장군 바루스가 그 미끼를 물 것이라고 생각은 들어 맞게 된다.
아르미니우스는 케루스키족의 왕 세기메르Segimer의 아들이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숙부 세게스테스Segestes는 딸 투스넬다Thusnelda와 아르미니우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친로마적인 성향이었고 바루스의 측근이었다.
케루스키족의 나이든 귀족들은 도로와 교량 건축과 같은 로마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것을 우월한 문화로 받아들였다. 반면 질풍노도의 젊은이들은 대개 로마에 대해 덜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로마 군단은 조망이 가능한 넓은 지형을 벗어나면 곧바로 그들의 유일한 강점을 잃어버렸다.
1987년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바루스의 로마 군단과와 아르미니우스 케루스키족이 전투를 벌인 토이토부르거 숲은 오스나브뤼크 부근의 칼크리제 산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는 보았다.
아르미니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의 왕인 마로보두스Maroboduus와의 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아르미니우스를 게르마니아의 해방자라고 칭송하기는 어렵다. 그에게는 케루스키족 사이에서의 주도권이 중요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르미니우스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군주의 왕권을 우려워한 "그의 친적들의 훙계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아르미니우스는 케루스키족 귀족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장이인 세게스테스와 또 다른 숙부인 인귀오메루스Inguiomerus 등 주위의 자기 씨족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개인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갖는 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정치문화에 심각하게 저촉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친척들로부터 배신을 당해 21년에 독살당했거나 칼에 찔려 죽었다.
4.
서기 15년 로마군은 다시 게르만족과 큰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로마의 부사령관 카이키나는 자신의 4개 군단을 이끌고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출정에서는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의도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마 게르마니아를 손에 넣어 국경을 엘베 강까지 확대했다면 티베리우스의 때 로마인들에게 짜증만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 땅은 귀금속도 나지 않고 이익이 되는 옥수수밭도 없어서 아무것도 제공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기껏해야 전투 인력의 형태인데.....
1세기 초에 바르바리쿰에서 로마 군대가 철수한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수십 년 동안은 게르만족과 로마인들의 관계가 불안정하고 결실이 없는 시기였다.
69년에는 바타비족의 봉기로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에서 군대를 불러와야 할 정도로 위험한 규모였다.
바타비족의 진압 이후 게르만 전선에는 다시 안정이 찾아 왔다. 83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로마군이 두 차례의 대원정을 통해 마인츠에서 국경 돌파를 시도했고, 이는 바르바리쿰과 문명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다시 한 번 변화시켰다.
하부 게르마니아의 로마 군대 대부분은 크산텐 부근의 숙영지에 머물렀다.
게르마니아에 주둔한 로마 군은 곡식과 과일, 채소, 육류는 현지의 농민들에게서 공급받았지만 올리브유나 생선 같은 소스 같은 고급품들은 먼 남쪽에게서 가져와야 했다. 지역의 생산물들 대부분은 세금으로 부대에 직접 들어갔다.
문명이 덜 발달된 라인 강 동쪽 지역 출신의 게르만인들은 4륜 우마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요새 외부에는 '비키vici'라고 불리는, 마을과 유사한 자그마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파견부대를 지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도시의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서도 커다란 주거지들이 만들어졌다.
점령되지 않은 게르마니아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동전이 가장 인기 있는 교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값싼 상품들만 구입하는데에는 금화보다 은화가 더 편리했다.이는 국경 쪽의 부족들이 서기 1세기에 이미 시장경제 활동을 했으며 로마인들과 활발하고 우호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의 내륙에서는 물물교환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화는 주로 녹여서 장신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정은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 침입자들의 힘을 영구히 약화시켜버려서 본격적인 민족이동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민족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타키투스가 서기 98년 쓴『게르마니아』는 언뜻 보면 북쪽 야만인들의 고향에 대한 혹평 같아 보이지만, 그의 의도는 조롱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짤막한 저서에서 영웅적 기백과 소박함 같은 게르만족의 미덕을 칭찬함으로써 퇴폐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유약해진 로마인들에게 도덕을 설파하고자 한 것이다.
『게르마니아』등 타키투스의 작품은 작가의 교육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공화정 시대의 미덕을 신봉한 타키투스는 제정시대가 로마 사회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야만족들의 모습을 통해 "좋은 법률보다 좋은 풍습이 더 큰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물론 바바리안 이라는 말에는 교양이 없고 거칠며 잔인하다는 관념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5세기 이후 그리스인들에게 '켈토이Keltoi'라 고 알려진 켈트족. 켈트족의 우두머리 브렌누스
피테아스는 툴레 '섬' 까지 항해했다고 추저된다. 실제로는 아이슬란드까지 간 것이 아니라 노르웨이 북쪽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알라니족은 게르만족이 아니다.
롬바르드의 알보인
3세기 중반에 이미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을 비롯한 게르만족 무리가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사이의 로마 국경 방어선을 침입하여 로마제국의 영토에서 약탈을 하거나 이주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마르코만니족과 롬바르드족, 그리고 반달족으로 이루어진 게르만족 연합군이 도나우 강을 건너 아드리아 해까지 밀고 들어갔던 것이다.
결코 게르만 민족들이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시민권을 얻으 게르만인들 대부분은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로마보다도 자기 민족에 대해 더 반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원전 80년 그리스의 철학자 아파메아의 포세이도니오스가 이들을 처음으로 '게르만족'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이들을 매우 원시적인 켈트족이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70년경에 아린 강 동쪽에 있던 민족들이 서쪽으로 이동해서 갈리아 지방으로 왔을 때, 센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있던 켈트 혈통의 북갈리아 부족인 벨가이족이 이들과 접촉하면서 '게르만' 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에비족의 지휘를 받던 이 무리는 아리오비스투스 왕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의 침입이 성공하여 게르만이라는 명칭도갈리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갈리아 부족들의 청에 따라 아리오비스투스의 군대를 다시 라인 강 너머로 몰아낸 카이사르는 그때부터 갈리아인들이 붙인 그 명칭을 라인 강 동쪽의 모든 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현 지명들인 슈바벤은 수에비족과 헤센은 카티족과 관련 있다.
다수의 고대 게르만 부족들이 소수의, 그러나 막강한 서너 개의 동맹으로 아주 서서히 바뀌어갔다.
동게르만족: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북해 게르만족:프리시족, 앵글족, 색슨족
그리고 나머지 엘베 강과 라인 강, 도나우 강 게르만족:프랑크족, 튀링겐족,알레마니족,바이에른족, 카티족,롬바르드족
알라니족은 게르만족이 아니다.
이 큰 집단들을 같은 언어를 썼을 것이다.
현대 독일어는 서쪽의 방언들에서 발생했다. 고트어는 초기 게르만어 가운데서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언어이다.
참고로 라틴어의 기록을 입증하는 자료는 기원전 300년에 나왔다.고트어는 4세기에 처음 으로 등장했으며, 고대 영어와 고고 독일어는 7세기와 8세기에 처음으로 그 증거가 나타난다.
매장묘가 두드러기게 나타나기 시작 한것은 4세기 부터이며, 그 전까지 게르만족은 대게 화장을 했다.
눈에 띄는 수염은 롬바르드족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바로 롬바르드라는 명칭이 '긴 수염'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머리카락을 꽈서 옆으로 오린 형태를 가리켜 '수에비식 묶어 올린 머리'는 게르만족에게 광범위하게 통용되던 머리모양으로, 수에비족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후 다른 많은 부족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 머리모양을 한 것은 순전히 미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위풍당당하게 보이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부 게르만족 두개골은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훈족에게서 도입된 풍습이다. 훈족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헝겊으로 동여매서 길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고트족과 부르군트족이 이른바 이 '훈족 패션'을 받아들였는데, 아마 특별한 사회계급의 표시였던 것 같다.
게르만족은 청동기 시대에 이미 바늘과 베틀을 사용했으며, 염색한 옷감이나 심지어 반짝이는 옷감도 사용했다.
게르만족은 몸을 가꾸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큰 가치를 두었다. 그들이 위생과 관련해서 세계적으로 기여한 두 가지 성과가 있으니, 비누와 머리빗이 것이다. 비누는 양모 기름이나 해조류로 만들었으며, 머리빗을 돼지털로 만들었다. 킴브리족은 허리에 가위와 칼, 핀셋이 든 화장도구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게르만족의 부락이 실제로 규모가 적어서 인구가 기껏해야 수백 명이었음을 알수 있다. 게르만족의 집 구조는 3열로 이루어진 긴 형태로, 그 안에 20명 까지 살수 있다.
맥주를 제조할 때 홉hop을 사용한 것은 중세 수도원이 처음이었다.
게르만족은 비옥한 새 땅을 찾아 번번이 이동을 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짐승은 고기와 우유를 제공하고 일을 돕는 소였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남유럽보다 크기가 작았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은 가축을 번식시킬 때 다른 종은 교배시키기 않았기 때문에 소와 말의 키가 1~1.5m 정도 였다.
가장 중요한 수공업자는 대장장이였고 그 다음은 도공과 목수였다.
게르만족은 로마 여성들의 가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긴 금발을 내놓았다.
게르마니아에서 출토된 포도주용 암포라(Amphora,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양 손자이가 달린 단지-옮긴이)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게르만족의 가족 개념은 여성도 존경을 받았다.
2세기 부터는 '룬'이라는 기호를 바탕으로 하 일종의 의사체계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개연성 있는 가설은 이탈리아 북부의 에트루리아의 알파벳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루나runa'란 말은 그리스어로 비밀을 뜻하는 'mysterion'을 고트어로 옮긴 것이다.
고트어로 thein은 아버지를 말한다.
왕권은 그 다지 강하지 못했다. 왕은 작은 지역을 다스릴 뿐이었고, 진정한 군주제는 한참 뒤에 로마와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등장한다. 서력 기원으로 너어가는 시기에 이런 원시적인 소왕小王들이 많이 사라졌다.
서력기원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무기 부장품들이 엄청 나게 늘어났는데, 이것은 일종의 봉헌물이었다. 전사들이 죽으면 그들이 쓰던 칼이나 창, 방패 등을 함께 묻음으로써 경의를 표한 것이다.
게르만족의 주무기는 '프라메Frame'라고 부르는 창이었다. 그것은 나무 막대기 끝에 양쪽으로 날을 세운 뾰족한 쇠를 박은 2m 길이의 긴 창이다.
큰 칼과 긴 창이 드문 것은 철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 대이동기 이후에야 비로소 고트족 기수들이 사슬로 된 셔츠와 비늘 갑옷을 입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전투부대는 100명 단위로 편성되었다. 공격할 때는 쐐기 모양으올 공격을 했는데, 이때 씨족끼리 모여서 움직였다.
적어도 처음 2세기 동안은 게르만족 왕의 거주지들과 로마의 도시들이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도나우 강 유역의 속주인 라이티아왕의 국경은 라인 강변과는 달리 매우 평화로웠다.
라인강과 도나우 강 사이의 세워진 라메스 장벽의 요새 간격은 10~2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약 60개의 요새시설에는 보병과 기병이 20~100명 정도가 머물렀는데, 그들은 제국 전 지역에서 온 보조군(지원부대)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심지어 게르만족들도 투입되었다. 서기 150년경 까지도 스트라스부르와레겐스부르크 사이에는 로마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다.
알레마니족은 233년에 요새와 잘부르크 , 마인츠, 바덴 바덴 같은 주거지들을 파괴한 것으로 추정되며, 260년에는 로마 군단이 더 이상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동에 나선 민족과 부족들은(고트, 반달, 프랑크, 알레미나, 군트, 색슨) 동질적인 큰 단위가 아니라 구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집단과 개인들에게 열려 있는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트족 지도자들 가운데 반딜(반달인) 떠는 불가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크족은 256년에 리메스 장벽을 넘어와서 갈리아로 침입했다. 257년에 있었던 최초의 대규모 공격에서 프랑크 동맹은 에스파냐냐까지 밀고 들어갔고, 끝까지 남은 낙오병들은 아프리카가까지 갔다고 한다. 275년에는 다시 갈리아를 공격해서 하부(위쪽) 게르마니아 국경 뒤쪽의 요새들을 파괴했다. 294년에는 갈리아에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에게 패하여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마 이 시점에 이미 이 새로운 정착민들을 이용해 뒤이어 들어오는 프랑크족에 맞서 국경을 방어하려는 구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게르만족 동맹들을 통합하는 이 정책은 뫼즈 강과 스헬데 강 사이에 잘리족을 정착시키는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150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된 색슨족은 286년에 갈리아의 북해 연안을 약탈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다. 색슨족이란 이름은 그들이 사용하던 '작스Sachs'라는 낫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알레마니족 뒤쪽에는 그들의 가장 지독한 적인 부르군트족이 있었다. 3세기 이래로 마인 강 상류에서 볼 수 있는 동게르만족인 부르군트족은 자신들이 로마인들의 동족이자 후에라고 자처했다.
알레마니족도 프랑크족과 비슷하게 극히 다양한 집단들의 연합체였다. 이들은 주로 수에비족 집단들로, 원래 주거지는 엘베 강 상류였다. 이들은 356년에 상파뉴에서 로마군을 격파했지만, 366년에는 샬롱쉬르마른 부근에서 패했다. 이 전투에서 알레마니족 6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숫자는 쉽게 믿을 것이 못 된다. 로마의 문헌은 야만족 군대를 보통 3천 명으로 추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숫자가 3천 명이나 그 배수일 경우 특히 신중해야 한다. 어쨌든 알레마니족의 와의 아들 란도는 368년 부활절 밤중에 마인츠를 습격해서 로마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러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네카어 강 유역으로 전력을 동원해서 알레마니족 마을과 밭을 불태워버리고 알레마니족을 섬멸했다.
트리어는 연면적이 거의 3천킬로미터 제곱에 달하는(성벽 안쪽에는 경작지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가장 번창했을 때는 인구가 10만 명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년경부터 기독교 교구가 있었다. 395년에 황제의 거주지가 트리어에서 밀라노로 옮기게 되면서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크족은 410년에서 435년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트리어를 습격했으며, 455년에는 트리어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렸다.
쾰른에는 하부(위쪽) 게르마니아 전력을 지휘하는 로마의 최고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50년에는 그곳에서 태어난 황후 아그리피나의 소망에 따라 '콜로니아Colonia'라는 지위-'식민지'는 로마 도시로서의 권리를 완전하게 누렸으며, 주민들은 로마 시민이 되었다-를 얻게 되었다.쾰른의 유리 제품과 도자기는 로마 세계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품목이었으며, 교통이 편리한 입지조건은 특히 상품 수출에 적합했다.
355년 11월 프랑크족 부대들이 갈리아에 침입해서 두 달 동안 쾰른을 포위했고, 결국 도시를 점령해서는 방화하고 약탈했다.
456년 로마의 야전 사령관 아이기디우스는 쾰른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했으나 수적으로 우월한 프랑크족에게 패한 뒤 도망쳤다.
기원전 38년에 이미 로마인들은 켈트족 거주지 부근에 야영지(켈트족의 신인 모곤의 이름을 딴) 모곤티아쿰(훗날의 마인츠)을 건설했고, 이곳은 서기 20년경에 상부(아래쪽) 게르마니아의 본연병장이자 총사령관의 거주지가 되었다. 미지의 땅 게르마니아로 장기간에 걸친 원정을 떠날 때 마인츠는 큰산텐에 있던 로마군 주둔지와 더물어 작전기지의 역할을 했다.
마인츠는 이미 3세기부터 알레마니족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368년에는 알레마니족의 왕 란도가 마인츠에 침입했고, 406년에는 알라니족과 수에비족, 반달족, 부르군트족이 라인 강을 점령해서 마인츠를 초토화시켰다. 이일은 로마 제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451년에는 훈족이 마인츠에 침입하여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후 라인 강 유역의 로마 속주들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456년부터는 마인츠와 그 일대도 프랑크족의지배권에 들어갔다. 법적으로 볼때 식민지가 아니고 거의 본토나 다름없던 마인츠는 로마의 도시로서의 중요성에서 트리어나 퀼른과 견줄 수 없었다.
타키투스의『게르마니아』는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후대에 작가들에 의해 이 책이 인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약간 있을 뿐이다. 1450년에 처음으로 유일한 필사본이 등장했는데, 이는 헤르스펠트 수도원에서 로마로 전해져 그곳에서 필사된 것이다.약 20년 후에 최초의 인쇄본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의 인문주의자 콘라두스 켈티스는 1497년에『게르마니아』를 자신의 강의에 채택했고, 1500년에 그것을 책으로 펴냈다. 그 이후부터 독일에서 타키투스가 수용되는 과정은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마침내 모든 것을 두루 환하게 비추는 고대에 대한 독일적 대답을 찬아낸 독일의 인문주의자들은 이 책에 열광했다. 이제 독일인들은 동등한 자격을 가진 고유의 고대를 가지게 되었고, 압도적인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해방되었다.
게르만 기질은 아무 거리낌 없이 독일 역사와 동일시되었으며, '독일인'이라는 주장이나 '독일 민족'의 실제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졌다.
울리히 폰 후텐은 최초로 이 젊은 영웅(아르미니우스)을 독일 문학에 등장시켰다.(1592년에 출간된「아르미니우스의 대화록」)
마르틴 루터는 이 젊은 영웅이 자신의 문제에 얼마나 유용하게 이용될수 있는지 재빨리 알아챘다. 그는 즉각 그 이름을 헤르만Hermann이라는 독일식으로 바꿨다. 이는 '군대Heer'의 지도자라는 의미의 '헤르만Heer-mann'에서 나온 것이다.
히틀러는 아르미니우스와 게르만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히틀러는 게르만족이 세계사 속에서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평가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이탈리아 파트너인 무솔리니 보다 열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인츠는 742년에 대주교의 교구가 만들어짐으로써 독일에서의 기독교의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독일인의 사도'라고 불리는 베네딕트 교단의 앵글로색슨족의 수도사인 보니파키우스가 마인츠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마인츠는 742년에 대주교의 교구가 만들어짐으로써 독일에서의 기독교의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독일인의 사도'라고 불리는 베네딕트 교단의 앵글로색슨족의 수도사인 보니파키우스가 마인츠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마인츠는 742년에 대주교의 교구가 만들어짐으로써 독일에서의 기독교의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독일인의 사도'라고 불리는 베네딕트 교단의 앵글로색슨족의 수도사인 보니파키우스가 마인츠의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독일은 독일어로는 (게르마니아 등 게르만족이 들어가는) 아니고 도이칠란드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독일에 대한 반감으로 자신의 역사를 샤를마뉴 황제 이후의 프랑크 왕국에서부터 다루는 경향이 있다.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 독일의 유명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