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서전(?) 같은 것을 써 놓은 것에서 군대 생활 일부분을 발췌하여 이곳에 수록합니다.
바로 군생활 3년 중 2년 10개월을 백골사단 한정일(육사 7기)대령을 수행병으로 모시고 있었기에
백골사단하면 눈이 번쩍 합니다.
홍경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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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15일 수색 입영장소에 2,800명이 한꺼번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배출 될 때 어찌나 백(돌봐주는 실력자)들이 좋은지 내 경우 육본 정보부장(소장)이 밀었는도
대전 통신학교된 것을 3월 초에 훈련소 분류계에서 하사로 제대한
대학동기생 김용채가 훈련소로
직접 내려 와 서울 보광동에 있는 통신보안대로 발령을 나게 해주웠다.
같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친구는 같은 내무반에 있던 지질학과의 이병무, 같은 중대에
정치과의 정순주, 하나 아래 고흥길등이 있었다. 참 고생들 많이 했다.
일단 보안부대에 신고하기 전에 집에서 이틀간 쉴 여가 있어 아무 연락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으로 들어서니 군복 입은 내 모습에 모두 놀란다. 일단 옷부터 벗었는데 내의에 어찌나 이가 많은지
식모아이가 다래에 물을 받아 놓고 한마리씩 잡아서 물에 넣으며 날 쳐보고 웃는데 챙피했다.
부대 위병소에서 신고하는데 위병 병장이 중동중학 동기생 아닌가?
약색으로 신고하라며 "너 문리대 나왔지? 그럼 김성기라구 너하고 동기? 여기 ROTC 소위로 있다."
잠시 후 날 데리고 정보과로 가서 김소위를 인사 시킨다. 여긴 군대 아닌가?
二兵인 난 경례를 부친다. "나 잘 모르겠는데." 사실 나도 그 녀석 모른다. 특히 이과인 수학과 아닌가?
"외교과면 김명현과 같은 과네." 같은 ROTC친구 이름을 댄다. "물론 잘 알지요."
그 친구는 계속 반말이고 난 존대로 말하고... 이 부대는 서울에 있기에 부대원 모두가 대학생이거나
출신들이기에 기강을 잡을 생각인지 김소위 계급으로 부대원을 억압한 관계로 악질로 통한다.
하루는 매주 수요일 저녁 교인인 부대원이 단체로 교회로 예배를 나가는데 자기가 주번사령이니
나 보고 교회를 가란다. 난 교인이 아니고 명령도 아닌지라 그냥 부대에 남아 있는데 잠시 후
내무반에서 단체 기합으로 원산폭격을 시킨다. 머리를 침상에 박고 두 손은 뒷짐을 지고 받는 기합은
오래 버티면 피가 아래로 몰리고 참기가 힘들기에 5분 정도 지나면 여기 저기서 넘어진다.
김소위가 그래도 날 봐 줄려고 교회를 핑개로 밖으로 내 보낼려고 한 의도는 알겠는데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벗틴 몇명 중에 하나였다.
이런 기합은 참겠는데 평상시 내무반에 앉아 있을 때 동료? 나 보다 계급이 조금 높은 일병, 상병녀석들이
어느 경우는 나이도 어린데 지나가면서 발로 내 궁뎅이를 툭 차면서 "한 놈은 이병, 한 놈은 소위
그래서 기합받고 참 보기 좋구나." 자기들도 당하면서 그 분풀이를 나에게 한다.
훈련소에서 이 부대로 6명이 배치 되어 보안부대라 암호해독등을 교육을 받으면서 간혹 가까운 육본에
자잘구래한 작업을 위해서 차출되어 소각장 청소, 참모총장 사무실 주위 청소를 하는데 계단 놋쇠를
닦고 있는데 어느 상병이 날 알아 본다. 정치과 친구 조경일이다. 참모총장 실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기에
정복도 깨끗하고 멋진 군인데 난 남루한 복장에 청소하는 말단 이병이라 좀 꿀리는 기분이었다.
이 부대를 떠나자! 길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7월 초순경. 9월에 국방대학원이 시작된다.
입교생들 명단을 당시 의무감 부관으로 있던 외교과 동기 홍순길소위에게 부탁하여 명단을 입수했다.
그 중에 군수참모부장 김국주소장이 있기에 육본 잡일 나갔을 때 잠시 자리을 이탈하고 말단 이병이
별 두개 소장을 면담 신청을 하니 비서실장 대령이 어이가 없다는 식을 쳐다본다. 용건은 장군님
대학원 가실 때 수행병으로 데려가 주셨으면 한다니 학별과 부모님이 무엇하는지를 묻는다.
잠시 후 하늘과 같은 육군소장과 졸병 중에 졸병 이등병이 면담을 했다.
좋게 보신 것 같았다.
"가 있어 연락 줄깨."
2-3주를 기다려도 온다던 연락이 없다. 입교는 9월인데, 몸이 달았다.
이런 중에 외교과 일 년 후배 趙洋이 이병 달고 이 부대로 왔다. 난 그 때 一兵으로 승진한 상태.
이 친구를 보호해주자. 같은 학교 출신 소위한데 수모 당하지 않게 무슨 수가 없을까?
군수과에 고교친구 송경희 형 송태희(경기고, 외대졸)형이 상병으로 있는데 수단이 좋고 인기가 있는 분이다.
"형 내 후밴데, 어쩌구 저쩌구..." 兄이 인사과 상사에게 부탁하여 취사실로 발령을 냈다.
국교 출신 상병 밑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대원들 식사를 책임 지는 일이기에 내무반 생활을 안하고
취사 일 이외에 모든 부대 일은 안한다.
명문 서울고, 서울대 외교과 출신이 밥짓는 일을 한다? 하지만 마음씨 좋은 조금 모자란 상병과 지내면 끝.
일병인 주제에 후배를 편한 곳으로 보내 주워 선배값을 단단히 한 기분이었다.
나의 대학 스승이신 이기원 조교수님이 국방대학원에 출강하시기에 주말에 정종 한병 들고 찾아 뵙고
혹시 국방대학원에 입교하실 분 중에 수행병을 필요로 하시는 분 있으면 절 소개 시켜 주십사
부탁 드리고 부대명, 이름을 남기고 왔다.
그로 부터 2주 후 오전 10시경인가 운영과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입구가 어두워지던니 뒷 책상에 앉아 있던
대위 두 명이 벌떡 일어 나면서 경례를 한다.
건장한 체격의 군인이 입구를 막아 어둡고 역광이라 알아 볼 수는 없지만 고급장교인 것은 틀림 없어 보이는데
"여기 홍경삼이 누구야?"
"네 접니다."
"이리 나와!"
밖으로 나오니 나의 어깨를 한손으로 다정하게 얻고는 "나 3사단 18연대장 한정일 대령이다."
그 유명한 백골사단을 더 유명하게 만든 18연대장인 것이다.
"부대장 김중령하고 옛날 같이 근무해서 잘 알기에 이미 다 말해두웠으니 빨리 관물 챙기고 나가자."
두달간 어찌 되었던 정든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이 부대를 떠났다.
곧 찾아 간곳은 육본 인사본부. 그곳 상사는 6.25이전 부터 육군 인사를 담당한 고참이다.
역시 한대령 옛부하이다. "홍일병 지금 국방부 소속 국방대학원 수행병으로 발려내줘."
내 군번과 이름을 확인하고 서류를 보더니 "어~ 김국주소장님 메모가 와 있는데요. 그 분이 쓰겠다고."
"그래 발령이 난 것이 아니잖아. 내 밑으로 빨리 전속시켜!."
면전이라 옛 상관 부탁을 거절 못한다.
아마 후에 김국주소장님에게 야단 맞지나 안았는지 모르겠다.
한정일대령(육사 7기)
국방대학원은 대령 이상 중장까지, 정부부서 국장 이상이 일년간 대학원과정을 교육 받는 곳이고
군인 경우 수행병 한 명을 두고 시중을 들게 한다. 시중이란 공부하는데 자료등을 정리하고
졸업논문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활을 하고 자기 집에서 기거하면서 이주에 한번 부대에 들어가
외출증과 부식비를 받는다.
二週에 한번 군복만 입고 자유인 처럼 공부 도와 주고 시간 나면 애인도 만나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수행병 25-30명 중 서울대 출신이 태반이고 문리대 출신이 10명. 61학번으로 수석입학한 박순철,
김호준, 홍성만, 이인석, 홍경삼. 이렇게 5명이 아주 가까히들 지냈고 이준일, 한 학년 아래 이부식소위는
유근창중장 부관, 고교 2년 후배 박민철군(문리대 생물과)이 있었다.
이기원, 김홍철교수님이 강의를 하시고 특히 김홍철교수님은 졸업논문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논문제목은 "월남전과 한국 경제".
논문을 쓰기 위해서 서울대 도서관을 자주 갔었는데 1967년 여름 이미 제대하고 대학원에 다니는
나에게 기합주던 김소위 그녀석을 만났다
."아이구~ 홍형 오랫만 입니다. 요즘 어디에 계세요?" 홍상병이 아니고 홍형이다.
"국방대학원에 있다. 논문 재료 볼려고 여기 자주 오지. 넌 대학원 다니냐?
"네," 이 친군 존대말로, 난 반말로 대화가 일년 전과는 정반대다.
난 오기라 할까? 반말로 이 친구 한데 당한 수모를 역공했다고나 할까?
그 후 이친구 대학교수가 되었다.
국방대학원 졸업 후 한정일대령은 춘천농대 ROTC단장으로 발령이 나고 난 다시 그 분 따라 춘천에서
남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
왠쪽부터 박재행병장(운전병), 김하사(조교.소년병 출신19세), 한정일대령(단장.육사7기),
유민식대위(교관.), 홍경삼상병(단장 수행원)
한정일대령은 어찌나 청렴하신지 집 한채도 없이 서울 변두리 암사동 조그만 전세 집에 사시고
춘천에 혼자 계시면서 단칸 방에 월세로 사시다가 그 월세도 아껴 네 자녀를 돌보는 부인에게 보내시고
학훈단 막사 사병이 거주하는 거실 옆 작은 사무실에 간이 침대를 놓고 주무셨다.
단장 포함 장교가 3명, 하사관 포함 사병이 8명이라 군부대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소위 기합이란 있을 수 없고 나 보다 나이 어린 하사는 상병인 나에게 반말도 제대로 못했다.
군대 부식을 이틀에 한번씩 배급 받기 위해 보급부대로 가면 가장 작은 부대에 맞추워 주지만 그것도
너무 많아 장교 집, 학교 원예실 직원에게도 주었고 식사를 담당할 인원이 없기에 춘천농대에서
특별 지원금을 받아 주방, 살림할 수 있는 방이 있는 막사 옆 건물을 식당으로 사용했기에 女中生이 있는
식모아줌마에게 월급을 주면서 편한 군대생활을 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식사 담당하는 일반인을 쓰며 군대생활한 졸병들 없을것이다.
하지만 추운 겨울 밤에도 하사관까지 포함하여 한시간씩 보초를 꼭 섰다.
강원도 겨울 밤은 정말 추웠다. 하루 종일 눈이 온 후 개인 고요한 한밤중에 뜬 둥근달이 빛이
소폭히 주위 소나무 가지에 덮힌 경치를 감상하면 한 시간이 금새 간 날도 있었다.
제대를 앞 두고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모든 군이 초비상이고
제대가 무기한 연기되고 발에 모래 주머니를 차고 뛰는 훈련도 많이 했다.
제대는 늦어지고 입대한 날이 1966년 3월 15일인데 제대한 날은 꼭 만3년 후인 1969년 3월15일.
아마 6.25사변 이후 징집된 사병 중 제일 오래 근무한 군번 1157XXXX일 것이다.
인원이 없기에 제대 전날 밤에도 보초를 셨다. 그 날 밤 지나 온 군대생활이 활동사진 처럼 보였다.
入隊도 일년 연기가 되더니 除隊도 6개월 연기가 되어 사회 진출이 남 보다 늦게 취직을 했다.
한정일대령은 그 후 원주 38사단 부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제대하고 3년 후인가
돌아가셨다. 아들들이 어려서 내가 아들 처럼 장지선정, 장례식에 깊이 관여하고 묘비도 쓰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생활이 궁색하시기에 찾아 뵐 때 마다 조금 도움을 드렸다.
연금으로 사시니 집세 내고 4자녀 공부 시키기가 힘드신지 사모님이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다니신다. 많은 도움을 드리고 싶었지만 한대령 성격을 알기에 부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했다.
결혼하고 아들 데리고 찾아 뵈닌 그리 좋아 하신다. 보행이 불편하시기에 배웅을 못 하시고
돌아가는 우리 뒷모습을 작은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신다. 그 분의 사랑의 눈길을 느꼈는지
집사람 몇번 못만나 뵙지만 너무 훌륭하신 분이라며 지금도 말하고 있다.
뇌물을 받치고 아양을 떨며서 얻은 사랑이 아니고 우린 서로 사랑 하는 마음씨가 생긴 후
계급을 떠나 형제 처럼 사랑하며 지냈다.
한정일대령이 내게 부탁한 것이 하나 있는데 韓氏는 오로지 淸州韓氏만 있는데 1958년? 부터
전라도 光州韓氏가 생겼으니 널리 알려 달라 했다.
6.25사변 때 너무나 많은 고아가 생겼다. 그중에서도 광주에 있는 고아원에는 고아가 너무 많아
지역 유지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당시 육군 보병학교 중대장인 한정일대위가 도움을 주었다.
장성한(14~16세) 고아을 사회로 내 보내면서 이름을 지워야하는데 어릴적 이름을 기억 못한
아이들은 姓이 없어 유지들과 상의하여 광주 고아원에서 자랐으니 한국의 韓씨라 짓고
本貫을 光州로 했기에 광주한씨가 생겼다.
전에는 한씨 끼리는 결혼을 못했는데 지금은 이 사실을 아는 한씨면 할 수 있다.
아직도 99% 청주 한씨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미서부지역 한씨 종친회에도 알려 주니 몰랐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지금도 기회 있는대로 한씨를 만나면 열심히 알려주며 한대령의부탁을 실행하고 있다.
그 분은 나의 큰형님(6살 위)과 같은 분이다. 연세는 나 보다 15 살 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