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 폭력, 특히 물리적 폭력은 야만적이고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이다. 문득 과거의 죄와 죄스러운 언행이 떠올라 홀로 얼굴이 붉어지고 마치 내 죄가 온 세상에 알려진 거 같아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가 바로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괴롭다. 부끄러움은 괴로움이고 고통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부끄러운 줄 알게 됐으니 감사한다. 지금은 뉘우치고 하느님께는 필요 없는 줄 알지만 그에 대한 보속으로 희생과 선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은 참 훌륭하다. 장갑차를 맨몸으로, 탄창을 낀 총을 든 군인들을 맨손으로 막아섰다. 그 병사들도 그에 못지않다. 불의한 명령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런 그들을 위로했다. 무기는 남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도구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보호하는 정당방위에만 사용한다. 시민들은 질서정연하게 평화적으로 외치며 시위를 벌인다. 그 외침을 듣고 그들이 뉘우치고 고백하고 부끄러워하고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악은 선을 당해낼 수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고,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은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날 성전에서 행하신 폭력은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주어져도 그것을 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그걸 증명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악에 대한 완전한 단절이다. 악을 폭력적으로 대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잘라내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더러운 영들을 단호하게 쫓아내셨던 거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 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리로 향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고 내 안에서 무조건 잘라버린다. 물리적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복수심 그리고 시기와 질투심도 그것들이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즉시 무시해 버린다. 그건 하느님이 내게 바라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셨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하셨다. 그는 하느님 말고는 기댈 데가 없는 광야에서 살았고, 인위적인 것은 먹지도 걸치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만 속해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그가 하늘나라 시민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이들은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뜻일 거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이사 45,8).” 지금 여기서 부끄러워 괴로운 것도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나에게만 은총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비가 하늘에서 온 땅에 내리는 거처럼 모든 이에게 그렇게 하신다. 그런데 모두가 부끄러운 줄 아는 게 아니다. 부끄러워한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거다.
예수님, 하늘나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폭행을 당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늘나라에 속하고 최종적으로 거기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제 이름이 등록되는 것이 저의 희망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신앙의 시련에서 보호해 주시고 복된 희망을 품고 아드님을 뵙는 날을 기다리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