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오피니언
[횡설수설/이정은]“대법관도 부패할 수 있다”… 美 대법원 첫 윤리강령
이정은 논설위원
입력 2023-11-14 23:48업데이트 2023-11-14 23:48
호화 크루즈 여행과 리조트 숙박, 26회의 개인 제트기 사용, 스포츠 경기 VIP 입장권, 골프 투어…. 클래런스 토머스 미국 대법관이 그동안 공화당 큰손 후원자 등에게서 받아온 향응 리스트는 화려하다. 그가 “친한 이들에게서 받은 ‘개인적 호의’는 신고할 의무가 없다”며 공개하지 않았던 수백만 달러어치 특혜들이다. 최근 언론의 추적 보도를 통해 뒤늦게 공개되면서 미국 사회에 깊은 실망과 충격을 안겼다.
▷단 9명만이 존재하는 미국의 연방대법관은 ‘시대의 지성이자 양심’으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다. 종신직으로, 사법부의 다른 법관들과 달리 이들을 구속하는 명문화된 규범이 없다. 철저히 자기 규율에 따라 외부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하고 정재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사적 이해관계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사건을 기피해야 하지만, 그 판단 또한 대법관 스스로 내린다. 토머스 대법관이 억만장자 클럽에 가입해 수년간 부자 친구와 지인들이 제공하는 ‘호의’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다.
▷불붙는 도덕성 논란과 비판에 직면한 미국 대법원이 처음으로 자체 윤리강령을 채택했다. 14페이지 분량으로 ‘대법관이 사건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게 만들 수 있는 외부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을 명시했다. ‘대법관 윤리 규정이 필요하다’는 설문조사 응답이 75%에 이르는 상황을 버티지 못했다. 갑부 지인의 전용기를 타고 알래스카로 고급 낚시여행을 다녀온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내가 안 탔으면 어차피 비어 있었을 자리”라는 식으로 반박한 것은 악화한 여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근엄한 법복 속 대법관도 결국 사람이다. 권력과 부의 달콤함에 맛 들이면 부패와 타락의 함정에 빠지지 말란 법 없다. 불법은 아니지만 오해를 사거나 부적절한 결정을 내릴 위험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토머스 대법관의 경우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게 없다”고 주장하지만,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불복 관련 심리에서 9명 중 유일하게 트럼프에게 유리한 의견을 내놓은 게 바로 그였다. 갑부 친구들이 여는 클럽 행사 장소로 대법원을 내줘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사상 첫 대법관 윤리강령이라는 고육지책에도 법률 전문가들은 “반쪽짜리”라는 혹평을 내놓고 있다. 실제 이행을 강제할 메커니즘도, 대법관 활동을 모니터링할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초고령화하는 일부 대법관들의 업무 역량이 떨어지는 문제와 맞물려 ‘종신직을 폐기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보수 대법관이 잇따라 임명되면서 판결이 너무 한쪽으로 쏠린다는 우려가 반영된 흐름이기도 하다. 정의와 공정의 최후 보루가 돼야 할 대법원이 스스로 신뢰를 지켜내지 못하면 결국 외부에서 철퇴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