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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용인혼이다!
처인성은 용인에 있는 '작은 성'이 아니다.
김윤후는 지나간 역사 속의 희미한 이름의 인물이 아니다.
처인성과 김윤후는 이나라의 지부심이며. 한국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김윤후 장군은 '용인'이란 이름을 태동시킨 '지역 승격'과 민초의 신분 해방 역할도 한 빛나는 별이다.
그를 기리는 것은, 용인혼을 되새기는 것이다.
또 용인이란 지역이 목숨을 건 투혼의 결실이라는, 뜨거운 교훈을 얻게 된다.
이번 호 (용인소식)은 사투가 벌어진 처인성에서 발신한다.
용인특례시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에서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역사를 후세대가 기억할 수 있도록
처인구 남사읍 일부 도로에 명예도로명을 부여하기로 했다.
지난 6월17일 불교 관계자(용인불교사암연합회, 용인불교신도회)와의 간담회에서 '김윤후승장로'와
'처인부곡민길' 명예도로명을 부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검토한 끝에 추진키로 한 것이다.
명예도로명은 법정주소로 활용되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리는 차원에서 정한다.
오는 10월까지 시민의견을 반영해, 용인시주소정보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처인성 유적지 부근 김윤후승장로(13km)와
부곡민길(1.1km)을 용인의 첫 명예도로명으로 확정할 방침이다.
작은 처인성에서 쏜 화살, 몽골장수 살리타이를 맞췄다
저기다! 저 잘를 쏴라! 김윤후의 긴급 명령
말발굽 닿는 곳마다 점령한 몽골제국의 충격패
1232년 12월 16일 고려국.
둘레 400m의 자그마한 분지 형태의 토성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몽골의 장군 살리타이가 말에서 떨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곳은 처인성(현재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아곡리 산 43번지 위치)이었다.
고려군이 몽공 핵심 장수를 죽인 이 사건은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변이었는지를 알려면 이 침략국가의 당시 기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세계를 평정한 제국이다.
9년 뒤인 1241년 독일과 폴란드의 20만 연합군을 궤멸시킨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1207~1255)는 서유럽을 접수하고 있었다.
위로는 키예프공화국, 아래로는 바빌론,호르무즈를 장악하고 인도, 베트남을 차지하거나 압박했던 몽골제국은 그야말로
'말발굽이 닿은 만큼 영토를 꿰찬' 공포의 침략자.
이런 몽골군이었다.
그런데 고려 처인성에서 살리타이 장군을 잃은 이 무적군대는 당황하여 철군을 한다.
이 장면은 세계 전쟁사에 남을 만한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고려 왕실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차 고려침입에서 항복 받아냈던 , 공포의 살리타이
살리타이는 누구던가.
드 전해인 1231년 1차 고려침입 때 그가 지휘한 몽골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고려 서북면 병마사 박서의 저항을 뜷고 개경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고려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리타이는 내정을 감시할 72인의 총독을 두고 철수를 했다.
이후 고려에서는 무신의 난이 일어나 최우가 집권한다.
최우가 왕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의 뜻을 보이자 이를 빌미로 몽골이 다시 침입했다.
1차 전쟁을 차른 경험이 있던 살리타이는 친원파 홍복원을 통해 서경을 순식간에 함락시켰고,
두 달 만에 개경이 뚫렸다.
텅빈 개경을 살핀 살리타이는 왕이 있는 강화도로 향하지 않고 고려 영토 전체를 짓밟겠다는 듯 남하를 결단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일견 성 같지도 않아 차라리 요새처럼 보이던 처인성에서 기고만장하던 몽골 장수가 쓰러진 것이다.
살리타이의 입장에선 굳이 쳐부술 필요도 없는 성이었을지 모른다.
만만하게 보이는 처인성에서 군량 마련 노려
처인성에 오기 전에 광주성을 먼저 만났는데 살리타이는 촘촘한 성곽으로 방어태세를 갖춘 이 성을 속도전을 위해
비켜가기로 했다.
당시 용인지역에는 보개산성이 주성이었다.
봉수대를 갖춘 둘레 750m 규모의 성이었다.
몽골은 이 성도 비켜갔다.
그 뒤 만난 곳이 처인성이었다.
그간의 행군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먹을 군량이 필요했던 그는 만만해 보이는 이 성부터 털고 가기로 한 것이다.
처인성은 300여 명의 부락민들과 승려 병사 100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살리타이는 본대에서 기병 500여 명을 뽑아 처인성 동북쪽 완장리 매릉 일대에 포진시켜 포위공격을 준비했다.
적장이 이 싸움을 만만하게 보았을 수밖에 없다.
대체 처인성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여기에 김윤후라는, 생몰 연대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영웅이 등장한다.
고려 양광도 처인(현재의 용인) 출신인 스님으로 고려 대몽골 항쟁의 가장 뛰어난 별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법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승려 출신 장수가 이런 공을...
조선 후기 안정복과 정약용은 '백현원의 승려가 처인성 전투의 승리로 무반직을 받고 환속했다'면서
'김윤후라는 이름으로 대몽 전쟁의 일선에서 활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현원은 승려 김윤후가 머물러 있던 사찰의 이름인지, 마을의 이름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승려복을 벗고 무관으로 임용되었다는 사실만 확인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대몽항전에 나섰던 이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종6품의 섭랑장, 정3품의 상장군, 병마사, 추밀원부사, 에부상서에 올랐고 이후 정2품으로 수사공 우복야 직을 맡기도 했다.
이런 기록만으로 그의 면모와 행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승려였다는 점은 처인성 전투의 양상을 짐작케 하는 측면이 있다.
고려시대 처인은 '부곡' 지역으로 분류됐다.
부곡은, 전쟁포로나 역모죄의 유족을 강제주거하도록 한 곳이나 반란이 잦은 향읍을 낙인찍어 특별 관리하던 주거지역을
가리켰다.
고려시대 지방명칭에서 현이 붙은 곳은 중앙정부에서 현령이라는 지방관을 내려보내 다스리는 곳이었고 현이 아닌 곳은
자치형태로 치안이 유지되는 마을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주로 농산물을 생산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이런 차별적인 마을 구분이 있었다.
처인성 승첩의 결과로, '용인' 지명이 탄생
고려시대 처인성 승첩은 이곳 주민들에게 강요한 부당한 차별적 처우가 사라진 계기이기도 하다.
이후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주민의 신분도 정상적인 양민으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때인 1414년에 용구현과 처인현을 합쳐 '용인현'으로 거듭난다.
용인이라는 지명이 탄생하는것은 결국, 처인성의 놀라운 승전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음력 1월 그날의 전투에서 무슨 일이...
몽골 기병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처인성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작은 요새처럼 웅크린 이 토성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김윤후는 처인성 동쪽 일대에 승병 저격수를 배치했다.
이들은 전란의 시대를 대비해 상당한 기간을에 걸쳐 궁술을 익힌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토성 앞쪽 300m쯤 떨어진 위치에 작은 능선을 파고 겨울철 마른 검불로 덮어 위장한 참호에 숨었다.
김윤후 또한 이 저격 부대 속에 끼어 있었다.
김윤후는 이렇게 지시했다.
'무기나 완력으로 우리가 몽골 대군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기다리며 오직 한 사람만을 노려야 한다.
저 기병들 속에 들어 있는 적장이다.
그를 골라내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 길이 먼저 나타났다.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돌파할 곳을 수색하는수색조와 함께 정찰을 나온 것이다.
아마도 조직적인 병력이 없는 작은 성이라 경계심을 낮췄던 듯 하다.
살을 에는 음력 1월의 날씨인지라 노지에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을 복병으로 배치하는
작전은 상상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인의 저격병들은 김윤후의 삼엄한 명령에 따라 얼음같은 냉골바닥에 엎드렸다.
얼기설기 덮은 풀더미 아래서 숨을 죽이며 사정거리 내로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삼엄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자격병들의 뒤쪽에서 속삭이듯 명령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윤후였다.
그는 말 위에서 옆을 보며 뭔가를 지시하는 자를 가르켰다.
'저기가 과녁이다. 저 자를 쏴라!'
최상위급 장군의 초전 전사는 몽골사에 없었다.
몽골군은 세계를 짓밟으며 내달린 그들의 전쟁사 중에서 최상위급 장수가 초전에 전사하는 경우를 경험해 본적이 드물었다.
살리타이의 죽음은 그 패기와 용맹을 자랑하던 군대를 순간적으로 뮉려갛게 만들었다.
세계 최강 병력의 진영이 무너지고 사기가 바닥을 폈다.
김윤후의 전술은 적중했다.
(일설에는 김윤후가 직접 화살을 쏘아 살리타이의 이마에 적중했다고 하지만 그가 이후에
이 전공으로 무관 최고의 관직인 상장군에 임명되었을 때 '저는 이 전투에서 활과 화살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헛되이 이리 중한 상을 받겠습니까'라고 사양한 것으로 미뤄볼 때 그가 저격병을 뛰어난 전략으로 지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섭량장에 임명되었고 법복을 벗고 정식 군인이 된다)
사리리타이가죽은 뒤,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거대한 부대가 전의를 상실한 채 말을 돌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병과 부락민들은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골군의 뒤를 쫓으며 활을 쐈다.
이 역시 몽골 전쟁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풍경이었다.
처인성 자체는 김윤후가 당시 국난에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는 몽골의 1차 고려 침입 이후에 더욱 큰 세력을 갖춰 이 나라를 유린하러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규모는 작지만
그들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항전하고 공세를 지연시킬 수 있는 '덪'과도 같은 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이런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지역관리 제도상 '현령'이 없는 고을이기에 사실상 처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던 승려들이 비상시에 지역전투를 지휘하는 의승(승려의병)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21년 뒤 청주산성 전투서 결정적 리더십 발휘
또 김윤후는 살리타이를 쓰러뜨린 처인성 전투가 요행이 아니라 그야 말로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과 실력이었음을
이후에 보여주었다.
21년 뒤인 1253년 김윤후는 방호별감의 벼슬을 받고 충주산성에서 5차 몽골침략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예쿠가 이끄는 몽골군은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석 달간 성을 포위하고 끝도 없는 공격을 감행해왔다.
겨울을 맞은 데다 식량까지 바닥나기 시작하자 성 안의 병사들은 절망하기 시작했다.
감윤후 별감은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대들은 지금 춥고 긂주리며 아귀와 같은 적들을 상대하여 싸워왔다.
이젠 버틸 힘조차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대들이 전시가 아니라 평시에도 나라로부터 천시받았던 부락의 사람들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할 이유가 있느냐고 몰래 볼멘소리를 하는것도 안다.
별감인 내가 약속한다.
이 전투는 나라를지키는 싸움이다.
여기서 힘을 다하여 싸우면 그들도 지금까지 받았던 천시와 홀대를 벗게 된 것이다.
전쟁에 이기면 반드시 그대들은 귀천없이 관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약속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관노의 명부를 불사르고 관에서 빼앗았던 가축들을 나눠주었다.
김별감의 이런 호소에 병사들은 감읍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전투에 다시 임했고, 몽골군은 이런 악착같은 저항에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청주성에서 뒷걸음치면서 고려에서도 떠나갔다.
김윤후가 실절적으로 용기와 지략을 갖춘 뛰어난 장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리더십-솔선수범-화합-겸양-충혼 '김윤후 5대 정신'은 용인혼
용인소기 취재팀이 답사한 처인성
용인소식 취재팀은 처인구 남사읍의 처인성과 역사교육관을 찾았다.
처인성은 1977년 경기도 기념물 44호로 지정되면서 성곽이 복원됐다.
둘레가 700보가 되지 않는 야트막한 토성이다.
성 내부는 흙으로 돋워져 언덕위에 도토리나무와 잡목들이 늘어서 있다.
205m가량의 성곽 둘레(1980년 시공)를 따라 사다리꼴 형태로 425m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길을 따라 역사의 장면들을그려놓고 설명한 석각 조형물이 바닥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풀밭이 잘 가꿔져 있고 솟아오른 분지에는 거목들이 숲을 이뤄서 조형물처럼 '위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 했다.
고려시대에 이곳에 군수 창고가 있었으며 둘레는 1km 남짓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 축성 시기는 통일신라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절반 이상 축소된 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북쪽 사장터가 살리타이 사살 현장
처인성 북쪽의 평지(들판)는 사장터라고 불린다.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아 쓰러진 곳이라는 의미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떄 왜군이 한때 이곳에 주둔해 있었다.
수원 독산성에 집결한 관군이 이들을 무찔러 탈환한 승전지로도 알려져 있다.
처인성에는 치열한 전쟁의 역사가 겹처져 아로새겨져 있는 셈이다.
처인성역사교육관은 처인성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2층 한옥건물로 세워져 있다.
2022년 4월에 개관한 이곳은 용인의 역사는 쉽고 생생하게 접하게 하는 산교육의 명소가 되었다.
영상이미지로 소개하는 처인성 전투 이야기도 실감을 높이고 그 용맹한 전투를 와이드하게 그린 그림도 눈에 띄었다.
마침 어린이들이 교육프로그램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영상을 바라보며 놀라는 표정들 앞에서 인솔 교사가 그날의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누가 김윤후 장군인지 혹은 살리타이인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학생도 보였다.
당시 세계최강의 침략군을 물리친 용기와 지략의 스토리가 이 도시에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눈에는 뚜렷한
감명으로 새겨지지 않을까 싶다.
문화재정 기념행사에 김윤후 승장 선정
2024년 2월 문화재정은 국가 지원사업 호국선열 기념행사에 제33회 처인성문화제 '처인성에서 다시 만나는 김윤후 승장'을
선정한 바 있다.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 살리타이 장군을 활로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고,
1253년 충주산성 전투에서 방호별감의 직책으로 70여 일의 대몽골 항전을 승리로 이끈 그의 공로를 기리는 문화 축제다.
2019년 12월16일 호국선봉사에서는 김윤후 승장의 진영(초상화)을 봉인하는점안식을 거행했다.
이 사찰에서는 김윤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개월간 조성불사를 진행해 처인성 승전일인 12월 16일에 점안 의례를 행한 것이다.
이 초상화는 양선희 동국대 외래교수가 전통기법으로 재현했다.
그림 속에는 김윤후 장군은 승복을 입고 왼손에는 단주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활을 잡은 채 앉아있다.
김윤후 장군은 명실상부한 용인혼이며 참된 애국과 용기있는 충혼이 무엇인지를 깊이 새긴 이 지역의 '정신가치'라고할 수 있다.
처인성은 용인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용인의 김윤후 장군은 국가 가치관과 국난 리더십 그리고 민초를 결집시켜 위기를 타개한 대동의 힘을 보여준 '충혼의 전형'으로 높이 세울 만 하다.
조선에 임진왜란의 큰 영웅 이순신이 있었다면 고려엔 몽골을 패퇴시킨 처인성승첩 김윤후가 있다.
김윤후 장군의 5대 정신은, 용인의 힘
제대로 기려야 할 '김윤후 정신'을 꼽는다면, 5가지로 니눠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당대 최고의 난적 잎에서 보여준 냉철한 리더십이다.
그는 승승장구하며 내달려온 적들의 방심과 부주의를 겨냥해 현실성 있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결사항쟁을 종용하며 병사들을 앞으로 내몰지 않았고 대신 그들에게 적군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적장을 골라내
그를 타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저들이 안전한 곳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저격병들을 배치한 뒤 살리타이를 지목하고 타이밍을 노려
시위를 당기도록 지휘했다.
그간 막강한 병력을 무기로 삼아 진군해온 그들에게 작은 성에서 벌어진 낯선 전투는 몽골군들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 냉철한 전략적 승리가 관직도 없던 승장 김윤후를 돋보이게 했다.
둘째는 솔선수범이었다.
병사들을 앞세워 내모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저격대에 끼어 함께 행동하며 절제절명의 순간에 지휘를 내렸다.
그는 목숨을 건 상황에서 지도자의 헌신이 무엇인지 모범을 보여준 장수다.
셋째는 그가 민초의 힘을 이끌어낸 화합의 진심이다.
당시 고려 왕국에서 차별받고 핍박받는 백성들을 부대원으로 삼아, 그들에게 나라와 겨레를지키는 일의 소중함을 설득하고,
충혼을 일깨웠다.
이 점이 가장 의미있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이 치열한 전쟁의 의미가 소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대동을 이루는 고려라는 대아를 지키는 일임을 역설했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우리가 죽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가 소멸할 수 있는 위기임에 공감한 처인성의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그곳을 사수하러 나섰다.
당시 많은 장군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단호한 결집을 이뤄낸 병영이 어디에 있었던가.
파죽지세의 몽골군 앞에서 말이다.
김윤후의 이런 의지는 21년 뒤의 충주산성 전투에서 더 뚜렷하게 발휘된다.
방호별감이 된 그는 1253년 겨울 석달간 몽골군의 연쇄 집중공격을 받는다.
전투 식량마저 고갈되는 상황에서 그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은 지역의 한 병사가 아니라 고려대군의 일인이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 그대들은 모두 면천하여 벼슬을 받게될 것임을 장수로서 약속한다.
죽기를 각오해 살아나 새로운 인생을 함께 살아가리라'
그들의 족쇄였던 관노의 명부를 그 자리에서 불태웠다.
이 뜨거운 토로에 굶주린 병사들은 다시 일어나 성을 에워쌌던 몽골군들을 처부순다.
이런 기적이 일으킨 것이 '김윤후 리더십'이다.
넷째 결코 공을 네세우지 않는 겸양의 지도자였다.
처인성의 화살 한 발이 몽골대군의 심장을 뜷었을때,이 놀라운 일이 스스로의 업적이라고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전략과 전술이 그의 판단력과 감각과 순발력에서 나왔고 긴박한 순간에 사살을 명령한 것도 그였지만
이후에 전공을 저울질하려는 관리의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나는 승려의 몸이라, 그 전투 내내 제 손엔 화살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관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치하를 사양했다.
스스로를 낮추고 병사들의 공헌을 높이는 장수였다.
다섯번째, 김윤후는 용인특례시가 품고 있는 충혼과 애국심의 '위대한 거울'이라는 점이다.
세계 최강과도 두려움 없이 일전을 벌여 천금같은 천금같은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담함은 어느 지역의 인물과 비교해도
우뜩하기 짝이 없는 기상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용인이 추구하고 있는 용인르네상스는, 어쩌면 처인성의 사투처럼 결연한 승부를 포함하고 있다.
떄로는 세계최강과 맞서 승부하기도 해야하며 대담한 전략을 그들을 뛰어넘기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라는 첨단 분야의 전투가 그렇고 그것이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사업이라는 점이 또한 그렇다.
시민 모두가 그런 목표를 마음에 지니고 도시의 획기적인 중흥을 행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김윤후 정신'이 바로 '용인혼'이다.
불가능은없으며 시민의 진심과 결의를 이길 상대는 없다는 것,.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내일을 향해 쏴라'고 그가 지금 귓전에서 명령한다.
처인성을 거닐며 우리는 역사가 말해주는 '위대한 끔'을 읽는다.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