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길 연말이라서 그런지 도로 공사하는 곳이 많다. 동네에도 한동안 쉬는 것 같던 새 길 공사가 한창이다. 그 옆 직각으로 꺾이기를 반복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어렵게 오가며 쭉 뻗은 새 길로 다니고 싶어 조바심이 생긴다. 새 길은 직선이다. 직선은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 새 길은 빠른 길이다. 빨리 가서도 그렇지만 우선 다니기 쉬워서 좋다.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된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직선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렇게 많이 대화하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연구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나는 이미 그 길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 길이고, 그 길로 가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아니 그 길로 가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삶을 시작한 거다. 직선 길이라 편한 것도 있지만 한산해서 좋다. 십자가의 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기도가 반갑지 않은데 그 중 십자가의 길 기도가 제일 그렇다. 하지만 그 기도만큼 예수님을 가깝게 느끼고 만나는 기도는 없는 거 같다. 영성체로 예수님을 내 안으로 직접 모시지만 너무나 신비롭고 영적이라 잘 느끼지 못한다. 그에 반해 십자가의 길은 살면서 누구나 다 그 길을 걸었고 또 그 길을 걷는 중이다. 게다가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러셨으니 송구함과 고마움으로 그분을 더 가깝게 느낀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간다. 자신이 짊어질 만한 십자가가 주어진다니까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면 어쩌면 그것은 내 십자가가 아닐지 모른다. 아니면 주님을 따르는 제일 첫째 조건인 자신을 버림을 아직 못해서 그런 걸지 모른다. 지나친 욕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게 자신의 십자가를 무겁게 만들 거다.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 몰라 사둔 것들이 고스란히 다 짐이 되는 거처럼 말이다. 사실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음식도 거의 같은 걸 먹고, 옷도 같은 걸 입는다. 여기서 살면서 꼭 해야 할 건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알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나도 그렇게 된다. 여기 것은 육체까지 해서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무거우면 짐을 덜어내고, 힘들면 쉬어 가면 된다. 그런데 도전 반대 비난 무관심을 이겨내는 건 쉽지 않다. 매일 그리고 계속 같은 기도를 하고, 영성체하고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게 그런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게 하는 힘이 된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은 우리 하느님을 모른다. 자신과 세상 안에 갇혀서 완전히 새로운 분, 저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알 수 없다. 그런 세상 안에서, 그런 무리 중에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나라로 가는 길까지 알게 됐음은 참으로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힘들어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면 갈만하다. 사도시대 때나 새로운 길(사도 9,2)이었지, 지금은 다 알려진 길이고 이미 많은 사람이 먼저 그 길로 갔다. 순교자 고순이 바르바라는(1798-1839)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순교 이야기만 들어도 벌벌 떨었는데, 성령께서 나 같은 죄인을 은총으로 감싸주시어 지금은 아무 두려움도 없고 오히려 기쁘기만 합니다. 죽는 것이 이다지도 쉬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놀랄 게 아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성인이 증언해 준 거다.
예수님, 넓지만 붐비는 곳보다 좁아도 한산한 길이 좋습니다. 제가 최초라면 의심도 들겠지만 이미 그 길을 간 수도회 선배와 성인들 게다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성인 교우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의심은 없습니다. 그런데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옆으로 새는 바람에 시간과 힘을 낭비하곤 합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때론 넘어진 김에 좀 더 쉬고, 샜으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길의 인도자이신 성모님이 계시니 길을 잃어도 샛길로 빠져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