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 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천년동안 예술과 장식의 절대 목적은 신에 대한 마음 이였다. 종교적인 갈망과 하늘에 닿고자 하는 바람, 고대함을 이루기 위해 뾰족한 첨탑, 뾰족한 창틀과 같은 고딕양식이 나오게 되었고 사람들은 기독교적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검소한 옷차림,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인본주의, 즉 르네상스가 유일신만을 믿도록 억압하는 기독교적 양식에 반기를 들고 난 뒤 17세기부터, 절대주의 정치체계(왕권강화)가 등장하면서 예술양식 또한 변화하게 된다.
중세의 지나친 신 중심 압박에서 벗어나 종교체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배자인 왕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낼 상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절대권력을 더더욱 과시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위엄 또한 강조하고자 사치스러운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화려하고 번쩍번쩍한 왕궁을 짓게되고 기하학적으로 잘 짜여진 정원을 배치하며 그 안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며 천장이 아주 높아 왕을 찾아 온 신하들과 사절들이 한없이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의 위엄을 확인하고 스스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게끔 만들게 되었다.
수도원은 바벤베르크 왕가가 1106년에 베네딕토회에 왕궁을 기증한 이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점을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로 개축된 것이다. 과학과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였고 9만 여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과 한눈에 화려함을 자랑하는 성당 등이 있다. 내부 천장에 화려한 그림들과 회화 조각들이 보관되어 있다.
사실상 바로크는 르네상스 후기부터 고전주의 경향에 반대하여 17세기 초 엄격한 고전의 규칙을 과감히 무시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 건축에서 추구되었던 건축의 일정한 규칙, 형식에 의해 구성되는 고전주의 양식을 거부하고 건축의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비대칭, 대칭, 과장 등의 역동적이고 3차원적인 건축기법에 의해 형태 및 공간의 극적효과를 창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단순성보다 복잡성과 풍요성을 택하고 빛의 극적인 효과까지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크시대 건축물 내부는 많은 조각과 꼬인 모양의 기둥을 만들어 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 시켰다.
오스트리아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다. 루카스 폰 히데보로에 의해 건축되었고 터키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오이겐 공의 여름 별궁이었으며 그 후 함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되었고,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중이다. 도심에 자리잡고 있어 주위가 소란하고 혼잡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궁전의 웅장함이 펼쳐지며 상궁에서 바라보는 빈 시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가 정열과 힘, 호화롭운 장식, 장엄하고 남성적인 것이 특징 이였다면 로코코 건축은 풍성하고 밝고 화사한 파스텔 색조와 금, 은색의 조화 등 화려하고 섬세하며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여성적인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의 바로크 양식은 루이14세의 죽음과 함께 종료가 되었고루이15세의 등장과 함께 바로크적 성격을 계승한 로코코양식이 파리에서 발생하였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인데도 바로크시대의 웅장함과 사치스럽게 화려함과는 달리 로코코 시대 건축물은 파스텔 색상을 섞인 화려하고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 건물은 6단의 테라스 위에 세워져 있고 테라스 아래에는 대분수(大嘴水)가 있다. 상수시란 이름은 대왕 자신이 죽거든 테라스의 프롤라 조상 밑에 묻어 주었으면 하는 뜻으로, 프랑스 말로 ‘짐이 저곳에 있다면, 걱정이 없겠노라’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로코코 시대는 개인의 사적 생활을 위주로 전개 된다. 섬세하고 우아하며 개인생활에 쾌락을 주는 개인위주의 소규모 공간창조에 열중 하였으며 실내를 곡선과 곡면을 이용하여 우아하고 화려하게 장식 하였다. 주범은 장식에 의해 자유로운 수정이 가해졌으며 모든 돌출부의 몰딩은 가늘고 약하며 조각은 엷고 평탄한 것이 특징이다.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 건축물의 형태 내부공간의 디자인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나라의 경제, 정치가 건축물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유일신만 섬기는 환경속에서 나라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개인의 삶을 위해 실용성을 강조한 건축물과 실내장식 등이 강조되면서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생활의 편리함을 강조하는 건축물과 장식들이 보편화되었다. 그때 당시는 그들의 위상을 위해 화려하고 장엄하고 사치스럽게 꾸밈으로 왕에대한 존경심을 유발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웬지모를 거리감가 안타까운이 동시에 느껴진다. 하지만 이 시대에 대해 조사하면서 건축은 사람들의 바람과 이상과 가깝고도 먼 현실에 대해 얘기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예전부터 꿈꾸고 바래왔던 희망이 지금 현재에도 건축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