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신념이 아니라 신앙 미사 후에 한 교우가 좋은 데 써달라고 수줍게 돈봉투를 내밀고는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도 한 것처럼 감사하다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휙 가버렸다. 아마 오늘이 자선 주일이라서 그랬던 거 같다. 그 돈이 피땀을 흘린 건 아니지만 하루 종일 많은 사람을 대하며 몸과 마음이 고생해서 번 것이다. 나도 그러지만, 참 이상한 건 자선이나 기부할 때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다. 그 액수가 작아서 그런 걸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단돈 만 원이라도 어려운 이웃에게는 도움이 되고 그들에게는 고마운 건데 말이다. 그 액수 때문이 아니라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하신 예수님 말씀 때문일 거다. 오직 하느님만 아시고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고 싶어서 그럴 거다.
어제는 하루 종일 긴장 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제뿐만 아니라 열흘 넘게 마음이 어수선해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역으로 지루하다고 여겼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땀흘려 일하고, 때론 말다툼하거나 남 험담하다가도 뉘우치곤 하는 그런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다. 박근혜 율리안나 자매가 파면 됐을 때 어르신 수녀님들이 그 자매가 성당에 나가지 않아서 저렇게 됐다고 말했다는 걸 들었다. 그냥 웃고 말았다. 315부정 선거와 유신시대 그리고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대에 살았던 분들이니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윤 암부로시오 형제가 같은 일을 겪게 된 걸 보니 할머니 수녀님들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그냥 웃어넘길 말만은 아닌 거 같다. 국민 대다수가 그렇게 원하는데 끝까지 싸우겠다는 그 형제는 도대체 어떤 신념을 갖고 있길래 저러는 걸까? 그 신념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그 과부의 마음은 분명 아닐 거다. 신앙이 아닌 자신의 과도한 신념이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이웃에게도 얼마나 해롭고 위험한지 똑똑히 보게 됐다.
오늘 자선 주일 담화에서 함께하고 싶은 이웃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은 이웃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잘난 체하는 교만한 사람이고 또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인데, 하느님도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로마 2,8).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의 길을, 사악한 입을 미워한다”(잠언 8,13). 반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하고, 자기 것을 기꺼이 베푸는 사람인데, 하느님도 베푸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0.46).” 우리는 모두 이웃들이 나를 좋아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베푸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선행을 감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하느님만 아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이 나에게 갚아 주신다고 믿는다(마태 6,4).’ 하느님이 나에게 고마워하시며 갚아 주신다니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우린 바로 그걸 바란다.
나는 내 신념을 버리고 더 깊고 순수한 신앙을 바란다. 하느님 한 분만이 나의 희망이다. 내 신앙의 지상 목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다(요한 15,13).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싫어할 사람도 없다.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여기가 아니라 하늘나라와 예수님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지기를 바란다. 오히려 여기서는 잊히기를 바라야 할 거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어때야 하는지 말하는 거 같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5).” 성탄절이 가까이 온 거처럼 참 좋으신 하느님을 얼굴을 맞대고 보는 날이 다가온 것으로 알고 살아야겠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 더불어 살고, 저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말씀을 듣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것이 저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제가 살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께 청하면 그 즉시 아드님께로 인도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