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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시대, 안정된 국가의 길로 나아가는 새로운 국가 발전 동력이 될 것인가?
매일 사건사고들은 연일 터지고, 사회 안정의 바로 미터라 할 수 있는 공권력의 이상기류 또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무언지는 현재 알 수 없는 변화와 사회 혼란이 보이지 않게, 혹은 시간차를 두고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마음을 무겁게 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일상의 삶의 현장과 정부 행정부의 역할에 그 괴리가 점점 혼돈의 공간이 열리는 것과 같은 공기가 사회 환경을 조성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현상이 전적으로 이를 말해준다. 이는 단순하게 우리 사회 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우리 사회가 이를 바로 직시하지 못한다는 의미, 이것은 IMF의 잔재 현상이 아닌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사회 공간이 불안해지고, 이를 부추기라도 하듯이 동시에 공권력이 이상해져 가는 나라적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는 현 정부가 국가 운용을 잘못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럴 때, 정부가 국가 운용에 있어서 그 중심이 바로 되는 환경이 더욱 강하게 형성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의 힘이 나라 통제에서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IMF 이후 줄곧 공권력이 불안전해지고, 정부 행정부 각 기반 아래 사조직 시대가 드러나고 강해지면서 중앙 정부 역할을 무색하게 하는 현상이 아닌가!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를 향한 도전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그러한 기류는 강성해지더니 지금의 검찰 반란을 수용하고, 검찰 총수가 또 하나의 대통령처럼 보호되고 중점 되는 사회적 공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을 바로 해석하여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야 하는 언론이 이상해져 버린 공간이 되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현상은 단순하게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지금으로 나아오기까지 중간 과정이 형성되었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를 만들어 온 특정한 세력들의 준동이 우리 사회 안에서 은밀하게 활동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 힘을 공격하는 비정상행보들이 가능하도록, 즉 검찰과 같은 자신들 기득권 지키기를 위한 반정부 운동이 얼마든지 가능토록 해주는 나라적 공간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법은, 우리 대한민국의 실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강력한 국가로의 길을 걷는 것은 군대의 강함의 유무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라 국력과 기반을 영구적으로 지속해 가는 것은 바로 법이 어떻게 작용되는가의 문제이다.
지금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수지 여사, 즉 미얀마 국가 상징이자 국가 고문이 군인들에 의해서 다시 가택 연금(軟禁)에 들어갔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현대의 상징은 자유이다. 인간의 인권이 강조되는 자유시대가 20세기부터 온 지구의 보편적 힘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보편주의가 온 지구 안에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다수 많은 나라들 안에 군인들이 정부와 사회를 무력으로 장악하는 일들이다. 우리 또한 군인들이 국가 권력 기반을 장악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독재로 상징화되었던 적이 있었지 않는가?
이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서부터 비롯되는 현상이다.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무와 문의 권력 투쟁은 현대 이전에서도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났던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와 사회 이면에 도사리는 또 다른 힘의 영향력이다.
군부가 일어나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나라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또 다른 힘, 즉 자국을 노리고 들어오는 힘이 자신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이용하고자 할 때, 부기영화를 던져주면서 부추기는 잘못 된 만남에서부터 시작되고, 그에 코가 엮이어 벗어나지 못하면서 불행은 자신과 나라 모두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기반을 구축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미얀마 경우는 라우스도 그렇고, 배후에 중국의 영향력이 미얀마 군부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이의 배경을 부인할 수 없고, 미얀마 군부 현실의 무력 도발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우리의 군부는 그 동안 어떤 사회로의 영향력이 작용되는 것인가?
아마도 과거부터 이와 같은 과정은, 그 기간 동안 우리 사회를 좌우 할 수 있는 인물 심기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주도하는 사회와 국가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반을 장악하여 길들이고, 목적에 필요한 국가 기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인적 자원들을 심는데도 군대의 무력이 일정하게 국가 기반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법은 이러한 차원에서 그 실재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적 일탈로부터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 사회는 강력한 군대와 동시에 강력한 법적 장치를 구현해 가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먼저 선행되어야 할 요소가 있다. 이러한 국가로의 길을 굳건하게 하고 한다면, 온 사회가 각성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정부와 대통령,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그리고 각 사회 분야, 온 국민적으로 각성 된 나라 환경, 즉 높은 차원의 시민의식이나 나라에 대한 깊은 고뇌의 열정과 전진(前進)에 대한 대 국가적인 결집의 정신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수처 출범,
요즘 우리 사회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 움직임들, 과연 나라의 근본을 지키고 지속하고자 하는 전진(前進)의 힘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의 힘이 너무 비대해지고 교만해져 법 집행은 물론 죽일 사람을 살리고, 살릴 사람을 죽이는 억울한 이들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이득을 추구하고, 주식거래와 성매매에까지 연류 되는 불법을 자행하고, 이러한 범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법이 되고, 적극적으로 이와 같은 검찰 공화국화를 위해 정부와 대립하는 구도를 그리고자 한 것이다.
재판이란 법대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는 정신이 온 사회 안에 성립되고 힘이 되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말은 공정과 정의, 법과 헌법 수호! 라고 외치고 잘 슬로건화 하는데, 실제로는 자신 사감(私感)이 개입되고 자신 조직의 기득권 수호 차원에서 왜곡(歪曲)되는 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헌법의 원리와 실정법에 근거하여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판결해야 나를 보호하고 성공 가도의 동아줄을 만들 것인가? 라는 사적인 입신이란 개인적인 욕망, 혹은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유혹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혹은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 이러한 일신을 위한 법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요즘 법원 판사들이 이러한 판결이 더욱 더 극성을 부리고 있다. 혹은 자신이 판결을 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그 배경이 되는 힘의 주체가 어느 조직인가? 이러한 배경에 따라서 검사들의 수사나 기조가 이루어지고, 법원 판사들의 판결이 결정되는 것이다. 혹은 우리 사회 어느 계층에 속한 자인가? 음성적으로 상통되는 내부 규정이나 판사, 검사 개인적인 지인관계 등의 배경에 의해서 휘둘리는 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어두운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어둡게 만들어가는 현대적 뿌리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래서 적폐의 핵심 문제이다. 그것은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 어두운 단면(斷面)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과 6.25 배경은 우리 사회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운동, 이를 양면적인 운동으로 규정하자! 이것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우리 본 사회에 대해서 역차별적으로 작용되는 경향성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주도하는 차별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 사회 전복을 위해서 우리 사회 안에 역차별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국민들, 자기 정부, 자기 민족을 향해서 차별이 작용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일본이 우리 사회 안에 어두운 지대를 형성해서는 일본의 한국사회 영향력 증진, 확대를 위해서 토종 한국인들을 차별 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동산 문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안 되게 되어 있는 현상이다.
왜, 우리 사회가 굴절되고 왜곡되는 현상이 강하게 작용 되는가? 바로 이러한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잘못 운용되기 때문이다. 자국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국민들이 가난해지고, 성공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를 바로 하지 않을 때, 나라 안에는 나라와 사회를 중심하는 국민들은 작아지고, 나라 팔아먹고 이용하는 배신의 국민들이 많아 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왜곡되는 법 판결이 버젓이 진행되는 사회적 공간이 되어 온 것이다. 억울한 국민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공장이 가동되는 역차별화 되는 사회 법적 판결 말이다.
분명히 우리 사회 공동체에 잘못되었고, 다른 힘을 섬기는 자들이며, 자기 사회와 국민들을 죽이는 자들인데 부유하고 잘되지 않는가? 일평생 나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는데, 그 분들과 후손들이 고난당하는 사회 현상, 이것이 법으로까지 억울함을 당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지금의 윤석열 현상이다. 그런데 공수처가 새롭게 출범을 하는데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일본과 맥을 같이 하는 힘이 다시 자리를 잡아가면서 힘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공수처에 수상한 인물들이 세워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부드러운 간첩들이 웃으면서 팔을 내밀며 어머니라고 속이는 늑대현상이 다시 우리 사회 안에 똬리를 틀고 앉는 것이 아닌가?
염려와 우려가 동시에 일이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일직이 일본의 육상으로의 진출을 미연에 경계할 것을 누차에 주장하며 역설해 오지 않았는가? 일본이 우리나라로 진출하는 제3차 침략은 해저 터널과 직결되는 문제가 될 것임을 알리고자 해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김종인 국민의힘 대표가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 찬성과 부산간 일본 해저터널 우리가 공사하여 이루어내자! 란 주장을 내걸고 나왔다. 이것은 정해져 있었던 수순이었다. 지금의 “국민의힘”, 이들 전신의 정부와 정치기반들의 정체성은 바로 여기에 직결되는 뿌리이다.
일본의 침략 운동과 직결되는 기반임을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을 말해오지 않았는가? 그것의 마지막이 해저 터널이고, 이를 통해서 일본이 원하는 육지 상륙작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왜, 부산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데 앞장을 서고자 하는가? 이는 지난 75년의 세월 동안 일본이 부산을 부지런히 일본화했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부산 해변가 일대의 주요한 건물들이 일본인들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경상도는 예로부터 한반도 일본화에 앞장성을 서 왔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와 동일한 노선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가? 해저터널로 일본을 육지화 하는 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일본화 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중간 기착지로 유명무실해지고, 마지막 종착역인 일본이 중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구상 모든 해양 물류는 일본으로 집결할 것이다. 지나가던 배들도 일본이 기착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길이 열려서 하나의 지구로 연결되는 통로의 중심은 일본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힘의 판로를 일본이 쥐게되면서 그 힘이 한반도를 집어 삼키는 바로 이것이 일본의 제3차 침략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부산이 적극적으로 침략 행보에 빗장을 열어재치고자 하면서 이런 정치적 배경이 국민의힘이 되는 것이다. 그랬다. 국민의힘이 계속 우리 정부를 반대하고 광역실패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한국 미래적 약해진 나라 기반과 혼란 상황을 노리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 약해진 한국 기반을 만들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으로 하여금 대한반도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만들고자 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윤석열 현상이고, 공수처가 어떻게 변모되어서 나타날 것인가? 이 점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왜냐하면 애매모호한 인물들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들은 10이면 10, 100이면 100, 숨어 있던 뉴 라이트와 같은 조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현 정부 안에서도 이러한 애매모호한 인물들이 서서히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믿었던 문재인 정부 안에도 변질의 힘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렇다. 75년 세월 동안 일본의 대한반도 제3차 침략이 어떻게 우리 사회 안에 서서히 그 어두운 면을 드리우며 인적 자원들을 농락해 왔겠는가? 이들의 특징은 최대한 부드러우면서 결코 자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민족주의, 검찰 중립, 공수처 중립 이러한 말들은 가장 미화 된 우리 사회 파괴적인 에너지이다. 정치적 중립, 이것이 얼마나 잘 다듬어져 있는 주장들인가? 하지만 아는가? 이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언어이면서 우리를 마비(麻痹)시키는 마법을 부리는 개념이란 사실이다.
민족주의란 우리에게 부정시 되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를 우리에게 부정시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자들은 바로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대립하게 만들어 놓는 미혹자들이 아닌가?
뱀이 하와에게 찾아와서 온갖 미화 된 언어로 미혹하는 그러한 성질이 바로 이러한 언어놀음이다. 그런데 여기에 말려 들어가는 자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지독스럽게 가난하거나 자신의 길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자들, 혹은 자신 사회에 대하여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자들이다.
이들이 나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침략자들의 현란한 말과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부귀영화에 걸려서 이들이 깔아가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배타적 민족주의 노선을 강조하는 리드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검찰 중립, 공수처 중립이란 사회적 공동의식을 만들어서 이와 같은 우리의 힘과 질서, 우리의 사회적 본질들을 밀어내는 역할들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검찰, 공수처의 중립을 말하면서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 배후에 다른 힘이 작용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언어적 운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른 듣기에 좋게 들린다. 공수처 중립, 정치적 중립,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놓아야 이면에서 이러한 중립적인 기반을 조절하여 우리 정부의 역할을 순수한 국가 이득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뿐인가? 이러한 중립 기반을 만들어서 정부와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도록 하고, 이미 자신들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는 언론들을 통해서 낱낱이 사회 안에 까발리게 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항거하도록 하는 사회 길들이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는가?
게다가 정치적인 반대 야당들로 하여금 견제라는 이유 아래 반정부 운동은 물론, 반대 당들과 이러한 정치적 중립 기반들이 결탁하여 반정부 노선이란 나라 환경을 주도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될 확률이 높겠는가? 그 어느 정책하나 제대로 펼 수 없음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늘 싸움박질에다 정부가 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으니 나라가 제대로 국익을 추구해 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민족주의를 부정시 여기도록 하는 배경의 문제이다. 민족주의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처럼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배경이라면 당연히 지양해야 하겠지만, 세계 속에서 우리의 대한민국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 먼저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버려서는 안 되는 주요한 핵심 문제이다.
그러자면 우리의 구심점이 되는 정부와 대통령의 존재와 그 권위는 지켜져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 행정부는 나라 본위를 지키고, 국가 질서와 국익을 추구하고, 미래 영구적인 방향을 지속하며 아름답고 강한 나라를 미래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그 위치가 굳건하게 세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입법부가 법을 잘 제정하여 행정부와 잘 연합하여 국가 운용에 일조해야 한다. 그리고 사법부를 통해서 그 재정 된 법이 잘 집행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의 통치와 국익의 국정운용이 원활하게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이를 도외시하고, 견제, 중립이 강조되어 삼권분립이란 이유아래 정부와 대통령을 견제하고 중립하는 것으로 본을 삼으려 하게 되면, 그 나라는 사분오열의 파괴와 대립이 온 나라를 집어 삼켜버릴 것이다.
이런 나라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경에는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그 어떤 힘들이 현대적으로 우리 사회를 조절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의미들을 강조하고, 미덕으로 부드러움으로 가장하여 미혹하는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와 같은 현상을 ‘현대 침략 배경으로 길들이기 마비 현상의 달콤한 미혹의 소리’라고 규정(規定)하는 것이다. 듣기에 얼마나 좋은 의미인가?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를 자체, 혹은 우리나라 국익이나 구조적인 질서를 생각하는 말이 아니다.
행정부 안의 각 부처의 기득권이나 이득, 개인 권력추구를 위해서, 혹은 야당과 같은 정치적 반대자들의 권력 쟁투를 위해서! 혹은 우리 사회를 노리는 현대 침략적 배경이 노리는 여지(餘地)를 위해서! 견제(牽制), 중립(中立)이란 의미들로 우리를 마비시키고 길들이는 소리인 것이다.
여기서 현대적 침략적 배경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해체이다. 세계 모든 존재, 구조, 의미들에 대한 해체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존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체이다. 우리 사회 안에 중립, 견제라는 의미들이 부각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우리를 유혹하는 마법의 여지(餘地)가 되는 것이다.
정치는 대인 정치와 소인 정치라는 색깔이 있다. 이는 ‘검정과 희다’라는 표면적 색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색깔이다. 인간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를 하는 그의 본바탕, 그것이 대인(大人)이냐 소인(小人)이냐 할 때, 나라에 대한 본바탕이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되는 마음의 색깔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가 온 나라적으로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 지도자들을 세워야 하는가? 이러한 차원에서 자국을 지향하는 대인, 즉 본바탕이 국가 중심적인 인물을 속히 세워가는 기반을 확보하는 이것이 급선무이지 않을 수 없다. 대인은 대인인데 자국을 팔아 먹는 대인이라면, 큰 도둑이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많을 때, 바로 견제, 중립 같은 정치적 개념들이 나라 현실이 되고자 반정부 노선의 힘으로 정치를 하수, 아류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 현대 문제의 병폐가 아닌가?
중립과 견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 우리 사회 지금의 이러한 노선은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돌고 있는 역학 구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정치적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 ‘바이든’ 시대는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더욱더 많고 직접적인 정치적 요구가 우리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지구를 종말 단계로 몰아가야 하기 때문에 무리한 행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와 있다.
여기에 일본은 더욱더 발악하며 우리를 반대하고 막고 방해하는 행보를 해 댈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정부와 사회는 더욱더 긴장하여 온 나라가 각성하는 국가적 기반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정부와 대통령의 국정 운용에 힘을 보태고자 밀어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힘이 되지 못하는 나라적 환경, 온 나라 사회적 구조가 갈수록 공격을 받아 원치 않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국민들의 의식이 고조되지 못하도록 경제는 더욱더 국민들을 옭아매고 있다. 이런 때, 새롭게 등장하는 공수처 실무자들이 국가 질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신들이 검찰처럼 무슨 대통령이나 되는 것처럼 국민들의 이름을 남발하면서 중립을 강조하고 시작한다.
이러한 색깔이 다음을 예고하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그림자처럼 되어서 이 어려운 시점을 어떻게 잘 헤쳐나갈 것인가? 여기에 국가를 운용하는 대통령의 국가 통치에 법으로 조용하게 섬기는 자들이 되면 족할 뿐일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행보로부터 시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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