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태자 인종을 낳고 단경왕후 윤씨가 산후병
으로 죽는 1519년(중종 14년)이다.
그 해 의녀 장금은 조산의녀로서 인종 출산에 성공했으나 왕비가 죽고만다.
조정의 신하들은 대장금과 의관 하종해를 처벌할 것을 상신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30년 가까이 궁중에서 의녀로 근무하는 대장금은 평탄한 삶을
살았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그가 기묘사화때 적몰한 조광조의 유파인
사림을 편들어 위기를 겪었다는 기록이 없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녀간의
애정편력도 허구이다.
그녀가 출산을 도운 인물은 후일의 왕인 인종과 명종, 선조 세 분이다.
조선의 28명의 왕들중 세 분이 그녀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대장금과 함께 동시대에 횔약한 의녀로는 신비(信非)와 계금(戒今), 은비(
銀非)가 있다.
그녀들에게는 성이 없으니 하층신분임이 분명하다.
신비는 장금에게, 장금은 은비에게 궁중의술을 전해주었다.
실록에 따르면 중종 17년(1522) 9월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가 몹시 아파
내의원에서 치료했는데 마침내 대비의 병세가 나아지자 조정은 상을 내린다.
의녀 신비와 장금에게 각각 쌀과 콩 각 10섬씩을 주었는데 이후 신비는 사
라지고 장금의 독무대 시대가 시작된다.
의녀 대장금은 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중종 19년(1524) 12월, 왕이 내린 전교를 보면,
"의관이 급료로 받는 전체아(全遞兒=급료의 전부를 줌)와 반체아(半遞兒=급
료의 반을 받는데 의녀는 이 반체아를 받음)중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가장 낫고 내전에 출입하며 간병하니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나와 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중종 27년 중종은 몇 달에 걸쳐 심한 병을 앓았고 병석
에서 일어난 28년 2월 그간의 치료에 공을 세운 의관 하종해, 박세거, 홍침,
김상곤, 김수량, 노한명과 의녀 대장금, 계금에게 쌀과 콩, 면포를 상으로
내린다. 이 때가 대장금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중종 39년(1544) 10월 중종에게 죽을 병이 들어 대장금의 치료능력
밖이 되자 그녀는 실록에서 사라진다.
중종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그녀가 궁을 나간 뒤 의녀 은비가 활약하는데 은비는 의술보다 엽관행위등
정치적인 활동을 하여 명종 4년에 탄핵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대장금 이상으로 업적을 보인 이들은
실제 궁중의 남자의원들이라는 점이다.
중종때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과 '간이벽온방(簡易癖瘟方)'이란
온열(미지근한 열이니 '유행성출혈열'로 추정) 치료 한글처방의서가 발간
되었는데 이를 저술한 자가 당시 유명한 5의원인
하종해(河宗海),
김순몽(金順夢)·
유영정(劉永貞)·
박세거(朴世擧),
유지번(柳之蕃)이었다.
이들은 궁정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한 큰 의사였고 대장금
등 의녀들을 지도한 의료전문가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