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수행의 길 5 여기에 좌선의(坐禪儀)란 이러한 좌선의 실천과 수행방법 등을 자세히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일찍이 선(禪)의 실천을 중시하는 선불교(禪佛敎)에서 좌선수행법은 많이 강조되고 있으며, 다양한 대소승경전을 통해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여러 경전 속에서 특히 널리 전래되는 종색선사(宗賾禪師)의 『좌선의(坐禪儀)』는 당대 중국선종의 실천정신을 집약한 선불교의 좌선의 수행방법 요약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정각원에서 펴내는《불교수행의 길》시리즈 1권 『좌선으로의 초대』에서 좌선에 관한 내용을 설명한 바 있다. 이어 시리즈 다섯 번째가 되는 이 책 『좌선수행법』는 종색선사의 『좌선의』를 토대로 하여 우선 『좌선의』의 해제와 『좌선의』의 작자와 전래에 이어 그 내용이 되는 좌선에 임하는 몸과 마음, 좌선의 법칙들, 좌선의 공덕과 선정의 중요성 등 보다 구체적이고 올바른 좌선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덧붙여 坐禪儀가 곧 좌선수행법을 의미하고 가르키고 있음을 염두해두길 바란다. 더불어 여러분들의 좌선 실천과 선수행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좌선의(坐禪儀)』의 작자 3. 『좌선의(坐禪儀)』의 전래(傳來) 4. 좌선수행법(坐禪儀) 1) 좌선(坐禪)하는 마음의 준비 2) 몸과 마음의 조정(調整) 3) 좌선(坐禪)의 법칙(法則) ① 4) 좌선(坐禪)의 법칙(法則) ② 5) 좌선(坐禪)의 마음가짐 6) 좌선(坐禪)의 공덕(功德) 7) 마구니의 경계(境界)에 대하여 8) 出定의 주의(注意)와 日常의 공부(工夫) 9) 선정(禪定)의 중요성 10) 맺는 말 특히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안반수의경(安般隨意經)』과 같은 전문적인 소승불교의 선수행의 경전도 있으며, 『유마경(維摩經)』과 같은 대승불교의 선경(禪經)도 있다. 사실 대소승의 모든 경전이 선경이 아님이 없지만 이러한 대소승불교의 정신을 선정의 수행을 통해서 각자 깨달음을 체득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선종(禪宗)의 좌선(坐禪)의(儀)이다. 중국불교에서 좌선의를 대성한 사람은 역시 隋나라 천태종(天台宗)을 대성한 천태지의(天台智顗)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 『마하지관(摩訶止觀)』,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등에 좌선 수행에 대한 여러 가지를 대소승경전 등을 의용하여 자세히 정리하고 체계화하였다. 또한 남산율종(南山律宗)의 대성자인 도선(道宣)도 『계관수습안나반나가상관법(誡觀修習安那般那假相觀法)』 제20권에 10종의 「좌선요법(坐禪要法)」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의 수행에 좌선의 실천이 기본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달마(達摩)로부터 비롯되는 중국선종의 좌선의 혹은 좌선명(坐禪銘)은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전하고 있는 「벽관(安心法)」은 선종 최초의 좌선법이라 할 수 있다. 규봉종밀(圭峰宗密)은 『도서(都序)』에 「달마는 벽관(壁觀)으로 사람들을 안심시켰으며,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 마음에 근심 걱정이 없으며, 마음은 장벽(牆壁)과 같아야 비로소 道에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어찌 이것이 좌선의 법이 아니라고 하겠는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법보기(傳法寶記)』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도신장(道信章)에 四祖 도신이 初學者들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좌선수행하는 방법(作法)을 전하고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선종계통의 자료로선 현존 최고(最古)의 좌선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종밀은 천태지의의 『천태소지관』에 의거하여 『원각경도량수증의(圓覺經道場修證儀)』 제17권, 18권에 八門의 坐禪法 入門을 주장하고 있다. (6) 정수(正修) (7) 선근발(善根發) (8) 증상(證相) ― 18권 수록. 오늘날 널리 전래되고 있는 종색선사(宗賾禪師)의 『좌선의(坐禪儀)』는 작자도 본문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천태지의의 『천태소지관』과 종밀의 『수증의(修證儀)』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좌선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작법은 같다고 할 수 있어도 실천 사상은 선불교의 독자적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조사선(祖師禪)과 묵조선(黙照禪)의 좌선수행방법이 간화선(看話禪)의 수행방법과 실천구조가 다른 것은 선불교의 독자적인 좌선수행의 실천방법을 궁구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색의 『좌선의』는 당대 중국선종의 실천정신을 집약한 선불교의 좌선의 수행 방법을 간략히 요약한 것인데, 조사선이나 묵조선, 간화선 등 모든 좌선수행의 요체(要諦)가 되고 있는 작품이기에 널리 보급하여 올바른 좌선수행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속등록』에는 1101년, 『보등록』에는 1202년에 『선원청규』를 만들었다고 전하는 기록으로 볼 때, 북송(北宋)시대에 활약한 선승이라고 추측 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속등록』의 저자인 불국유백(佛國惟白)은 법운법수 원통선사(法雲法秀 圓通禪師)의 법사(法嗣)인데, 종색은 처음 법수에게 나아가 출가한 사람이므로, 종색과 유백은 동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속등록』의 기록이 신뢰도는 높은데, 『속등록』에는 종색의 법문과 기연(機緣)을 수록하고, 그의 전기로 「姓孫氏 洛州永年人」이라고 전하고 있을 뿐이다. 종색이 스승 법수선사의 문하를 떠나 법수선사의 法兄인 장로응부(廣昭禪師)를 참문하여 그의 법을 계승하고, 崇寧年間(1102-1106) 진정부홍제선원(眞定府洪濟禪院)에 주석하였으며, 이곳에서 『선원청규』를 편찬하였다. 『좌선의』도 『선원청규』에 포함되어 있다. 종색은 진정부홍제선원과 장로숭복선원(長蘆崇福禪院)에 주석하며 법을 펼쳤다. 홍제선원에 대해선 잘 알 수가 없지만, 진정부는 북쪽 임제(臨濟)가 활약한 正定의 땅인데, 종색은 이곳에서 그가 말년에 入寂한 양쯔강 유역의 장로사(長蘆寺)를 중심으로 주석하면서 行化를 펼쳤을 것으로 간주된다. 그의 구체적인 활동과 入寂年은 알 수 없으나 「자각대사(慈覺大師)」의 시호를 하사 받은 사실로 볼 때 당시 위대한 선승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종색은 淨土佛敎의 실천사상가로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약방문류(樂邦文類)』의 편자인 종효(宗曉)는 종색을 「연종오조(蓮宗五祖)」의 지위로 부여하고 있다. 정토사상가로서의 종색은 『관념불송(觀念佛頌)』(『낙방문류(樂邦文類)』제5권),『권수선입선인겸수정토(勸修禪人兼修淨土)』(『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 제11권)의 저작(著作)이 있다. 『좌선의』와 『선원청규』가 참선 수행자들을 위한 입문과 승단의 규칙을 기록한 것인데, 그 가운데 염불의식(念佛儀式)의 규정이 보이고 있는 점은 종색의 이와 같은 선정융합(禪淨融合)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정융합(禪淨融合) 내지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주장은 종색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북송시대 雲門宗의 사상 경향이었으며, 종색도 이러한 시대적인 思潮를 받아 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원집(芝園集)』권하에 「장로색선사문집서(長蘆賾禪師文集序)(『續藏經』105권, 302쪽 b)」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의 文集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종색선사의 법계를 도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운문문언 --향림진원 --지문광조 --설두중현 --천의의회 --장로응부 --장로종색 (雲門文偃)--(香林澄遠)--(智門光祚)--(雪竇重顯)--(天衣義懷)--(長蘆應夫)--(長蘆宗賾) --법운법수 --불국유백 --(法雲法秀)--(佛國惟白) 『좌선의』가 뒤에 『선원청규』의 일부로 편입됨으로 인하여 수행자의 정신과 선수행의 실천적 행위의 규범을 준수하게 하는 구체적인 규제의 第一步가 되었다. 이로부터 종색의 『좌선의』는 선수행 入門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종색의 『좌선의』는 다음과 같은 자료에 편입되어 선수행의 입문서로서 전래되고 있다. 宋 진실(陣實)의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제3권 (『소화법보총목록(昭和法寶總目錄)』제3권에 수록됨). 『선종사부록(禪宗四部錄)』. 『칙수 백장청규(勅修 百丈淸規)』 제5권. 『치문경훈(緇門警訓)』 제1권. 日本 영서(榮西)의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 이 가운데 현존 最古의 자료는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에 수록된 좌선의이며 榮西의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의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여여거사 안병(如如居士 顔丙)의『좌선의(坐禪儀)』 (日本 금택문고자료전서(金澤文庫資料全書) 『佛典』 제1권 「선적편(禪籍篇)」). 일본 도원(道元)의 『정법안장 좌선의(正法眼藏 坐禪儀)』 및 『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등. 夫學般若菩薩. 先當起大悲心. 發弘誓願. 精修三昧. 誓度衆生. 不爲一身獨求解脫爾. 반야의 지혜를 수행하는 보살은 먼저 반드시 대비심을 일으키고, 큰 서원을 세우고 열심히 선정의 삼매를 닦아. 맹세코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서약하여야 하며, 자기의 일신만을 위하여 홀로 해탈(깨달음)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坐(앉음)는 行, 住, 坐, 臥의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가장 안정된 자세로, 즉 결가부좌(結跏趺坐) 혹은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약어이다. 즉 가부좌의 앉은 자세로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고 조고해 보는 수행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은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는 것이며, 깨달은 본래심으로 지금 여기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좌선의 형식은 옛날 인도의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인 모헨죠다로(Mohenjodaro)등에서 발견된 유물인 인장 등에도 새겨져 있으며, 고대 인도에서 실행된 요가의 좌법(坐法)도 마찬가지이다. 실로 좌선의 수행은 오천 여년의 역사를 통해 전래된 인간의 창조적인 사유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학반야보살(學般若菩薩) : 반야(般若)의 지혜를 수행하는 보살은 대승불교의 정신을 실천 수행하는 사람. 반야는 praj의 음사(音寫)로 지혜란 의미이다. 空의 실천으로 체득된 佛性의 自然智가 그대로 반야의 지혜(일체의 차별 분별심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본래심의 直觀)이다. 중국선종에서 선정(禪定)과 반야(智慧)를 하나로 통합한 것은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이었다. 『선관책진(禪關策進)』현사(玄沙)의 시중에도 「夫學般若菩薩, 具大根器 有大智慧始得.」으로 시작하고 있다. 보살은 Boddhisattva, 즉 보리살타의 준말로 覺有情, 大士, 開士 등으로 번역한다. 上求菩提 下化衆生으로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자를 말함.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해석분의 信成就發心을 설한 곳에 直心, 深心, 大悲心의 삼종으로 설하고, 대비심에 대해서는 「세 번째는 대비심으로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설하고 있다. 『열반경(涅槃經)』제38권에 「자신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할지라도 남을 먼저 해탈하도록 한다(自未得度先度他).」라고 설한 보살의 대보리심, 자비심를 말함. 이 말은 『법화경(法華經)』에도 보인다. 천태지의의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 제1권의 上(『大正藏』46권, 476쪽 中)에 의한 말. ◎홍서원(弘誓願) : 사홍서원(四弘誓願)을 가르키는 말. 사홍서원은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제8권(『大正藏』8권, 464쪽 中), 『법화경』제3권 약초유품(藥草喩品)에 보이는 「해탈하지 못한 사람을 해탈하게 하며, 불법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게 하며, 안락하지 못한 사람을 안락하게 하며, 열반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을 열반의 경지에 체득하게 한다(未度者令度, 未解者令解, 未安者令安, 未涅槃者 令得涅槃).」라는 말이 원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에 의거해서 천태지의가 『석선바라밀차제법문』제1권의 上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는 것이 최초이다. 「所謂發菩提心. 菩提心者 卽是菩薩以中道 正觀以諸法實相, 憐愍一切 起大 悲心 發四弘誓願. 發四弘誓願者, 一未度者令度 亦云 衆生無邊誓願度, 二未解者令解, 亦云. 煩惱無數誓願斷. 三未安者令安, 亦云. 法門無盡誓願知. 四未得涅槃 令得涅槃, 亦云.無上佛道誓願成.」 (『大正藏』 46권, 476쪽 中) 지의가 처음 제시한 사홍서원은 『마하지관(摩訶止觀)』제5권의 上, 『천태소지관』의 卷首에 싣는 등 수당(隋唐)의 諸宗에선 보살계를 수여할 때에 반드시 이를 외우도록 하고 있다. 선종에서도 北宗의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에 최초로 보이며, 돈황본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싣고 있고, 『보림전(寶林傳)』의 가섭장, 『백장광록(百丈廣錄)』등에 강조하고 있는 등 널리 일반화되었다. ◎불위일신(不爲一身) : 불법(弗法)을 수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해탈(깨달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밑으로는 일체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위대한 菩薩道는 이러한 정신을 강조한 말이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제26권(『大正藏』8권, 410쪽 中,下)에 보살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함은 일체중생을 위한 것으로 설하고 있으며, 또 「이처럼 보살은 초발심에서부터 소유의 보시, 일체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지혜를 닦는 것도 모두 일체중생을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다. 量其飮食. 不多不少. 調其睡眠. 不節不恣. 그리고 여러 가지 잡다한 인연들을 떨쳐버리고, 번거로운 일들을 쉬게 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身心一如) 움직일 때나, 조용히 선정에 경지에 있을 때와 일체 차이가 없도록 하라. 음식의 양을 조절하여 너무 많이도, 혹은 너무 적게도 먹지말고, 수면을 조절함에는 적게도 많게도 하지 말라. ◎방사제연(放捨諸緣) : 좌선(坐禪)에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잡다한 반연(攀緣)을 떨쳐 버리고 좌선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강조하는 말이다. 『천태소지관』의 제1장에 좌선수행에 다섯 가지 환경(五緣)을 갖출 것을 강조하면서, 네 번째에 「모든 잡다한 반연의 업무(緣務)를 그만둘 것」을 설한 곳에, 「첫째는 생활의 잡다한 업무(緣務)를 쉬고, 有爲의 사업을 하지 말 것. 둘째는 인간의 잡무(緣務)를 쉬고, 俗人, 朋友, 친척 등 아는 사람을 찾지 않는 것. 세 번째는 工藝나 技術의 잡무(緣務)를 쉬는 것. 세간의 공장, 기술, 의술, 금주(禁呪), 복상(卜相), 서류, 계산 등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학문의 잡무(緣務)를 쉬는 것. 독송(讀誦), 청학(聽學) 등의 여러 가지를 모두 버릴 것. 이러한 모든 잡무들을 그만두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만약 잡다한 일(緣務)이 많으면 즉 도를 행하는 일이 그르치게 되며, 마음이 어지러워 수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종밀의 『수증의』에도 『천태소지관』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조당집』제14권 백장장(百丈章)에도 「좌선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일체의 반연을 쉬고 만사를 쉬어야 한다(先歇諸緣, 休息萬事).」 「俱歇一切攀緣」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번잡스러운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에서 無事, 無心의 경지에서 쉬어야 한다. 『조당집』제3권 남양혜충장(南陽慧忠章)에 혜충국사가 남방에서 온 禪客과의 문답 가운데, “나의 불성은 身心이 一如하며, 身外에 無余하다. 따라서 한결같이 生滅이 없다. 남방에서의 불성설은 몸(身)은 무상하지만, 심성은 영원(常)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반은 生滅이 있고, 반은 生滅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남방선지식들이 주장하는 육체와 법신(法身)의 분별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전등록(傳燈錄)』제28권에 혜충국사가 『단경(壇經)』을 비판하는 곳에도 언급되고 있는 일단이다. 『조당집』제9권 구봉화상장(九峯和尙章)과 지눌(知訥)의 『단경』跋文에서도 혜충의 「身心一如, 身外無余」의 일절을 인용하고 있다. 『증도가(證道歌)』에서 「行도 또한 禪, 坐도 또한 禪, 言, 黙, 動, 靜에 體安然.」이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행, 주, 좌, 와의 사위의에 구별 없이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참선을 실행하는 것이다. 자각적인 본래심으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양기음식(量其飮食) : 음식의 양을 너무 적게도 먹지 말고, 또 너무 많이도 먹지 않도록 잘 조절하여 좌선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수면과 휴식도 알맞게 취하여 신체적인 밸런스를 잘 조절하도록 강조하고 있는데 이 역시 좌선을 잘 할 수 있는 신체의 조절과 환경을 갖추기 위한 준비이다. 『천태소지관』의 조화제사(調和第四)에 「음식을 조절하고, 수면을 조절하며, 몸을 조절하고, 氣息을 정돈하며, 마음을 조절하는 다섯 가지 법」을 설하고 있다. 欲坐禪時. 於閑靜處. 厚敷坐物 寬繫衣帶 令威儀齊整. 然後結跏趺坐. 先以右足安左䏶上, 左足安右䏶上. 或半跏趺坐亦可. 但以左足壓右足而已. 次以右手安左足上, 左掌安右掌上, 以兩手大拇指面相拄. 徐徐擧身前欠. 復左右搖振. 乃正身端坐. 결가부좌는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넓적다리)위에 올려놓고,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 놓는다. 좌선은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자세로 해도 좋다. 반가부좌를 할 때에는 왼쪽 발을 오른쪽 발 위에 올려 놓기만 하면 된다. 그 다음에 오른 손을 왼발 위에 올려 놓고, 왼쪽 손바닥을 오른쪽 손바닥 위에 올려 놓으며, 양손의 엄지 손가락의 끝을 서로 맞대어 받쳐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펴고, 또 좌우로 몇 번 흔들어 잘 정돈한 뒤에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는다.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의 「한적한 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여 편안하게 머물며 동요됨이 없기를 수미산과 같도록 한다(在於閑處, 修攝其心, 安住不動, 如須彌山).」(『大正藏』9권, 37쪽 下)라는 일절을 인용하고 있다. 또 『법화경』서품에 「항상 공한처(空閑處)에서 깊이 禪定을 닦도록.」(『大正藏』9권, 3쪽 上)주장하고, 『유교경(遺敎經)』에서도 「너희들 비구들아! 寂靜無爲, 安樂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시끄러운(憒鬧) 곳을 벗어나 獨處에 한거(閑居) 하도록 하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능가경(楞伽經)』(『大正藏』 16권, 497쪽 上),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大正藏』8권, 731쪽 中) 등 모든 경전이 한결같이 조용한 곳에서 좌선 수행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천태소지관』에 第三閑靜處를 「번거로운 잡무(衆事)를 하지 않는 것을 閑이라 하고, 시끄러움(憒鬧)이 없음을 靜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선정(禪定)을 닦기 알맞은 곳으로 첫째는 深山의 人迹이 없는 곳. 둘째는 두타란약처(頭陀蘭若處), 즉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소, 돼지 등 짐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시끄럽지(憒鬧) 않는 곳. 셋째는 세속인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청정한 사찰들을 모두 한거정처(閑居靜處)로 하고 있다. 천태의 이와같은 주장은 『차제선문(次第禪門)』 제2권(『大正藏』 46권, 487쪽 中), 『마하지관』제4권 下(『大正藏』 46권, 42쪽 中)등에도 주장하고 있으며, 종밀의 『수증의』도 이에 의거한 것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 : 跏는 다리를 교차시키는 것이고, 趺는 발바닥을 말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제7권에 「질문:좌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부처님은 왜 오직 결가부좌만을 주장하십니까? 대답:여러 가지 좌법 중에서 결가부좌가 가장 안온하고 피로가 적기에, 이것이야말로 坐禪人의 좌법인 것이다. 손과 발을 攝持하여 마음도 또한 산란하지 않게 된다(『大正藏』25권, 11쪽 中).」라고 설하고 있다. ◎선이우족…(先以右足…) : 여기 『좌선의(坐禪儀)』에서 설하는 결가부좌가 전통적으로 좌선수행의 기본이 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반가부좌를 실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불타파리(佛陀波利)의 『수선요결(修禪要訣)』에 「오른발을 왼쪽 발 위에 올려 놓는다. 만약 결가부좌가 편하지 않으면 반가부좌로 해도 좋다. 반가부좌의 좌법은 오직 왼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는 것이다.」(『續藏經』 110권, 418쪽 a)라고 설하고 있다. 또 『대장일람(大藏一覽)』제3권에 인용된 『좌선의』도 이와 같이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 놓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先次左足安右陛上 云云.」 ◎서서거신전흠(徐徐擧身前欠) :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 뒤, 좌, 우로 잘 흔들어 조절하여 몸을 안정되게 하여 단정히 앉는다. 원본의 「전흠(前欠)」란 어려운 말인데 흠(欠)은 흠신(欠伸)의 뜻이기에 긴장을 푼다는 것이리라. 『대장일람』에는 「徐徐擧身良久…」로 되어있다. 『치문경훈(緇門警訓)』은 「徐徐擧身前向…」 선종사부록본(禪宗四部錄本)에는 「徐徐擧身 前後左右 反復搖振」으로 되어있다. 이 일단은 『천태소지관』의 조화편(調和篇)에 「다음은 마땅히 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 먼저 몸과 여러 팔 다리 손가락 등 지절(肢節)을 흔들어 움직이기 7-8번 하여 다음엔 마땅히 몸을 바르게 하고 단정하게 하여 척추 뼈가 서로 굽지 않고 똑바로 세워 앉도록 하라.」라고 설한다. 이러한 좌선 안마법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도신장(道信章)에도 보인다. 不得左傾右側前躬後仰, 令腰脊頭項骨節相拄, 狀如浮屠, 又不得聳身太過. 令人氣急不安. 要令耳與肩對, 鼻與臍對, 舌拄上齶, 唇齒相著. 目須微開, 免致昏睡. 若得禪定, 其力最勝.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지 않게 하며, 오른쪽으로 치우치게도 하지 말라. 혹은 앞으로 구부리게도 하지 말고 뒤로 넘어지게도 하지 말라. 허리와 등뼈(脊椎), 머리와 목의 골절이 서로 서로 떠받치어 그 모양이 마치 탑을 세워 놓은 것처럼 하라. 그러나 몸을 똑바로 곤두 세우게 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신경쓰고 힘을 주어 불안하게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귀와 어깨가 서로 나란히 되도록 하며, 코와 배꼽이 서로 나란히 수직이 되도록 하라. 혀는 잇몸을 가볍게 떠받치게 하며, 위 아래의 입술과 이는 서로 맞대어 가볍게 다물도록 하라. 눈은 반드시 반쯤 뜨게하여 졸음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선정을 닦게 되면 그 효과는 실로 뛰어나다고 하겠다. ◎불득좌경우측전궁후앙(不得左傾右側前躬後仰) : 『천태소지관』에 「다음은 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 단정하고 바르게 하여 척추 위의 뼈마디가 서로 맞대어 굽거나 솟아나게 하지 말라. 다음에 머리와 목을 바르게 하라, 코와 배꼽이 서로 맞대이도록 하며 치우치거나 비스듬히 하지 말고 앞으로 굽거나 뒤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라고 설한 一段에 의거한 것인데, 여기선 허리와 척추 뼈, 머리, 목의 골절이 서로 서로 받쳐주게 하여 앉은 모습이 흡사 탑(stpa)을 세워 놓은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 그 밖에 지엄의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大正藏』 45권, 532쪽 上), 종밀의 『수증의』, 『도서(都序)』의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에도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임제록(臨濟錄)』시중(示衆)에서는 이러한 좌법은 외도의 법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좌선법에 집착된 좌선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古有習定高僧, 坐常開目. 向法雲圓通禪師, 亦訶人閉目坐禪, 以謂黑山鬼窟, 蓋有深旨. 達者知焉. 身相旣定, 氣息旣調, 然後寬放臍腹. 一切善惡. 都莫思量. 念起卽覺, 覺之卽失. 久久忘緣 自成一片. 此坐禪之要術也. 竊謂坐禪乃安樂法門, 而人多致疾者, 蓋不善用心故也. 옛날에 선정을 닦는 어떤 고승이 있었는데, 그는 좌선을 할 때는 언제나 눈을 뜨고 앉았다고 한다. 최근에 東京 법운사의 원통선사도 역시 눈을 감고서 좌선을 하는 사람을 흑산의 동굴에 빠진 죽은 사람의 좌선이라고 꾸짖고 있다. 정말로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라는 사실을 좌선에 통달한 사람은 알 수 있다. 좌선하는 몸가짐이 이미 안정되고 호흡이 잘 조절된 뒤에 이번에는 하복부를 편안하게 하고, 일체의 善惡 모두를 생각(思量)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한 생각의 煩惱 妄念이 일어나면 곧바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깨닫도록 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깨달으면 곧바로 번뇌 망념은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오래 오래도록 하여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는 번뇌 망념이 없어진다면 자연히 나와 경계도 없어져 하나(一片)가 된다. 이것이 좌선의 요술인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 볼 때 좌선이야말로 안락의 법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좌선을 하여 병을 얻은 자가 많으니, 이것은 대개 좌선의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리고 「좌선(坐禪)할 적에 눈을 감는 자는 도를 觀함에 분명하다고 하지만, 눈을 뜨게 되면 곧바로 도를 잃어버리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눈을 감고 좌선수행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56단)에도 눈을 감고 좌선 수행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있다. 눈을 감고 좌선하면 곧바로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만다. 참고로 그의 법계를 도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法雲--香林--智門--雪竇重顯--天依義懷----長蘆應夫--長蘆宗賾 --圓通法秀--佛國惟白 (법운-향림--지문--설두중현--천의의회---장로응부--장로종색 --원통법수--불국유백) ◎흑산귀굴(黑山鬼窟) : 惡鬼가 살고 있는 동굴은 암흑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 즉, 生命力을 잃어버린 죽은 사람의 좌선이란 뜻. 자각적인 지혜가 없는 수행자를 말한다. 흑산은 『구사론(俱舍論)』제11권의「세간품(世間品)」에 보임. 대철위산(大鐵圍山)과 소철위산(小鐵圍山)의 중간에 있는 암흑처로 긴나라(Kimnara; 疑神, 歌樂神)가 살고 있는 곳. 『경율이상(經律異相)』제46권에 「긴나라는 수미산의 북쪽에 소철위(小鐵圍)를 지나 대흑산(大黑山)이 있으며 또 십보산(十寶山)의 중간에 있는데 佛法이나 日月星辰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조당집』제18권 앙산장(仰山章)에 「저 눈앞의 不生不滅이나 이변중도(二邊中道)의 義海만을 논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빛과 그림자일 뿐이니 눈앞의 義海를 던져버려라. 하나의 흑산을 궂이 껴안고 있으면 이는 어리석음의 세계이며 또 선이라 할 수 없다.」(5-79)라고 하고 있다. 그 밖에『전등록(傳燈錄)』제18권 현사장(玄沙章), 『운문광록(雲門廣錄)』권 중에도 「黑山鬼窟裏 作活計」라고 하고 있으며, 송대의 대혜종고(大慧宗杲)는 묵조선(黙照禪)을 비판하며 黑山下의 귀가활계(鬼家活計)라고 비난하고 있다. 『조당집』제14권 백장장(百丈章)에도 「어떤 것이 대승입도돈오법(大乘入道頓悟法)입니까?」라는 僧의 질문에 백장이 「자네가 먼저 모든 반연을 쉬고 만사를 휴식하며 善과 不善 등 세간의 일체제법을 모두 방각(放却)하라. 기억하지 말고, 緣念하지 말고, 身心을 방사(放捨)하여 자재하도록 하라.」라고 답하고 있다. 『돈오요문(頓悟要門)』12단에도 「一切善惡을 모두 思量하지 말라.」라고 설하고 있다. 善惡, 凡聖, 美醜 등 일체의 상대적‧대립적인 차별, 분별심인 사량분별(번뇌 망념)세계를 초월하여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 가는 좌선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잘 알아야 올바른 禪수행을 할 수가 있다. ◎염기즉각(念起卽覺) : 스스로 번뇌 망념(煩惱 妄念)이 일어난 것을 본인이 스스로 자각(自覺)하는 것.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곧 없어지고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스스로 번뇌 망념을 자각하지 못하면 번뇌 망념의 시간속에 중생의 미혹한 삶을 살게 되고 만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소위 心性은 항상 번뇌 망념이 없기 때문에 불변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한 법계(깨달음의 세계)를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본래심과 상응하지 못하고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無明이라고 한다(所謂心性常無念故 名爲不變. 以不達一法界故 心不相應 忽然念起 名爲無明).」(『大正藏』32권, 577쪽 下)라고 한 것처럼, 念起란 망념이 일어난 無明의 입장이다. 또 「앞에 일어난 망념을 자각했기 때문에 능히 뒤에 일어나는 망념을 방지할 수가 있다(覺知前念起惡故, 能止後念, 令其不起).」라고 설하고 있다. 『도서』에 「일체 모든 諸相이 空함을 깨달으면 마음은 자연히 망념이 없다.(無念) 망념이 일어나면 곧 망념인줄 깨달아라. 망념인 것임을 깨닫게 되면 망념은 곧 없어진다. 수행의 妙門은 오직 여기에 있다.」라고 설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이미 일어난 망념은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일어나지도 않은 망념은 내버려 두라. 이렇게 실천한다면 자네가 10년 수행한 것보다 더 훌륭하다(已起者莫續, 未起者不要放起, 便勝你十年行脚).」라고 하고 있다. 또한 『종경록(宗鏡錄)』제38권에도 「선문중에 말하기를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망념인 줄 자각하는 것이 늦음을 염려하라. 또 말하기를 별기(瞥起)는 바로 病이요, 계속되지 않게 하는 것이 藥이다.」(『조당집』제6권 동산장의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수행의 본질과 선이 자각의 종교인 사실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말이다. 공안선의 경우 자기와 화두참구와 하나가 되어 버린 경지. 자기도 없고 참구대상인 화두도 없어진 경지.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는 「萬法一如」의 세계. 動靜一如, 寤寐一如, 茶禪一如 등. ◎안락법문(安樂法門) :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眞理의 世界). 『법화경』제5권 안락행품(安樂行品)에 부처님이 문수의 질문에 대답하여 후대 惡世에 이 경을 설한 자의 수행으로서 四種安樂(身, 口, 意, 誓願)을 들고 있다. 먼저 신의(身儀)에 대해서 불친근처(不親近處)와 친근처(親近處)를 설하고 불친근처에 대해 국왕, 왕자, 대신, 여러 외도, 세속의 문장을 만드는 사람, 나쁜 율의(律儀)등이며, 친근처는 「항상 좌선(坐禪)을 좋아하고 한적한 곳에서 산란된 마음을 수섭하도록」하고 있다. 즉 『?법화경?에서는 친근처를 실천하여 수행자가 몸의 安樂을 보존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조당집』제2권 혜능장(慧能章)에 「一相三昧란 어느 곳에서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 형상에 대하여 미움도 사랑도 없으며, 취하고 버릴 것도 없고 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절로 안락하기에 日常三昧라 한다.」고 하고 있다.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일체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없어져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안락한 좌선의 상태를 말한다. 마치 외출했을 때 불안과 두려움 공포에서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일체의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즐겁게 자기의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 선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평안한 가운데 일체의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일상생활을 지혜롭고 창조롭게 전개하는 것을 安身立命이라고 한다. 일체의 번뇌 망념(生滅心, 生死心)이 없는 열반적정의 안락(寂滅爲樂)한 경지를 말함. ◎인다치질자(人多致疾者) : 많은 사람들이 좌선수행을 잘못하여 생기는 禪病을 말함. 『천태소지관』 치병편(治病篇)에 「身, 息, 心의 三事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내외위반(內外違反)하는 곳이 있기에 병환(病患)이 있다. 坐禪의 법은 만약 마음을 잘 쓰면 사백사병(四百四病)이 자연히 제거되지만 만약 用心이 옳지 못하면 사백사병이 이로 인해서 발병한다.」라고 하고 있다. 많은 병이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 많다. 마음을 잘 쓰고 일체의 경계에 걸리고 집착하면 만병이 생긴다. 번뇌 망념으로 생기는 병은 좌선의 수행으로 치유해야 한다.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의 대표적인 禪病은 수마(睡魔)에 떠러지는 혼침(昏沈)과 번뇌 망념에 시달리는 산란심(散亂心)을 들고 있다. 若善得此意, 則自然四大輕安, 精神爽利. 正念分明, 法味資神, 寂然淸樂, 若已有發明者. 可謂如龍得水, 似虎靠山, 若未有發明者. 亦乃因風吹火 用力不多. 但辨肯心 必不相賺. 만약 이와같이 좌선의 의미와 방법을 잘 알고 좌선수행한다면 저절로 신체(四大)는 가볍고 편안하게 되며, 정신은 상쾌하고 의식은 통일되어 분명하게 된다. 禪法의 喜悅이 정신을 돕고, 고요하고 맑은 정신으로 평안하고 즐겁게 된다. 또한 만약에 자기의 본심을 깨닫고 밝히게 되면 진실로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할 것이요, 호랑이가 산에서 거닐고 있는 것 같이 자유자재하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아직 자기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여 밝히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바람부는 방향에 불을 놓는 것같이 불길이 쉽게 번지는 것처럼, 많은 노력을 쏟지 않더라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자각하여 납득해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하며, 반드시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대경안(四大輕安) : 사대(四大)는 地, 水, 火, 風의 네가지 원소인데 여기선 육체뿐만아니라 일체의 만물은 地, 水, 火, 風의 사대원소로서 구성되어 있다고 설한다. 예를들면 『원각경(圓覺經)』에 「나의 지금 이 몸은 사대의 和合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소위 머리카락, 손발톱, 이빨, 피부 근육, 골수, 뇌 등의 색신은 모두 地로 돌아가고, 침과 눈물, 콧물, 고름과 피, 진액연말(津液涎沫), 담루정기(痰淚精氣), 대소변리(大小便利)는 모두 水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煖氣)은 불(火)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動轉은 바람(風)으로 돌아가고, 사대가 각각 흩어지면 지금 이 妄身은 마땅히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설하고 있다. 사대는 四體 四肢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경안(輕安)은 『유식론(唯識論)』제6권에 善의 十一中, 경안의 心所를 설하고 있다. 「安이란 경안을 말한다. 추중(麤重)을 멀리하고 신심을 조창(調暢)하여 감주(堪住)하는 것을 性이라고 한다. 혼침(混沈)에 대치(對治)하여 轉依하는 것을 業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선정을 장애하는 법을 항복시키고 의지(依止)하는 곳을 굴려 안적(安適)하도록 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정념분명(正念分明) : 정념(正念)은 산란스러운 망념을 여읜 올바른 一念, 즉 無念 無心을 말한다. 절대 현재(지금 여기)에 무심으로 작용하는 본래의 자기를 말한다. 『돈오요문』권상(9단)에 「有를 생각하고 無를 생각하는 것을 곧 邪念이라고 하며, 有無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正念이라고 한다.」고 하고 있다. 나아가 「善惡, 苦樂, 生滅, 取捨, 怨親, 憎愛없음을 정념(正念)이라하고, 정념이란 오직 보리(菩提)를 思念한다.」라고 하고 정념이란 無念인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번뇌 망념이 없는 一念(본래심)의 작용은 지혜이기 때문에 정념은 分明한 것이라고 함. 여기선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불을 일으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아직 본래심을 깨닫고 발명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좌선(坐禪)의 가르침에 따라 여법하게 수행한다면 헛되이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도 자연히 불성(佛性)을 밝힐 수가 있다는 주장. ◎단변긍심(但辨肯心) :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납득하도록 하여 확신을 갖도록 할 것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잠(賺)은 물건을 팔 때에 내용을 잃어버린다는 말인데, 속인다는 뜻. 이 말은 원래 『위산경책(潙山驚策)』에 「此之一學 最妙最玄 但辨肯心 必不相賺」이란 말에 의한 것. 동산(洞山)의 『보경삼매(寶鏡三昧)』에도 「긍심자허(肯心自許)」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대혜어록(大慧語錄)』 제1권(『大正藏』47권, 812쪽 中)에도 인용하고 있다. 然而道高魔盛, 逆順萬端, 但能正念現前, 一切不能留碍. 如楞嚴經, 天台止觀, 圭峰修證儀, 具明魔事, 預備不虞者, 不可不知也. 그러나 道心이 높으면 높을수록 마구니의 장애가 많아지며, 어떤 때는 逆境에서 어떤 때는 順境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마구니의 장애가 생긴다. 그러나 능히 본래심(正念)으로 자신의 일을 한다면 일체의 어떤 마장에도 걸릴 것이 없게 된다. 『능엄경』이나 천태지의의 『마하지관』및 규봉宗密의 『수증의』등에서 한결같이 그러한 마구니의 경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예상치못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즉, 正法의 眼目을 갖추고 제법의 참된 實相을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지혜가 구족되었을 때 어떠한 마구니의 장애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제560권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이 사리자(舍利子)에게 말씀하셨다. 사리자여! 일체의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은 모두 다 함께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는 여러 보살들을 護念하고 모든 악마들로 하여금 곤경에 빠뜨리지 못하게 한다. 사리자여! 만약 여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면 법이(法爾)로서 모두 시방무량무변세계(十方無量無邊世界)의 일체여래응정등각(一切如來應正等覺)과 함께 호념(護念)받게 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여래응정등각에 호념받게 된 사람은 악마도 法爾로서 곤경에 빠뜨리지(留難) 못한다.」(『大正藏』7권, 889쪽 中,下) 능엄경(楞嚴經) :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10권을 말함. 唐의 신용원년(神龍元年)(705) 중천축사문(中天竺沙門) 반자밀제(般刺密帝)가 廣州 제지사도장(制止寺道場)에서 번역하였으며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로서 전정간대부동중서문하 평장사청하방융(前正諫大夫同中書門下 平章事淸河房融)의 필수(筆授), 오장국사문미가석가(烏長國沙門彌伽釋迦)의 역어(譯語)라고 함. 이 경의 번역에 대한 사정은 『개원석경록(開元釋經錄)』제9권, 『정원록(貞元錄)』제14권, 『송고승전(宋高僧傳)』 제3권 등에 보이는데 記事의 相違가 상당히 있다. 이 경은 唐代 中期에 만들어진 위경으로 일종의 禪經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제9권와 제10권에 止觀의 수행에 있어서 色, 受, 想, 行, 識에 각기 10종의 魔事가 일어나는 오십마경(五十魔境)을 자세히 설하고 있다. 若欲出定 徐徐動身, 安詳而起, 不得卒暴. 出定之後, 一切事中, 常作方便, 護持定力, 如護嬰兒, 卽定力易成矣. 만약 禪定에서 나오려고 할 때에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편안하고 조심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경솔하고 거칠게(난폭하게)해서는 안 된다. 禪定에서 나온 뒤에도 평상시의 일체의 매사에서 언제나 (공안을 참구하는 등) 방편을 만들어 禪定의 힘을 잘 간직하기를 마치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같이 하라. 이와 같이 수행 한 즉 禪定의 힘을 쉽게 이룰 수가 있다. 『좌선의(坐禪儀)』는 이러한 『천태소지관』의 出定方法에 의거하고 있다. 부득졸폭(不得卒暴) 역시 『법화경』안락행품(安樂行品)에 보살이 忍辱地에 住함에 「柔和善順, 而不卒暴, 心亦不驚」 (『大正藏』9권, 37쪽 上)이라는 말에 의거한 것. 卒은 경솔한 것. 暴은 거칠고 난폭한 것. 갑자기 서둘러서 경망스럽고 가볍게 행동하여 평정을 잃어버림. 경솔하고 거칠게 좌선의 자세에서 곧바로 일어나는 것. ◎상작방편(常作方便) : 『천태소지관』의 방편편(方便篇)에 선정(禪定)에서 나오는 마음가짐으로서 「欲, 精進, 念, 巧慧, 一心」의 五方便을 들고 있다. 즉 欲은 일체의 선법을 志願好樂하는 마음. 精進은 마음을 응집하여 선정을 게으르지 않는 것. 念은 세간의 事相을 虛妄하고 천박한 것으로 관찰하고 선정을 존중해야 할 귀중한 것으로 관념할 것. 巧慧는 세간의 五慾樂과 禪定智慧의 즐거움을 得失輕重을 비교하는 것. 一心分明은 定慧를 귀중히 할 것을 惑識하고 一心을 결정하는 것. 이러한 五方便에 의해서 「世法을 捨離하고 定力으로서 항상 호지하도록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원래 일정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할 도리는 없으며 구체적으로는 각자의 공부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본래심의 자각적인 생활과 공안참구의 선정. 夫禪定一門, 最爲急務, 若不安禪靜慮, 到這裏總須茫然. 所以道, 探珠宜靜浪. 動水取應難, 定水澄淸, 心珠自現. 故圓覺經云, 無碍淸淨慧, 皆依禪定生. 法華經云, 在於閑處, 修攝其心, 安住不動, 如須彌山. 사실 禪定을 닦는 수행은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조용히 坐禪하여 思惟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일상생활 每事에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을 상실하여 정신없이(茫然) 멍청하게 살게 된다. 그래서 「물 속에 떨어진 구슬을 찾으려면 먼저 물결을 가라 앉혀야 하며, 물결이 흔들리면 구슬을 찾기란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禪定이라는 물이 맑고 깨끗하게 되면 마음이라는 구슬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원각경』에도 「걸림이 없는 청정한 智慧는 모두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법화경』에도, 「한적한 곳에서 자기의 마음을 잘 거두고 禪定을 닦아, 편안히 안주하여 동요됨이 없는 모습이 마치 수미산과 같도록 하라.」라고 설하고 있다. ◎약불안선정려(若不安禪靜慮) : 만약 마음을 편안히 하여 禪定을 닦지 않는면...」 여기의 정려(靜慮)도 선정(禪定)의 역어(譯語). 따라서 여기엔 범어의 禪(Dhyna)과 禪의 번역어(飜譯語)를 함께 만든 말.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돈오요문』권하(12단)에 「만약 좌선(坐禪)하여 깊은 선정에 들지 못한다면 지금 여기에 이르러서 망연 자실하게 될 것이다(若不安禪靜慮, 到這裏總須茫然).」이라는 말에 의한 것. 이 말은 『전등록』제11권 앙산장(仰山章)에도 古德의 말로서 인용하고 있다. ◎저리(這裏) : 저리(這裏)는 人生 一大事를 전개하는 지금 여기의 현장을 말하며, 지금 여기에 각자 生死到來한 곳을 가르키는 말. 여기 지금. 이곳 만일의 경우 등과 같이 자기에게 가까운 장소나 혹은 어떠한 사건을 가르키는 부사어. 여기에선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이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지 못하고 번뇌 망념에 끄달리고, 경계에 떨어져서 자아의 주체를 상실하여 멍청하게 살게 된다는 말. 자기의 자각적인 주체를 상실하여 멍청하게 어쩔줄 모르면서 사는 것. 「예를들면 봄에 사람들이 연못에 뱃놀이를 하고 있을 때 잘못하여 유리의 보석을 물 속에 떨어뜨렸다고 하자. 그때 사람들이 한번에 물 속에 들어가 그 보석을 찾으려고 다투어 기와나 나무조각 작은 돌을 주어 각기 유리의 보석을 주웠다고 생각하고 기뻐서 건져내 보면 그것이 모두 진짜가 아닌 줄을 알게 된다. 그런데 寶珠는 아직 물 속에 있어 寶珠 그 자체의 힘으로 물을 맑게 한다. 그 때 사람들이 寶珠가 역시 물 속에 있음을 알게 되어 마치 하늘에 걸린 달빛을 받아 보는 것처럼 寶珠를 볼 수 있다.」(『大正藏』12권, 617쪽 下) 이 비유는 『보성론(寶性論)』에 여래장(如來藏)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처럼 『좌선의(坐禪儀)』에서 말하는 취지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물 속의 寶珠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당연히 물을 가라 앉히어 맑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각자의 본래 면목으로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자각하기 위해선 먼저 선정의 힘으로 산란된 마음의 번뇌인 파도(물결)를 가라 앉히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인용한 게송(偈頌)은 『원각경』제8권 변음보살장(辨音菩薩章)의 게송. (『大正藏』19권, 919쪽 上) 是知 超凡越聖, 必假靜緣. 坐脫立亡, 須憑定力. 一生取辨, 尙恐蹉駝, 況乃遷延. 將何敵業. 故古人云, 若無定力, 甘伏死門. 掩目空歸, 宛然流浪. 幸諸禪友, 三復斯文. 自利利他. 同成正覺. 범부의 경지를 뛰어넘고, 또한 성인의 경계까지 초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靜坐의 힘(緣)을 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앉은 채로 입적하고 선채로 죽을 수 있는 것도 모두 禪定의 힘에 의한 것이다. 한 평생을 다하여 本來面目을 밝히려고 정진해도 오히려 시간이 모자랄까 두려운데, 하물며 이렇게 게을리 하여 어떻게 번뇌 망상의 業性을 이길 수 이으랴! 그래서 古人도 「만약 禪定의 힘이 없으면 달갑게 죽음의 문턱에서 항복하는 수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눈을 감은 채로 한 평생을 헛되이 보내고 완연하게 生死의 苦海에 유랑하게 될 것이다. 바라건데 제발 모든 禪友들이여! 이 文章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자신을 구제함은 물론 또한 타인들도 제도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正覺을 이루도록 하자! 그 밖에 좌탈한 예는 상당히 많으며 마조(馬祖)의 제자 오태산 등은봉(五台山 鄧隱峯)은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입적한 이야기를 『조당집』 제15권(4-91)에 싣고 있고, 『임제록』에 보화(普化)의 全身脫去한 이야기는 유명한 것이다.(『선가귀감(禪家龜鑑)』에도 인용함) 선승들은 각자 입적할 시기와 입적방법을 알고 스스로 일종의 안락사를 실행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이나 음식물을 일체 먹지않은 상태에서 남자는 7일, 여자는 9일 정도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체내의 음식물(穀氣)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는 아픔의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한다. 마치 갓난 유아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불조삼경주(佛祖三經注)』권하에 수록된 『유교경』에 「만약 定을 얻으면 마음은 곧 흩어지지 않는다. 비유하면 물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제방(堤防)을 잘 다스리는 것처럼...」이라는 말을 주석(注釋)하기를 「만약 定力이 없으면 乾惠(겉으로만 지혜스럽게 보이는 것)로서 苦輪(윤회의 고통)을 면하지 못한다. 定은 惠를 돕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甘伏死門은 죽음에 직면했을 경우 그 고통을 멋지게 제복(制伏)하고, 이것을 초탈(超脫)하는 자유스럽고 활달한 수단은 선정(禪定)의 힘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선정의 힘(定力)이 없으면 죽음의 괴로운 死門에 임하여 어쩔 수 없이 항복되는 수 밖에 없다.」란 뜻. 자리(自利)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구도정신으로 깨달음의 智慧를 體得하는 것. 이타(利他)는 衆生濟度로서 자비의 실천을 말함. 이 말은 『십이문론(十二門論)』관성문(觀性門)(『大正藏』30권, 165쪽 上)에 보이며, 『삼론의(三論義)』에도 인용하고 있다. 또 『선계경(善戒經)』 제2권(『大正藏』 30권, 973쪽 中)등에도 보이는데 천태지의의 『마하지관』제1권에서 주장하는 「上求菩提 下化衆生」(『大正藏』 46권, 6쪽 上)이란 명구와 같은 뜻임. ========================================== 음식의 양을 조절하여 너무 많이도, 혹은 너무 적게도 먹지말고, 수면을 조절함에는 적게도 많게도 하지 말라. 결가부좌는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넓적다리)위에 올려놓고,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 놓는다. 좌선은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지세로 해도 좋다. 반가부좌를 할 때에는 왼쪽 발을 오른쪽 발 위에 올려 놓기만 하면 된다. 그 다음에 오른 손을 왼발 위에 올려 놓고, 왼쪽 손바닥을 오른쪽 손바닥 위에 올려 놓으며, 양손의 엄지 손가락의 끝을 서로 맞대어 받쳐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펴고, 또 좌우로 여러 번 흔들어 잘 정돈한 뒤에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는다. 좌선하는 몸가짐이 이미 안정되고 호흡이 잘 조절된 뒤에 이번에는 하복부를 편안하게 하고, 일체의 善惡 모두를 생각(思量)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한 생각(煩惱 妄念)이 일어나면 곧바로 망념이 일어난 것임을 깨닫도록 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것을 깨달으면 곧바로 번뇌 망념은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오래 오래도록 하여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는 번뇌 망념이 없어진다면 자연히 나와 경계도 없어져 하나(一片)가 된다. 이것이 좌선의 요술인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 볼 때 좌선이야말로 안락의 법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좌선을 하여 병을 얻은 자가 많으니, 이것은 대개 좌선의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혹시 아직 자기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여 밝히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바람부는 방향에 불을 놓는 것같이 불길이 쉽게 번지는 것처럼 많은 노력을 쏟지 않더라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자각하여 납득해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하며, 반드시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바라건데 제발 모든 禪友들이여! 이 文章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자신을 구제함은 물론 또한 타인들도 제도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正覺을 이루도록 하자! 뒤표지 안쪽면 문구 만약 한 생각의 煩惱 妄念이 일어나면 곧바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깨닫도록 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깨달으면 곧바로 번뇌 망념이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오래 오래도록 하여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는 번뇌 망념이 없어진다면 자연히 나와 경계도 없어져 하나(一片)가 된다. 이것이 좌선의 요술인 것이다. 본교는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학술과 인격을 연마하고 민족과 인류사회 및 자연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자비 를 충만케하여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는 이상세계의 구현을 건학이념으로 한다. 본교는 건학이념에 따라 학술의 이론과 응용방법을 연구․교수하여 불교를 비롯한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노력하며 민족과 인류사회의 이상실현에 기여할 지도 적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